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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도다리 현인 노래비
 영도다리 현인 노래비
ⓒ 이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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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제2의 대도시이자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항도, 그리고 근래에는 영화의 도시로도 이름을 알리고 있는 부산. 부산은 도시 역사의 본격적인 전개를 19세기 후반 개항으로 시작했다. 부산의 지난 140년의 위상은, 한국 근현대사 여러 분야에서 수도 서울 못지않은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특히 영화와 함께 대중문화의 양대 축이었던 대중음악에서 부산의 위상은 각별하다. 수많은 대중음악가를 배출하고 숱한 명곡의 현장이었던 것은 물론, 한국 최초의 지역 음반회사가 설립된 곳이 부산이었고(1948년 무렵 코로나레코드), 6·25전쟁 기간 동안 전시 대중음악의 명맥을 대구와 함께 이어간 곳도 부산이었다. 1950년대 6대 음반회사 중 두 곳이 부산에 있었고(도미도레코드와 미도파레코드), 1960년대 중반까지도 부산의 지역 대중음악계가 나름의 독자성을 가지고 있었다.

지금은 부산 대중음악계가 과거와 같은 활력을 잃어버렸지만, 지난 역사의 자취를 더듬어 볼 수 있는 노래 관련 유적과 명소는 이틀 정도의 답사 코스를 짜기에도 충분하다. 그만큼 부산 곳곳에 노래의 흔적이 남아 있다. 이 흔적을 더듬는 이들이 가장 손쉽게 찾을 수 있는 기념물은 단연 대중가요 노래비다. 부산 대중가요 노래비의 이모저모를 보면 다양한 이야깃거리를 만날 수 있다.

영도다리 옆 현인 노래비, 여러군데 가사 오류

송도해수욕장 현인 노래비
 송도해수욕장 현인 노래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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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도해수욕장 현인 소개 비석
 송도해수욕장 현인 소개 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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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13년에 들어 올리는 기능이 복구된 영도다리 초입(영도 방향)에는 부산 영도에서 태어나 한 시대를 풍미한 가수 현인의 노래비가 있다. 앉아 있는 모습의 현인 동상과 함께 조성된 노래비에는 그의 대표작 <굳세어라 금순아> 가사가 새겨져 있다. 2절 가사 말미 "영도다리 난간 위에 초생달만 외로이 떴다"라는 대목 덕에 이 노래가 영도다리 옆에 서게 되었을 것이다. 2003년에 건립되었으니 그리 오래되지는 않았지만, 부산 명물로 재탄생한 영도다리 덕에 많은 이들의 발길이 닿고 있다.

가사가 노래비 건립에 주요 배경이 된 만큼, 해당 대목 외에도 제대로 신경 써서 기록을 했으면 좋았을 대목이 있다. 아쉽게도 영도다리 <굳세어라 금순아> 노래비에는 미비한 점이 다소 많다. 1절 '길을 잃고 헤매었더냐'는 '길을 잃고 헤매었던가'로, 2절 '고향 봄도 그리워진데'는 '고향 꿈도 그리워진다'로 잘못 기록되어 있고, 3절은 아예 누락되어 작품의 완결성을 온전하게 보여주지 못했다.

또 노래비 뒷면에 있는 현인 작품과 약력에도 많은 오류가 보인다. <신라의 달밤> 발표 연도는 1947년이 아닌 1949년이고, <고향 만 리>와 <비 내리는 고모령>도 1948년이 아닌 1949년에 발표된 작품이다. 가장 중요한 <굳세어라 금순아>는 1950년 발표작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1953년이 맞다. 1962년에 한국연예협회 부이사장으로 선임되었다는 내용 역시 1963년 이사로 고쳐야 한다.

송도해수욕장 현인 동상
 송도해수욕장 현인 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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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쉬움이 많은 영도다리 현인 노래비를 뒤로 하고 영도 서쪽 송도해수욕장으로 발길을 옮기면 또 다른 현인 동상과 노래비를 만나게 된다. 영도다리 쪽보다 조금 늦은 2007년에 만들어진 것인데, 전체 규모는 훨씬 큰 편이다. 인접한 곳에 같은 가수의 동상과 노래비가 둘씩이나 있기가 쉬운 일은 아니니, 부산을 대표하는 대중음악가로서 현인의 위상이 그만큼 중요하다고 볼 수 있다.

송도 동상은 영도다리 동상과 달리 서서 노래하는 모습을 취하고 있고, 노래비에는 역시 <굳세어라 금순아>가 새겨져 있다. 그밖에 현인의 약력과 대표작을 기록하고 조성 경위를 적은 비석이 각각 따로 있고, 버튼을 눌러 현인의 노래를 들을 수 있는 장치도 만들어져 있다. 경찰서 앞에 다소 어색하게 서 있는 영도다리 쪽과는 달리 송도 동상과 노래비는 주변 정비가 상당히 잘 되어 있는 편이다.

하지만 송도 노래비 역시 적지 않은 오류를 안고 있다. 3절 가사가 모두 기록된 것은 다행이나, 1절 '금순아 어디로 가고'는 '금순아 어디를 가고'로, 2절 '고향 봄도 그리워진데'는 '고향 꿈도 그리워질 때'로, 3절 '받고서 살아를 간들'은 '받고서 살아를 본들'로 잘못 표기되어 있다.

영도다리 현인 노래비 뒷면 약력
 영도다리 현인 노래비 뒷면 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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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작품을 소개한 다른 비석에도 문제가 많기는 마찬가지다. 영도다리 노래비의 오류가 그대로 반복된 것은 물론 <럭키 서울>(1949년), <서울 야곡>(1950년), <꿈이여 다시 한 번>(1959년) 등도 발표 연도가 틀리게 적혀 있다. <굳세어라 금순아>을 1953년 발표작으로 맞게 기록한 것은 그나마 다행이다.

전문성 부족했던 자문, 노래비 수정 시급하다

노래를 나오는 대로 들어야 하는 영도다리 쪽과 달리, 송도에는 직접 현인의 노래를 골라 들을 수 있는 장치가 마련되어 있다. 관람객의 편의를 좀 더 생각한 처사이기는 하나, 막상 노래를 들어 보면 그다지 세심한 배려는 아니었다는 생각도 든다.

노쇠한 때에 녹음한 곡이 많아 아쉬움이 있고, 심지어 어떤 노래는 현인이 아닌 다른 가수 목소리이기도 하다. 일단 세우고 난 뒤 보완에는 신경을 쓰지 않은 걸까. 드러나는 외양에는 돈을 쓰면서 진정 중요한 내용, 콘텐츠에는 무관심한 일처리의 결과일 것이다.

영도다리와 송도 노래비를 각각 관리하고 있는 부산 영도구청과 서구청 담당자에게 노래비 관련 문제점들을 문의했다. 우선 "자문은 유족, 대중음악계 원로, 예총 등 유관 기관에 의뢰했다"고 하는데, 구체적인 연구 성과가 있는 학계 전문가를 외면한 것이 아쉽다.

가사나 연도 오류에 대해, "세월이 흐르면서 가사가 달라졌다"거나 "음반으로 발매되기 전 이미 무대에서 불리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등의 해명이 돌아왔다. 하지만 별다른 객관적 근거가 없는 해명이다. 자문의 전문성이 결여되어 있었음이 다시 확인됐다. 가사에 1951년 1·4후퇴가 등장하는 <굳세어라 금순아>를, 1950년에 이미 무대에서 불리고 있던 곡이라 설명하는 것부터 상식선에서 맞지 않다.

간단히 수정할 수도 없는 노래비가 오류투성이라는 것은 구청 담당자들에게도 해결이 쉽지 않은 문제일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곤란이 무관심과 방치, 나아가 대중음악 역사의 왜곡을 계속 이어가도 되는 이유가 될 수는 없을 것이다.


태그:#부산, #대중가요, #노래비, #현인, #굳세어라 금순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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