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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산에서 바라본 금강. 왼쪽 마을은 원나포. 동산 넘어 십자뜰과 오성산이 자리하고, 그 아래로 서해대교가 아슴하게 보인다.
 공주산에서 바라본 금강. 왼쪽 마을은 원나포. 동산 넘어 십자뜰과 오성산이 자리하고, 그 아래로 서해대교가 아슴하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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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구도시라고 해서 바다만 있는 게 아니다. 군산에는 그 바다를 향해 숨차게 달려온 강이 하나 있다. 물결이 비단 같다 하여 붙여진 이름 금강(錦江)이다. 채만식 소설 제목을 따라 '탁류'로도 불린다. 천 리를 에두르고 휘도는 이 젖줄을 따라 수많은 고을이 자리했고, 사람과 문물이 흘러왔다. 먼 길을 날아온 수십만 마리 철새들도 이곳에 둥지를 틀었다.

전북 장수군 뜬봉샘에서 발원하여 충청남북도를 휘도는 금강은 강경에서부터 충남·전북 도계를 이루다가 군산에서 서해로 흘러든다. 그 물길만도 400km가 넘는다. 그 금강이 군산에서 처음 만나는 마을은 원나포다. 군산의 북동쪽 끝자락에 자리한 원나포는 지금이야 고즈넉한 시골 마을이지만 한때는 중선과 상고선이 수시로 드나들던 큰 포구였다.

백제 시대에는 군사 요충지였고, 조선 시대에는 제주도로 진휼곡을 실어 날랐다. 진휼곡을 실어 나른 것에서 알 수 있듯 나포 지역 주민들은 농사로 풍요로운 삶을 영위하였고, 어민도 많았다고 전한다. 농민보다 어업에 종사하는 사람이 더 많았을 때도 있었단다. 조기 파시가 서는 봄철에 벌어 일 년을 먹고사는 사람이 농민보다 많을 정도로 활기찬 포구였다는 것.

원나포의 옛 이름은 나리포다. 나시포로 불리기도 하였다. 나리포 유래는 조선 숙종 46년(1720) 진휼청에서 설치한 공주·연기 입구의 나리촌(나리포)에 근원을 둔다. 그 나리촌이 나포로 옮겨진 것은 경종 2년(1722). 나리포는 제주도를 비롯한 도서 지역에 흉년이 들면 내륙의 쌀과 섬에서 생산되는 해산물을 교환할 수 있도록 설치한 일종의 공용 임시시장이었다.

'공주산'·'도담삼봉' 전설, 관청의 과중한 세금에서 비롯돼

공주산을 보며 둑길을 걸어가는 회원들. 이곳에서 대청댐까지 거리는 134km.
 공주산을 보며 둑길을 걸어가는 회원들. 이곳에서 대청댐까지 거리는 134km.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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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말(14일)에는 군산 역사와 문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인 '군산 역사 사랑회'(회장 정기문 군산대 교수) 회원 20여 명과 원나포 터줏대감 공주산과 수철리 마을, 익산 입점리 고분 등을 돌아봤다. '등잔 밑이 어둡다'는 옛말처럼 나포에 살면서도 야트막한 공주산 한 번 오르지 못했는데, 역사탐방을 한다는 얘기를 듣고 반가운 마음에 따라나섰다. 

아침에 일어나니 날이 화창하다. 청명한 하늘 아래 햇볕도 따사롭다. 논두렁 밭두렁으로 냉이와 달래, 쑥 등을 찾아 나선 아주머니들. 도시형 농촌의 소박한 정경이 무척 평화롭다. '봄은 봄이로구나!' 소리가 절로 나온다. 열흘 가까이 봄을 시샘하던 꽃샘추위도 파릇파릇 돋아나는 새싹들의 기개에 놀라 멀리 도망간 모양이다.

탐방은 오전 10시 30분에 시작했다. 첫 도착지는 원나포. 강변엔 포구였음을 증명하듯 수문이 세워져 있다. 그 옆에는 해마다 영신당제를 지냈던 공주산(65m)이 아담하게 솟아 있다. 나포(羅浦)는 원래 원나포 지역을 일컫는 지명이었다. 면사무소와 초등학교, 지서도 있었다. 그러다가 1990년대 중반 면사무소가 지금의 자리(옥곤리 문화마을)로 이전하면서 명칭을 넘겨주고 원나포라는 이름으로 남았다.

공주산(公主山)은 다양한 전설이 전해진다. 공주의 태가 묻혀 있다는 설과 충남 공주에서 떠내려온 산을 빨래하던 아낙이 빨랫방망이로 건져내는 바람에 해마다 세금을 바쳤다는 설. 고조선을 위만에게 빼앗기고 남으로 내려온 준왕의 딸이 머물렀다는 설 등이다. 건넛마을 어래산(御來山)은 훗날 익산에 마한을 세우고 공주를 데리러 온 준왕이 머문 산이어서 유래했다 한다. 아래는 김두헌 군산 중앙고 교사 해설이다.

금강과 공주산 전설에 대해 학습하는 김두헌 교사와 회원들
 금강과 공주산 전설에 대해 학습하는 김두헌 교사와 회원들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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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해 공주 원님이 나포지역에 풍년이 들었다는 소문을 듣고 아전들을 보내 산세(山稅)를 작년의 갑절로 내라고 하자 이곳 사또가 골머리를 앓았다고 합니다. 그때 옆에 있던 상노가 사또에게 '공주에서 떠내려온 산이 우리 농토를 점령했으니 손해배상을 받아야 한다고 하십시오'라고 했답니다. 산을 끌어가든가 아니면 그냥 돌아가라는 식으로 말했던 모양이죠.

이에 공주 아전들이 사또 말대로 산을 끌어가겠으니 산을 묶을 동아줄 삼천 발을 꼬아달라고 요구합니다. 그것도 재(灰)로 된 동아줄을요. 그때 상노가 고개를 끄덕였고, 사또도 흔쾌히 약속합니다. 상노를 믿었던 거죠. 공주 아전들이 돌아간 뒤 사또는 상노와 새끼로 동아줄을 꼬아 공주산 허리에 감고 불을 지르니 그야말로 재동아줄이 된 거죠. 그 후로 세금을 내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와 비슷한 설화가 남한강(단양) '도담삼봉'에도 내려옵니다. 그곳은 조선 개국공신 삼봉 정도전과도 인연이 깊죠. 강원도 정선군 삼봉산이 홍수 때 떠내려와 도담삼봉이 됐고, 단양 사람들이 매년 세금을 냈다고 하는데요. 그곳에서 청유하던 정도전이 '우리가 보내달라고 부탁한 것도 아니고 물길을 막고 있으니 필요하면 그냥 가져가라'고 한 뒤부터 세금을 내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러한 전설들은 관청의 과중한 세금에서 비롯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김 교사는 "세계 4대 문명의 발상지이기도 한 강은 생각할 기회를 주며, 강을 보고 도를 깨우친 사람도 많다"며 헤르만 헤세를 예로 들었다. 헤르만 헤세 소설 <싯다르타>에서 주인공이 마지막 깨달음의 경지를 얻은 곳이 강이라고 했다는 것. 그는 이번 답사를 준비하면서 금강이 역사적으로 많은 사연을 담고 있는 걸 알았다며 '공주산 전설'을 대표적으로 꼽았다.

이에 정기문 교수는 "금강을 말할 때마다 어려운 게 있다"며 아쉬움을 표했다. 고대에 백강, 백천강, 기벌포, 백마강 등 발표자에 따라 여러 용어로 쓰이는데 어느 지역인지 혼란스러울 때가 있다는 것이다. 정 교수는 "분명한 것은 백강 전투, 백천강 전투, 기벌포 전투 모두 이 지역을 지칭하며 특히 기벌포 전투는 통일신라군이 당나라군을 몰아내는 아주 중요한 전투인데 정리가 제대로 안 되고 있다"며 "언어학자들의 연구가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철수'로 착각하기 쉬운 마을 이름, '수철리' 유래  

공주산에서 내려온 일행은 점심으로 시골 백반을 맛있게 먹고 '수철 마을'로 방향을 잡았다. 야트막한 산줄기를 경계로 익산시 웅포면과 접하고 있는 수철리에는 지석묘와 어래산성, 도청산성 등이 있다. 원나포에서 장상리(불주사) 방향으로 300m쯤 직진하다가 신방 삼거리에서 좌회전, 수철리(水鐵里) 당산나무 앞에서 김두헌 교사의 해설을 들었다.

수철리 당산나무 아래에서 마을 유래에 대해 해설하는 김두헌 교사
 수철리 당산나무 아래에서 마을 유래에 대해 해설하는 김두헌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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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당산나무 아래에서 바라본 어래산 줄기, 전형적인 시골 고갯길 모습이다.
 마을 당산나무 아래에서 바라본 어래산 줄기, 전형적인 시골 고갯길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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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마을이 쇠(鐵)가 많이 나왔다는 수철리입니다. 부근에 기와를 구웠다는 와촌(瓦村) 마을도 있고, 임금이 책을 읽었다는 서지(書知) 마을도 있지요. 저기 고개 보이시죠. 그 고개를 넘으면 익산시 웅포면입니다. 그곳에 입점리 고분 전시관이 있죠. 이 마을 뒤에 지석묘가 있다는데 제가 확인은 못 했어요. 아까 말씀드린 어래산성은 주민들도 잘 모르더라고요. 저는 이곳에서 과연 철이 나왔을지 의문이 듭니다. 만약에 철이 나왔다면 입점리 고분에서 발견된 쇠못을 비롯해 무기와 농기구도 만들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금관도 발견됐는데요. 이 지역 토착세력들 세력이 상당했던 것 같습니다. 백제에는 요즘의 광역시와 같은 스물두 개 담로가 있었는데 왕족을 파견했다고 합니다. 금관도 왕성에서 왕족에게 준 금관인지, 토착 세력에게 하사한 금관이었는지는 불분명하다고 합니다. 입점리 고분이 발굴된 경위는 1986년 한 고등학생이 칡을 캐다가 발견했는데, 그 유물을 팔았다가 감옥을 살았다고 그래요. 주민들이 탄원서를 냈지만, 허사였다고 합니다. 그러니 여러분도 유물을 발견하면 곧바로 신고해야지, 이거 내꺼다 하면 감옥갑니다. (웃음)"

주민 김남진씨 설명도 들었다. 교직에 있다가 정년퇴직했다는 김씨에 따르면 물이 좋고 철성분이 다량 함유된 쇳덩이가 많이 나와 수철리라 했다는 것. 수십 년 전 쟁기질을 하다가 발견되기도 했단다. 누군가 '철수'로 착각하기 쉽다고 해서 웃음이 터지기도.

예전엔 고갯길도 없었고, 황등장이나 함열장을 가려면 산을 넘어다녔는데, 철을 캐내면서 계곡이 되고 고개가 됐다는 것이다. 마을로 들어오는 도로도 20여년전에 만들어졌다 한다. 김씨는 당산나무도 20여 그루가 있었으나 해방 후 면사무소 짓는다고 모두 베어냈다며 안타까워했다.

설명을 마친 김씨가 "아카시아 향이 물씬 풍기는 5월에 오시면 식사를 대접하겠다"고 하자 이곳저곳에서 탄성이 터지기도. 일행은 김씨와 다음 만남을 약속하고 고개를 넘었다. 입점리 고분(사적 제347호)에 도착한 일행은 다양한 백제 시대 유물이 진열된 전시관과 야외에 전시된 선사시대 지석묘, 복원해놓은 고분군(古墳群) 등을 돌아보고 오후 4시쯤 일정을 마쳤다.

전시관에 실세와 1:1 크기로 재현해놓은 고분, 발굴 당시 덮개석이 발견되지 않았다고 한다.
 전시관에 실세와 1:1 크기로 재현해놓은 고분, 발굴 당시 덮개석이 발견되지 않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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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외에 복원해놓은 청동기시대 앞트기식 돌덧널무덤. 이곳의 무덤들은 금강 하류 지역인 군산 산월리, 장상리, 익산 입점리, 웅포리에서 조사됐다고 한다.
 야외에 복원해놓은 청동기시대 앞트기식 돌덧널무덤. 이곳의 무덤들은 금강 하류 지역인 군산 산월리, 장상리, 익산 입점리, 웅포리에서 조사됐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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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참고문헌: <군산의 역사와 문화>(군산대 박물관), <군산의 지명유래>(군산문화원)


이 기사는 신문고뉴스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원나포, #공주산, #수철리, #입점리 고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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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8월부터 '후광김대중 마을'(다움카페)을 운영해오고 있습니다. 정치와 언론, 예술에 관심이 많으며 올리는 글이 따뜻한 사회가 조성되는 데 미력이나마 힘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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