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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엄리 해안에서 만난 바다직박구리(숫놈), 제주 해안을 여행하는 동안 종종 만났었다. 손에 닿을 듯 가깝게 다가가야 날아가는 제법 배포가 큰 새다.
▲ 바다직박구리 중엄리 해안에서 만난 바다직박구리(숫놈), 제주 해안을 여행하는 동안 종종 만났었다. 손에 닿을 듯 가깝게 다가가야 날아가는 제법 배포가 큰 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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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계 용머리 해안에서도 손에 잡힐 듯한 거리까지 다가왔던 새가 중엄리 바다의 바위에 앉아 이방인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

한림 협재해녀의 집에서 제법 맛난 점심을 배부르게 먹고나자 3박4일의 마지막 날이 주는 피곤함이 몰려왔다. 협재방파제 근처의 바위를 오가면서 여러 차례 다리를 삐끗했다. 건강한 다리였다면 그럴 일도 없었겠지만, 지난 겨울 복사뼈가 골절되어 수술한 후 철심이 들어 있는 상황이라 평지가 아니면 걷기가 힘들다.

그래도 이런 풍경을 언제 또 보겠는가 싶어 걷고 또 걷다보니 제법 묵직하리만큼 다리가 부어 있다.

중엄리바다의 파도를 흑백 장노출로 담아보았다. 시간의 중첩, 검은 돌에 부서지는 하얀 파도와 검은 돌, 흑과 백의 조화가 곧 컬러이기도 하다.
▲ 중엄리바다 중엄리바다의 파도를 흑백 장노출로 담아보았다. 시간의 중첩, 검은 돌에 부서지는 하얀 파도와 검은 돌, 흑과 백의 조화가 곧 컬러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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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 수 없이 신세를 졌다. 한사코 시간을 내서 협재에서 공항까지는 자기가 책임지겠다는 귀일리에 사는 제자에게 염치없이 신세를 지기로 했다.

긴 여행을 떠날수록 짐은 가벼워야 한다. 각종 렌즈로 무거운 배낭과 거추장스러운 짐들로 고생을 한터라 단순하고 가벼운 짐에 대한 생각이 더욱 간절했다.

"바다는 어디가 좋아? 파도가 부서지는 그런 곳이 있을까?"
"용두암 쪽이 좋지요."
"거긴 사람들이 너무 많고, 조금 한가하면서도 파도가 좋은 곳 있을까?"
"신엄리, 중엄리, 구엄리 쪽 가보셨어요?"
"잘 모르겠어. 이제부턴 안내하는 곳으로 따라갈게."


중엄리 새물 근처에서 발본 중엄리 해안은 바위가 많아 하얀 파도가 부서지는 모습이 절경인 곳이다.
▲ 중엄리 바다 중엄리 새물 근처에서 발본 중엄리 해안은 바위가 많아 하얀 파도가 부서지는 모습이 절경인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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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자기에게 맡기라며 애월읍으로 향했다. 애월읍의 신엄리, 중엄리, 구엄리의 바다가 파도가 좋단다. 거기가 어딜까 싶었는데 제주도에 살 적에 종종 왕래를 했던 제주 극동방송 근처의 마을들이다. 그때는 왜 이것들이 보이지 않았을까? 그때는 일상이었기에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일상에서 특별함을 보는 눈, 일상에서 소중한 것을 발견하는 눈, 그것이 그토록 중요하다고 말하면서도 정작 나는 그 중요성을 잃고 살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도시에서의 삶이란 아주 평범한 진리조차도 잊고 살아가게 만든다.

중엄리 바다의 포말, 이제 겨울은 가고 봄이 오려는가 싶은 날이었다.
▲ 중엄리 바다 중엄리 바다의 포말, 이제 겨울은 가고 봄이 오려는가 싶은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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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월읍 중엄리의 새물, 새물은 중엄리 마을 형성당시 식수원이었으며 풍부한 수량으로 지역 주민들이 식수 및 목욕, 빨래터로 사용하여 발길이 끊이지 않던 곳이었다고 한다. 정말 신기했다. 저기 한라산에서 내려오는 단물이 바닷물과 만나는 지점이다. 단물과 바닷물이 만나는 것이 눈이 보인다.

이렇게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 빨래터이기도 하고 목욕을 할 수 있는 이곳에서 수많는 연애, 사랑이야기들에 대한 추억들도 자리하고 있겠지. 슬며시 웃음이 난다.

제주의 화산석 돌이 저렇게 몽돌이 되기까지는 얼마나 많은 시간이 필요했을까?
▲ 파도 제주의 화산석 돌이 저렇게 몽돌이 되기까지는 얼마나 많은 시간이 필요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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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엄리 바다의 갯바위들은 대부분 날카로웠다. 그러나 파도가 자글거리는 곳의 바위들은 얼마나 오랜 세월 파도에 밀리며 돌끼리 부닥쳤는지 동글동글 몽돌처럼 부드럽다. 세월의 흔적, 오랜 풍파의 세월을 당당하게 겪은 이들이 부드러운 것처럼, 저 바위도 그렇게 부드럽다.

부드럽지만 감히 범접할 수 없는 그 무엇, 어쩌면 파도치는 바다에서 작은 몽돌의 자그락거리는 소리를 듣거나 파도소리를 듣는 일은 그들의 숱한 세월의 이야기를 듣는 행위기도 하다. 물론, 중엄리의 화산석은 아직 자갈돌은 아니다. 긴 세월 뒤에 아가들 손에 쥐어도 좋을 자갈돌이 되어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아직은 아니다.

중엄리 바다에서도 주상절리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었다. 크진 않지만 선명하게 육각형 주상절리의 흔적을 간직하고 있다.
▲ 주상절리 중엄리 바다에서도 주상절리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었다. 크진 않지만 선명하게 육각형 주상절리의 흔적을 간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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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엄리 바다엔 규모가 크진 않지만 주상절리도 있다. 주상절리란 분출한 용암이 바닷물을 만나 급속하게 식으면서 5~6각형의 기둥모양으로 수축한 형태를 말한다. 제주도에서는 지삿개 주상절리가 가장 유명하지만, 곳곳에 소규모의 주상절리들이 있다. 중엄리바다에서도 행운처럼 그를 만날 수 있었다.

바다는 어쩌면 단순하다. 바다에서 볼 수 있는 풍경들은 사실 그리 많은 편이 아니지만, 언제나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바다는 신비 그 자체다.
▲ 중엄리 바다 바다는 어쩌면 단순하다. 바다에서 볼 수 있는 풍경들은 사실 그리 많은 편이 아니지만, 언제나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바다는 신비 그 자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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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도가 언젠가는 저 각진 주상절리대도 몽돌로 만들 날이 있을까?
▲ 주상절리 파도가 언젠가는 저 각진 주상절리대도 몽돌로 만들 날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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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의 빛깔은 쪽빛, 그러나 파도와 제주의 화산석만 보면 컬러나 흑백이나 별반의 차이가 없다. 오히려 흑백이 더 많은 색감을 품고 있는 듯하다. 컬러로 담은 사진의 미숙함도 감춰주는 듯한 흑백이면서, 컬러로는 표현되지 않는 그 무언의 색감을 간직하고 있는 흑백사진만의 묘미가 있다.

사진의 찰나의 순간을 담는것으로 알려졌다.

사진에 담기는 순간, 과거다. 그것을 철학적으로 '죽음'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사진은 눈으로 보이는 것을 담는 작업이다.

그러나 셔터의 속도를 조절하거나 겹쳐찍기(다중노출)를 하면 눈으로 보지 못하는 것을 담을 수도 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담을 수 있는 매력, 멈춰진 과거의 중첩된 시간들... 이런 것들이 종종 파도와 바람을 만나면 보통 작업보다 쉽지 않은 장노출사진을 담게 되는 이유다.

중엄리 해안, 파도가 부서지는 제주바다의 백미를 보여주는 듯하다.
▲ 중엄리 해안 중엄리 해안, 파도가 부서지는 제주바다의 백미를 보여주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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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는 잠시라도 쉬지 않지만, 그의 호흡은 그리 급하지 않다. 하루에 단 한 번 썰물과 밀물이라는 호흡이 있을 뿐이다. 파도는 그 긴 호흡을 위한 준비단계다.
▲ 중엄리 바다 바다는 잠시라도 쉬지 않지만, 그의 호흡은 그리 급하지 않다. 하루에 단 한 번 썰물과 밀물이라는 호흡이 있을 뿐이다. 파도는 그 긴 호흡을 위한 준비단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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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제주의 바다와 잠시 이별을 해야할 시간이 되었다. 협재에서 중엄리 그리고 공항까지는 버스를 타고 이동하던 불편한 여행에서 벗어나 편리한 여행이었다. 장단점은 저마다 있다. 그러나 불편한 여행, 천천히 오래 머물 수밖에 없는 여행이 더 깊은 여행을 만드는 것 같다. 

빠르고 편한 여행과 편리한 여행에 익숙해 있다가 오십 중년에 훌쩍 떠난 불편한 여행, 오랜만에 깊은 여행이었다. 그냥 마냥 바다만 바라보고 있어도 좋았던 날도 있었고, 칼바람에 감히 바다 앞에 서지 못했던 날도 있었지만, 제주 바다는 이별할 시간이 되어서야 봄바다의 매력을 발산하기 시작했다.

또 오고 싶게 만들려는 수작임을 알면서도 집으로 돌아가면 또다시 제주바다를 만날 날을 기다릴 것이다.

덧붙이는 글 | 기사에 사용된 사진은 3월 12일(목) 중엄리 바다에서 장노출로 담은 사진들입니다.



태그:#중엄리, #바다직박구리, #장노출, #주상절리, #새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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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소재로 사진담고 글쓰는 일을 좋아한다. 최근작 <들꽃, 나도 너처럼 피어나고 싶다>가 있으며, 사는 이야기에 관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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