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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2015년 2월 13일부터 19일까지, 히말라야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아래 ABC) 트레킹을 일주일간 다녀왔습니다. 이 글은 인생의 반환점을 돌고 있는 마흔 언저리의 나와 K, 두 남자가 히말라야를 오르면서 느낀 여러 생각과 소회를 담은 이야기입니다. 익히 히말라야를 경험하신 분들께는 그때의 기억과 감흥을, 버킷리스트 한 편에 히말라야를 적어 놓고 '언젠가'를 준비하고 계신 분들에게는 설렘과 정보를 함께 나눌 수 있었으면 합니다. - 기자말

밤새 눈이 소복하게 내렸습니다. 별은 하늘 위로 사뿐히 떠올랐습니다.

눈에도 다 담을 수 없는데, 어떻게 휴대폰 카메라에 담을 수 있겠습니까. 새벽녘 히말라야 밤하늘을 수놓았던 별을 표현하려니 도무지 방법이 떠오르지 않습니다. 이번 여정을 준비하며 읽었던 <히말라야, 40일 간의 낮과 밤>이라는 책 표지가 그래도 가장 근접하게 이 밤의 느낌을 전해 줄 수 있을 것 같아 준비해 보았습니다.

<히말라야 40일간의 낮과 밤>(김홍성·정명경 지음 / 세상의 아침 펴냄) 이 책 표지 그림이 그날의 분위기와 가장 잘 어울려 첨부합니다.
 <히말라야 40일간의 낮과 밤>(김홍성·정명경 지음 / 세상의 아침 펴냄) 이 책 표지 그림이 그날의 분위기와 가장 잘 어울려 첨부합니다.
ⓒ 세상의 아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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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4시. 여기서 ABC까지는 2시간 정도를 올라가야 합니다. 해돋이를 위해 어둔 새벽, 눈을 떴습니다. K도 눈을 뜨고 있었습니다. 아니 정확히 표현해서 밤새 극심한 고통으로 눈을 감을 수가 없었습니다. 어제보다 10배는 더 큰 고산병의 통증이 느껴진다고 했습니다. K는 포기하겠답니다. 못 올라가겠다고. 아니, 내려가야겠다고. 포터와 둘이서 잘 다녀오라고 합니다.

고산병인 K와 함께 강행한 산행 그리고 펼쳐진 길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데, 그냥 돌아갈 수 있겠습니까? 동행자 없이 목표 지점에 이른들 기분이 유쾌할 리 없습니다. 날이 밝기를 기다려 보자고, 그러면 몸이 좀 말을 듣지 않겠느냐고 설득을 합니다. 그리고 나는 ABC의 일출 대신 아직 여명이 오지 않은 밤하늘의 수많은 별을 보았습니다.

아침해가 안나푸르나 봉우리를 황금빛으로 물들입니다.
 아침해가 안나푸르나 봉우리를 황금빛으로 물들입니다.
ⓒ 정수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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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이 되어서도 K의 증세는 쉽게 호전되지 않았습니다. 괴로워하는 동행자를 보는 것만으로도 힘이 드는데, 당사자의 고통은 얼마나 클까요? 고민이 되었습니다. 사실, 홀로 ABC를 다녀오는 것도 마음 무거운 일이고, 함께 가자고 하는 것도 사고의 위험으로 부담스러운 일이었습니다.

지나고 나니 정말 무모했던 나의 말, "여기서 아픈 거나 400m 더 올라가서 아픈 거나 차이 있겠어요?"에 고맙게도 K는 기꺼이 의지를 내었습니다. 고산병은 정말 무서운 병이기 때문에, 혹시라도 나중에 당신이 이런 상황을 맞이한다면... 제3자의 입장에서 절대로 무리하지 마시라고 이야기 할 것입니다.

안나푸르나를 향해 가는 순백의 길, 정화의 길
 안나푸르나를 향해 가는 순백의 길, 정화의 길
ⓒ 정수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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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차푸차레 베이스캠프(MBC)에서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ABC)로 가는 길은 완만한 오르막입니다. 다행히 우리가 걷던 시간에는 눈도 오지 않고 구름도 한 점 없는 쾌청한 날씨였지만, 고도가 고도이니만큼 꽤 추웠습니다. 온통 하얀 세상, 절대 침묵의 시간은 나에게 '정화의 길'을 열어 주었습니다.

고산병을 정신력으로 극복하며 순례자의 심정으로 걷고 있는 K의 모습
 고산병을 정신력으로 극복하며 순례자의 심정으로 걷고 있는 K의 모습
ⓒ 정수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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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들이 머릿속에 떠오릅니다. 살아오면서 감사했던 사람들, 척을 지었던 사람들, 지금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 궁금한 내 기억의 한 부분을 공유했던 사람들까지... 일부러 의식하지도 않았는데 내 안에서 '미안합니다, 용서하세요,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라는 말이 터져 나옵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얼굴과 그 메시지가 교차 되면서 마음에 남아 있던 묵은 먼지들을 털어 내었습니다.

K는 저 멀리서 걸어옵니다. 고통을 참으며 한 걸음 한 걸음 내딛는 것이 거의 '오체투지', '삼보일배'와 다름없어 보입니다. 워낙 걸음이 느리기에 보조를 맞춰주는 것은 서로에게 더 힘든 일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나와 포터는 정상적인 속도로 먼저 갔습니다. 온통 하얀 세상, 절대 고독의 시간은 K에게 진짜 자신을 만나는 '순례길'을 열어 주었습니다.

'70대 노인도 갔다 오는 길인데 왜 나는 이렇게 힘들어야 하는가.'

처음에는 자기 자신에 대한 자책과 원망이 올라오다가, 어느 순간 그래도 40년 넘게 버티며 살아준 몸에 대한 감사함이 일어났습니다. '그동안 고생했다'라는 말이 눈물과 함께 나오더랍니다. 그리고는 '몸이 아프다고 왜 마음까지 아파야 하나'라는 생각과 함께 정신차리자는 말을 10번이나 속으로 외쳤답니다. 그 순간 몸에 매여 괴로웠던 마음이 자유로워지면서 오직 심장 박동과 호흡만이 느껴졌고, 걸음걸이 하나하나에 모든 것을 집중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누군가에게는 시작, 누군가에게는 끝인 베이스캠프

파노라마 사진으로 ABC의 전경을 담아봅니다.
 파노라마 사진으로 ABC의 전경을 담아봅니다.
ⓒ 정수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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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 표지만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 표지만
ⓒ 정수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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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ABC(4130m)에 이르렀습니다. 시간이 좀 더 흘러 K도 무사히 도착했습니다. 우리가 흔히 ABC라고 부르는 곳은 안나푸르나 주봉(8091m)의 베이스캠프가 아니라 안나푸르나 남봉(7219m)의 베이스캠프입니다.

그리고 이곳은 '베이스캠프'라는 말 뜻 그대로 고봉을 오르는 산악인들에게는 시작점일 뿐입니다. 하지만 이곳을 최종 목적지로 정한 사람들에게는 감격의 종착점입니다. 성취감 가득한 세리머니를 마음껏 하고 주변 경관을 감상한 후 로지에 자리를 잡습니다.

추위와 피로를 녹여주는 커피 한 잔의 여유를 즐겨 봅니다. 그때 테이블 너머로 흑백 사진 하나가 눈에 들어오네요. 2011년 10월 안나푸르나 남벽에 새로운 루트를 개척하기 위해 등반하다가 실종된 고 박영석 대장과 강기석·신동민 대원의 사진입니다. 로지에서 가까운 거리에는 추모비도 있었습니다.

로지 벽면 사진에 걸린 고인들의 미소
 로지 벽면 사진에 걸린 고인들의 미소
ⓒ 정수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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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인 중에 전문적인 산악 등정 활동을 했던 분이 있습니다. ABC 트레킹을 준비하면서 많은 도움을 받았는데, 자연스럽게 세 분에 관한 이야기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지구의 3극점(북극점, 남극점, 에베레스트산)과 히말라야 14좌, 7대륙 최고봉을 모두 등반하여 세계 최초의 산악 그랜드슬램을 달성했던 박영석 대장님은 도전 정신의 표상으로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산악인들 사이에서도 매우 존경 받는 분이었다고 합니다.

일반인들은 잘 모르지만 산악인들 사이에서 실력 있는 대원으로 유명했던 강기석, 신동민님도 있습니다. 하지만 사고 당시 언론에서는 그 두 분의 이름은 제대로 거론조차 해주지 않아 많은 산악인들을 안타깝게 했다더군요. 예전에 어느 지인의 메신저 프로필 문구를 매우 인상 깊게 본 적이 있었습니다.

"사랑한다면, 죽을 수도 있다."

세 분의 추모비를 보며, 그 문구가 연상 되었습니다. 뜻하지 않게 갑작스런 최후를 맞았지만, 그곳이 그토록 사랑했던 산이었기에... 어쩌면 마지막 순간에도 정말 행복하지 않았을까하는 생각을, 감히 상상해봅니다. 그리고 설산을 바라보며 진지하게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 봅니다. 목숨을 기꺼이 바칠 만큼 사랑하는 일을 하고 있는가? 지금 당장 홀연히 떠난다고 해도 후회 없는 길 위에 서 있는가?

천상에서도 더 높은 곳을 향하고 있을 고인들의 명복을 빕니다.

(다음편에 계속)

로지에서 가까운 거리에 고인들을 기리는 추모비가 있다.
 로지에서 가까운 거리에 고인들을 기리는 추모비가 있다.
ⓒ 정수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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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히말라야, #안나푸르나, #트레킹, #박영석, #추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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