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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남북정상회담 회의록 미이관사건'으로 재판을 받아온 백종천 전 청와대 안보실장(왼쪽)과 조명균 전 안보정책 비서관이 6일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1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다.
 '2007년 남북정상회담 회의록 미이관사건'으로 재판을 받아온 백종천 전 청와대 안보실장(왼쪽)과 조명균 전 안보정책 비서관이 6일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1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다.
ⓒ 유성호/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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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일 1심 재판이 시작된 오전 11시가 꽤 지났는데도 소식이 없었다. 재판결과 세 가지 경우의 수를 놓고 노무현 재단 성명안을 준비해놓은 터였다. 사안은 명징했으나 다른 결과를 대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오전 11시 50분. 휴대전화 메시지가 떴다.

'무죄'

'2007년 남북정상회담 회의록 미이관사건' 1심 재판은 그렇게 끝났다. 다행히도, 당연한 결과를 확인했다. 여전히 마음은 무거웠다. 다행이라고, 당연한 결과라고 이제 내려놓으면 되는 건가. 9개월 전인 2014년 5월 12일 첫 공판이 겹쳐졌다.

검찰 "노 전 대통령 지시에 의한 것이라 해도..."

이날 첫 공판은 검찰과 변호인단의 프레젠테이션(PT)으로 진행됐다. 김광수 부장검사가 나선 검찰의 프레젠테이션은 방청석에서 듣기에도 많이 '불편'했다. 이런 식이었다.

"피고인들의 행위가 노 전 대통령의 지시에 의한 것이라 해도 이는 역사를 지운 행위이며 후대에 대한 중대 범죄입니다."

애초부터 '노무현 대통령의 NLL 포기 발언을 감추기 위해 조직적으로 회의록을 삭제했다'고 주장해온 검찰은 자신들만의 그림을 그려놓고 끊임없이 노 전 대통령을 꿰어 맞췄다. 자신들이 만든 프레젠테이션 자료에 노 전 대통령이 삭제를 지시했다는 어떠한 팩트도, 근거도 내놓지 못했으면서 '노 전 대통령 지시에 의한 것이라 해도' 운운하며 혐의를 덧씌웠다.

김광수 부장검사의 프레젠테이션은 조선시대 신흠의 <상촌휘언>을 인용하는 것으로 끝났다.

선조 즉위년부터 임진왜란 직전까지 역사기록이 깜깜하다.
임란 도중 사관 4인방이 사초책을 모두 불태우고 도망갔기 때문이다.
잃어버린 사적을 다 찾아 기록하자면 10년이 걸려도 완성할 수 없을 것이다.
도망자들에게 다시 역사를 맡기는 것은 나라의 수치이다.

애초에 무리였던 검찰의 주장

고 노무현 대통령과 고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2007년 10월 4일 평양 백화원 영빈관에서 남북공동선언문에 서명한 뒤 손을 맞잡아 들어 올리고 있는 모습.
 고 노무현 대통령과 고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2007년 10월 4일 평양 백화원 영빈관에서 남북공동선언문에 서명한 뒤 손을 맞잡아 들어 올리고 있는 모습.
ⓒ 사진공동취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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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간, 분노보다 깊은 모멸감 같은 것이 엄습했다. 이런 자리에서 왜 이런 말을….

들을 말이 아니었다. 법정에서, 검찰로부터, 더구나 대통령기록물에 대해, 노 전 대통령이 왜 이런 비아냥거림을 당해야 하는지 받아들일 수 없었다.

검찰은 내내 그런 식이었다. 대통령기록관을 무려 91일 동안 압수수색하는 등 114일간의 수사 끝에 내놓은 결과도, 1년 2개월 동안 진행된 준비기일 포함 21차례의 공판 과정에서도 어떻게든 노 전 대통령을 끌어들이기 위해 안달했다.

급기야 공소를 제기한 지 무려 1년이 경과한 지난해 말, 자신들이 내놓은 공소장까지 변경해가며 '노 전 대통령이 NLL 포기 발언을 감추기 위해 회의록 삭제를 지시했다'는 주장을 고집했다. 공소장 변경의 근거라는 게 '회심의 무엇'도 아닌, 남북정상회담 전후 언론 보도 같은 것들이었다.

검찰 주장은 애초부터 무리였다. 회의록을 삭제할 아무런 이유도, 동기도 없었다. 2013년 불법적으로 공개된 회의록 전문을 통해 이미 확인했듯이 노 전 대통령은 그 어디에서도 NLL 포기 발언을 한 바 없었다. 때문에 회의록을 폐기할 어떠한 이유도 없으며 실제로도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검찰은 끊임없이 노 전 대통령을 겨냥했다. '남북정상회담에서 NLL을 포기해놓고 국민들 앞에선 포기하지 않았다고 거짓 해명했다'는 식의 막무가내 주장을 거두지 않았다. 악의였는지, 병적인 집착이었는지 모르겠으나 적어도 객관적 사실이나 진실을 규명하겠다는 태도와 거리가 먼 것은 분명했다.

이번 사건은 2012년 대선 당시 정략 차원에서 'NLL 포기'라는 허위사실을 유포하고, 국정원과 군 등 국가기관의 선거 개입과 조직적인 은폐 사실이 드러나자 국면 전환을 위해 남북정상회담 회의록을 불법 유출한 집권여당의 부도덕한 행태에서 비롯됐다. 검찰은 바통을 이어받아 114일간의 대대적인 수사를 진행했다.

그리고 1년이 넘은 재판 끝에 드러난 '사실'은 NLL 포기는 물론, 회의록 폐기도 없었다는 것이다. 노 전 대통령은 폐기 지시는커녕 녹취록을 한 자, 한 자 정확하게 다듬고 정확성·완성도가 높은 대화록으로 정리해 기록으로 남기라고 지시할 만큼 국가기록을 중시하고 국가기록관리에 최선을 다한 대통령이었다는 것이다. 그랬기 때문에 34만 건의 지정 기록, 9700여 건의 비밀 기록을 포함해 당시로서는 유례없는 825만여 건의 대통령기록을 대통령기록관에 이관했던 것이다.

'대통령기록 암흑기' 불러올 '노무현 대통령기록 잔혹사'

그 결과로 받아든 대가는 대통령기록을 제멋대로 들춰보고 정략적으로 악용하는 행태를 목도하며 '사초 폐기'로 대표되는 패륜적 비난과 매도를 당하는 일이었다. 검찰로부터 '사초를 불태우고 도망간 자들'이라며 '나라의 수치' 운운하는 손가락질을 당하는 일이었다.

법원의 무죄 판결만으로 이런 지독한 역설의 현실을 바로잡을 수 있겠는가. <상촌휘언>을 재인용한다면, 무참히 훼손된 대통령기록 문화는 10년이 걸려도 복구할 수 없을 것이다. 기록을 남긴 자들이 되레 '사초 폐기' '나라의 수치'라는 소리를 듣는데 누가 감히 기록을 남기려 들 것이며 그나마 남긴 기록은 얼마나 유의미하겠는가.

<상촌휘언>은 "선조 즉위년부터 임진왜란 직전까지 역사 기록이 깜깜하다"라고 했다. 언제부터 언제까지가 될지 모르겠으나 '노무현 대통령기록 잔혹사'는 결국 '대한민국 대통령기록 암흑기'로 이어질 것이다. 그 죄와 퇴행의 대가를 누구에게, 어떻게 물어야 할 것인가.

노무현 대통령이 퇴임 후인 2008년 4월 11일 국가기록원 나라기록관 개관을 축하하며 보낸 친필 메시지.
 노무현 대통령이 퇴임 후인 2008년 4월 11일 국가기록원 나라기록관 개관을 축하하며 보낸 친필 메시지.
ⓒ 노무현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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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이 글을 쓴 김상철님은 노무현재단의 노 전 대통령 사료편찬사업 전담 기구인 노무현사료연구센터 본부장을 맡고 있습니다.



태그:#남북정상회담 회의록, #남북정상회담 대화록, #노무현 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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