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조선왕을 말하다 1> 표지
 <조선왕을 말하다 1> 표지
ⓒ 위즈덤하우스

관련사진보기

연말연시에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을 읽었다. 재미있게 읽었다. 조선시대의 사관(史官)의 기록이니까 모든 이야기는 왕을 중심으로 펼쳐진다. 당시에 법적으로 사관이 기록한 사초는 누구도 볼 수 없게 되어 있었고 왕의 일거수일투족을 기록하기 위해 신하들과의 만남은 반드시 사관이 배석하도록 되어 있었기 때문에 기록은 신빙성을 갖는다. 유네스코의 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이유다.

그런데 모든 이야기는 프레임이라는 덫에 갇히는 법이다. 같은 사건과 사안이라고 해도 어떤 부분에 초점을 맞추는가에 따라서 그리고, 이야기를 전하는 화자의 입장에 따라서 특정 의도가 개입될 여지가 있다는 얘기다.

<조선왕조실록>도 예외일 수 없다. 효종과 숙종은 자신의 견해를 좀 더 자유롭게 피력하기 위해 사관 없이 신하와 독대한 적이 있고, 세조와 선조 등 몇몇 왕의 실록은 이후 정권의 당익에 따라 수정실록이라는 이름으로 남기도 했으니 말이다.

그래서 연전에 읽었던 <조선왕을 말하다 1, 2>를 다시 읽기 시작했다. 역사평설가 이덕일의 작품이다. 이 책의 서문에서 이덕일은 역사평설이 필요한 이유를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조선에서 사료를 남긴 사람들은 거의 예외 없이 강한 목적지향성을 갖고 있었다. 그런 목적지향성이 사료에 어떻게 반영되었는지 엄밀하게 비판하지 않은 채 그들의 시각이 후대에 그대로 전해진다. 이러한 경우 한 인물의 실제 행적은 과거 기록을 남긴 사람들의 목적지향성에 의해 일정 부분 가려질 수밖에 없다. 이 때문에 현재의 역사인식이 조선 사관들의 가치관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총 800여 페이지에 달하는 책은 두 권으로 나뉘어져 있고, 각 책은 네 개의 부(部)로 구성되어 있다. 두껍지만 <이시백의 조선왕조실록>만큼이나 흥미진진한데다가 새로운 사실이 등장하기 때문에 어렵지 않게 읽힌다. 사관의 기록과 무슨 무슨 '일기'나 '잡기', '강목'등과 같은 당시 사대부들의 기록들을 섭렵한 저자의 해박한 지식과 해석능력은 읽는 재미를 더함은 물론, 우리 역사 이해의 폭을 넓혀준다.

계유정난, 왕권과 국세 약화시킨 최악의 쿠데타

이방원이 비록 두 번에 걸친 왕자의 난을 일으키면서 왕이 되었지만 그의 치세는 왕권강화와 국가 안정이라는 엄연한 공적을 남겼다. 왕이 되자 공신들은 물론, 자신의 처와 처가식구들을 정치무대에서 배제했기 때문이다. 아들 세종의 태평성대는 태종의 정지작업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반면에 세종의 아들 세조는 정통성을 잃은 군주였다. 김종서를 철퇴로 내리쳐 살해한 계유정난으로 정권을 장악하고, 형이었던 문종의 아들 단종을 폐위시켰으니 헌정질서를 유린한 쿠데타가 분명하기 때문이다. 야욕의 노예가 된 세조의 등장으로 조선은 시대의 물줄기에서 벗어나 표류하게 된다.

"세조 1년 12월 정공신(定功臣)의 자제, 사위, 수종자 들을 원종공신(原從功臣)으로 책봉했는데, 무려 2,300여 명이었다. 가족까지 1만명이 넘는 공신들과 그 가족들은 수양이 왕위를 꿈꾸지 않았으면 탄생하지 않았을 사회악이었다."(1권 p.62)

이렇게 공신으로 책봉되면 면책특권이 부여되고 막대한 토지와 직업(벼슬)이 보장됐으니 저자의 비판은 합당하다는 생각이다. 세조의 조치는 태종이 피의 숙청을 통해 제거했던 특권층이 다시 부활하는 역사의 반동이기 때문이다.

이 당시 공신들이었던 한명회, 정인지, 신숙주 등은 세조가 죽으면서 도입한 원상제로 왕들 위에 군림하는 원상이 되어 여러 왕을 거치면서 정국을 주무르는 바람에 국력이 크게 쇠퇴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그들에게 국가의 모든 결정권이 주어진데다가 벼슬을 매매할 수 있는 권한을 야기하는 이른 바 분경까지 허용된 상태였기 때문이다.

질투를 근거로 왕비를 내쫓은 성종은 연산군의 시대를 초래했고 연산군의 폭정은 아무 목표가 없는 것이었으며 중종 대에 가서는 모든 양반들이 세금을 면제 받으면서 백성들의 삶이 피폐해지는 결과를 초래한다. 결국, 국세가 기운 조선은 중국과 조선의 먹잇감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에도 변하지 않은 조선

<조선왕을 말하다 2> 표지
 <조선왕을 말하다 2> 표지
ⓒ 위즈덤하우스

관련사진보기

조선 중기의 임진왜란은 위기였지만 기회이기도 했다. 특권층이 기승을 부리는 사회에 경종을 울렸기 때문이다. "선조 26년(1593년) 10월 영의정으로 복귀한 류성룡이 노비들도 군공을 세우면 벼슬을 주는 면천법, 토지 소유의 다소에 따라 세금을 납부하는 작미법, 양반도 노비들과 함께 군역에 편입시킨 속오군제도 같은 개혁입법을 강행하면서 회생의 전기가 마련되었다."(1권 173)

전쟁이 끝나면서 모든 개혁입법은 취소되었고 다시 조선은 양반천국으로 돌아간다. 모두가 잘 살 수 있는 방법을 거부한 양반들의 조선은 중국의 명청교체기를 맞아 기회를 잡을 수도 있었지만 거꾸로 위기를 자초한다. 광해군을 몰아낸 인조반정의 명분이 친명사대에 있었기 때문이다. 병자호란은 청의 발호와 조선의 시대착오적인 반청정책으로 비롯된 비극이었다.

태종의 강력한 후원을 받은 세종의 정치는 언어, 과학, 농업 등 전방위로 눈부신 업적을 이뤘다. 독서왕이기도 했던 세종은 지식경영의 달인이었고, 당대최고의 언어학자이기도 했다. 또 세종 때에는 미천한 신분으로 고위직에 오른 인물이 많다고 전한다. 동래 관노출신으로 종3품 대호군까지 오른 장영실이 대표적이다.

그런데 이렇듯 성군으로 추앙받는 세종도 고개를 갸웃하게 하는 법을 시행한다. 종모법과 수령고소방지법이다. 이전까지는 종부법으로 아버지가 양반이면 모계가 천인이어도 양인이 될 수 있었지만 종모법의 시행으로 천인이 늘어나는 폐해가 발생했다. 수령고소방지법은 고을 수령의 학정에도 고소가 불가능하니 문제가 많은 법이라고 할 수 있다. 세종의 빛과 그림자다.

"오호라!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라는 정조의 취임일성은 대신들을 경악케 했다. 하지만 정조는 정적들의 제거에 초점을 맞추지 않았다. 탕평책과 시의적절한 정책으로 승부했다.

"정조는 신도시를 건설할 계획이었다. 신도시는 뒤주에 갇혀 죽은 사도세자가 부활하는 도시이자 조선이 닫힌 과거를 딛고 열린 미래로 나가는 길을 제시할 수 있는 도시여야 했다. 정조가 화성 신도시 건설을 시작한 재위 18년(1794년)은 사도세자가 살아 있었다면 환갑을 맞는 해였다. 또한 태조 이성계가 개경에서 한양으로 천도한 지 400년이 되는 해이기도 했다."(2권, p.339)

정조는 북학파 또는 이용후생학파, 실학파 등으로 불리는 서자 출신의 지식인들을 등용함으로써 노론의 특권 카르텔에 맞섰다. "역사는 어떤 관점에서는 특권과 능력의 대결 과정이기도 하다. 현재 한국의 선진국 진입을 가로막는 가장 큰 암적 요소가 학벌 카르텔이라는 점에서 정조 때 능력을 중시한 경험은 큰 교훈을 준다"(2권, p.319)는 설명에서 서인에서 노론으로 이어져 오늘에 이르는 학벌, 문벌사회의 폐해를 다시 생각하게 된다.

왕조시대는 왕이 모든 것을 결정하는 줄 알았지만 조선시대를 보면 허수아비에 지나지 않은 왕들도 발견됨을 알 수 있다. 특히, 조선 초엔 세조가 만든 원상제로 한명회, 신숙주 등이 왕을 능가하는 권력을 차지했고 이는 당파전으로 이어진다. 전쟁과 가뭄, 흉년에도 사대부들과 왕들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에 여념이 없다.

특히, 세금납부와 병역회피가 대표적이다. 이런 지도층을 믿고 충성할 백성들은 없다.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이 파죽지세로 한양을 향해 진격해 오자 선조가 한 말 "적병이 얼마나 되던가? 절반은 우리나라 사람이라고 하던데 사실인가?"은 사실로 밝혀졌다. 지금의 우리나라 대통령은 조선의 왕들 중 누구와 닮았는가.

덧붙이는 글 | <조선 왕을 말하다 1, 2> 지은이 이덕일, 위즈덤하우스, 2010년 5월 1권 발행, 11월 2권 발행



조선 왕을 말하다 - 이덕일 역사평설

이덕일 지음, 권태균 사진, 역사의아침(위즈덤하우스)(2010)


태그:#조선, #왕, #이덕일, #정조, #선조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