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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남준은 1963년 독일 '부퍼탈'에서 첫 전시가 열린지 꼭 30년인 1993년 세계적 미술축제인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전자초고속도로'로 황금사자상을 수상했다. 이 작품이 어떤 것이며 또 그해 '과천국립미술관'에서 열린 '휘트니 비엔날레(서울)'와 대전에서 열린 '세계박람회'에서 어떤 성과가 있었는지 알아보자. - 기자의 말

1993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황금사자상' 수상

백남준, '마르코 폴로(Marco Polo)' 1993. 아모레퍼시픽 미술관 소장. 아래는 1993년 베니스 비엔날레(독일관) 표지 사진. 13세기에 이미 동서교류를 시도한 '마르코 폴로'는 백남준 주제와 꼭 맞는 대표인물이다. 아래에서 '단군 스키타이 왕'도 살짝 보인다. 폭스바겐 폐차를 개조해 위성TV안테나를 달고 지구촌을 누빌 채비가 끝난 백남준 모습이 우스꽝스럽다.
 백남준, '마르코 폴로(Marco Polo)' 1993. 아모레퍼시픽 미술관 소장. 아래는 1993년 베니스 비엔날레(독일관) 표지 사진. 13세기에 이미 동서교류를 시도한 '마르코 폴로'는 백남준 주제와 꼭 맞는 대표인물이다. 아래에서 '단군 스키타이 왕'도 살짝 보인다. 폭스바겐 폐차를 개조해 위성TV안테나를 달고 지구촌을 누빌 채비가 끝난 백남준 모습이 우스꽝스럽다.
ⓒ 김형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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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남준은 1962년 "황색재앙(13세기 초 몽골이 유럽을 침공했을 때 받은 유럽인의 공포감)은 바로 나다"라며 세계를 호령하는 문화계의 칭기즈칸이 되겠다고 선언했다. 바로 그 다음해(1963년) 독일에서 첫 전시를 열었고, 30년 만에 세계최고의 미술축제인 베니스 비엔날레(1993년)에서 독일작가 '한스 헤케(H. Haacke)'와 함께 '황금사자상'을 받았다.

두 작가의 공통점은 다 분단을 겪었다는 점이다. 그러기에 '백남준'은 남북만 아니라 세계의 '하나 됨'을 추구했다. '헤케'는 독일 나치를 신랄하게 비판하면서 인류의 공존과 평화를 촉구했다. 한국출신의 백남준이 독일대표로 뽑힌 건 파격적인 일로 독일에서도 반대여론이 있었다. 역으로 그건, 백남준이 독일에서 영웅이었다는 증거라고 생각한다.

이 상을 타면서 백남준은 "상을 타는 건 좋은 일이나 올림픽처럼 꼭 상을 타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소감을 밝혔다. 백남준은 2년 후 독일 <캐피털> 지가 발표한 미술가 중 세계 5위에 오를 정도로 전성기를 구가한다.

수상작 제목은 '전자초고속도로'인데, 백남준은 '마샬 맥루한'처럼 지구를 하나의 촌으로 봤다. 동서가 미디어환경의 변화에 따라 교류와 소통을 통해서 서로 만나야 한다는 주제를 표현했다. 최초의 실크로드 개척자인 '마르코 폴로' 외 '알렉산더 대왕', '칭기즈칸' 등이 주인공이다. 이들이 고비 사막부터 유목민의 이동수단인 말과 코끼리 등을 타고 가는 모습이다.

그 중 우리의 눈길을 끄는 건 역시 우주선을 타고 가는 한민족의 전설적 시조 '단군'이다. 그런데 이 단군 앞에 '스키타이 왕'이 붙어있다. 백남준은 스키타이를 "유라시아 초원지대를 지배했던 고대 유목기마집단으로 기원전 6세기 흑해북쪽에서 발원하여 기마의 스피드로 시베리아, 몽골고원, 한반도 남단까지 진출했다"고 설명한다.

여기서 보면 백남준은 단군을 기존의 민족주의적 관점이나 실증주의적 역사관으로 보지 않았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국가나 국경의 개념을 넘어 북방에서 내려온 기마민족의 유목민계통으로 본 것이다. 백남준은 우리가 북방계 기마유목민족임을 강조했다.

베니스 비엔날레가 백남준에게 주는 의미

백남준, '칭기즈칸의 귀환' 1993. 베니스 비엔날레 출품작 중 하나로 고비 사막과 같은 드넓은 대지를 거침없이 전진하는 유목민을 연상시킨다. 백남준 아트센터 소장품이다.
 백남준, '칭기즈칸의 귀환' 1993. 베니스 비엔날레 출품작 중 하나로 고비 사막과 같은 드넓은 대지를 거침없이 전진하는 유목민을 연상시킨다. 백남준 아트센터 소장품이다.
ⓒ 김형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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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작품은 전자초고속도로 중 하나로 제목은 '칭기즈칸의 귀환'이다. 전자아트와 위성아트를 상징하는 TV모니터를 자전거에 싣고 백남준이 칭기즈칸이 되어 귀환하는 모습이기도 하다. 그러니 이 제목을 '백남준의 귀환'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백남준은 인류의 삶에서 정보는 매우 중요하기에, 동양과 서양의 계속 만나 접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아시아 중 유럽을 벌벌 떨게 한 나라는 중국의 황제가 아니라 몽골의 칭기즈칸이었다. 그런데 칭기즈칸의 후손을 자칭하는 백남준은, 그냥 정복자 칭기즈칸 아닌 하이테크의 황제인 문화 칭기즈칸이 되고 싶어했다. 정치나 경제보다는 문화와 예술이 진정 인류를 평화롭게 하나로 엮는 최선책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1993년 베니스 비엔날레 출품작인 '전자초고속도로(일렉트로닉 수퍼하이웨이 Electronic Superhighway)'의 부제는 '베니스에서 울란바토르'이다. 서울이 아니라 울란바토르를 붙인 건 백남준이 자신의 뿌리를 한반도로 국한시키지 않고 멀리 몽골로까지 확대해서 봤기 때문이다. 왜 그럴까? 다음 글을 보면 알 수 있다.

"선사시대, 우랄알타이족의 사냥꾼인 우리는 말을 타고 시베리아에서 페루, 한국, 네팔, 라플란드(핀란드)까지 세계를 누볐고, 그들은 농업중심의 중국사회처럼 중앙에 집착하지 않았고 몽골처럼 더 멀리 보기 위해 여행을 떠나 새로운 지평을 봤다."

클린턴의 '정보초고속도로'는 백남준의 아이디어?

'정보초고속도로' 구상계획을 표지로 삼은 1993년 4월 12일 자 <타임>지 표지
 '정보초고속도로' 구상계획을 표지로 삼은 1993년 4월 12일 자 <타임>지 표지
ⓒ TI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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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니스 비엔날레가 열리기 직전인 1992년 말,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빌 클린턴과 엘 고어가 '정보초고속도로'라는 개념을 도입했다. 빌 클린턴은 정보혁명을 위한 사회기반시설의 확충을 선거공약으로 내세웠고, 재선에 성공했다. 클린턴은 취임하는 날, "미국 전역을 광케이블에 의한 정보초고속도로국가가 되게 하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그러나 백남준은 클린턴의 아이디어가 바로 1974년 자신이 록펠러 재단에 응모한 프로젝트를 훔쳐간 것이라고 주장하며 맹비난했다. 그 당시에 이 프로젝트는 1만2000달러 제작비를 들여 영어·프랑스어로 3000부를 찍어 유럽 각 대학 도서관에 배포됐다. 1976년 클린턴도 옥스퍼드 대학교 유학중 이 아이디어를 접했을 것이라 백남준은 추측한 것이다.

1974년 당시 백남준의 프로젝트 초안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적혀 있다.

"만약 뉴욕과 LA를 국내용 인공위성으로 광케이블 연결할 수 있다면 그 경비는 달 착륙예산만큼 들지만 그렇게 되면 장거리 전화가 거의 공짜가 되고, 다중 TV에 의한 케이블 회의도 가능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항공료 엄청나게 절약되고 리무진을 타고 폼 잡는 문화가 달라질 것이다."

백남준 이미 'TV코뮨(1970)'으로부터 '글로벌 그루브(1973)' 그리고 '굿모닝 미스터 오웰(1984)' 등에 이르기까지 이런 개념을 일관되게 추구해왔다. 어쨌든 이 아이디어의 원조는 백남준임에 틀림없다. 1998년 김대중 대통령이 미국을 공식방문을 했을 때, 연회석상에 백남준이 하의를 벗은 건 이에 대한 항의라는 설이 분분하다.

불교의 자기무화를 작품화한 '살불살조'

백남준, '살불살조(殺佛殺組)' 1993. 베니스 비엔날레 출품작. 백남준 아트센터 전시할 때 찍은 사진으로 목이 잘린 부처의 몸뚱이가 전시장 바닥에 뒹굴고 있다.
 백남준, '살불살조(殺佛殺組)' 1993. 베니스 비엔날레 출품작. 백남준 아트센터 전시할 때 찍은 사진으로 목이 잘린 부처의 몸뚱이가 전시장 바닥에 뒹굴고 있다.
ⓒ 김형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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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 베니스 비엔날레 출품한 작품 중 또 빼놓을 수 없는 건 바로 '살불살조(殺佛殺祖)'다. 이 제목은 부처라는 관념에 집착하지 않을 때 깨달음이 온다는 뜻으로 우상파괴자인 백남준의 면모를 또한 잘 보여준다. 서양미술계 한복판인 베니스에서 동양의 불교사상의 진수를 설치미술로 유감없이 알린 셈이다.

백남준이 그동안 부처를 가지고 많은 작업을 했지만 이 작품은 야만적으로 보일 정도로 파격이라 사람들 등골을 오싹하게 한다. 조수를 시켜 큼지막한 부처상의 목을 베어 나무에 걸었고 몸체는 바닥에 그대로 뉘었다. 제목이 '살불살조'인 것은 선불교의 자기포기교리로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라는 뜻이 된다.

이를 더 확대 해석하면 백남준의 스승인 존 케이지를 만나면 존 케이지를 죽이고, 마르크스를 만나면 마르크스스를 죽이고, 백남준 자신을 만나면 자신도 죽이라는 메시지다.

백남준이 불교신자는 아니었지만, 다음 문장을 보면 그가 붓다가 말하는 무소유 등에 담긴 의미를 얼마나 심도 있게 깨닫고 있는지 알 수 있다.

"우리는 어떻게 75% 만족할 수 있는지 배워야 한다. 우리는 어떻게 50% 만족할 수 있는지 배워야 한다. 우리는 어떻게 30% 만족할 수 있는지 배워야 한다. 우리는 어떻게 09% 만족할 수 있는지 배워야 한다. 우리는 어떻게 00% 만족할 수 있는지 배워야 한다. 우리는 어떻게 - 1000% 만족할 수 있는지 배워야 한다."

과천에서 93년 '휘트니 비엔날레(서울)' 열려

1993년 과천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린 휘트니 비엔날레(서울)전 당시 포스터(1993.7.31-1993.9.8)
 1993년 과천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린 휘트니 비엔날레(서울)전 당시 포스터(1993.7.31-1993.9.8)
ⓒ 삶과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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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은 그의 생애 가장 분주한 한 해였다. 국외에서는 '베니스 비엔날레'가, 국내에서는 과천국립미술관에서 '휘트니 비엔날레(서울)'가 열렸다. 휘트니(서울)은 '휘트니 비엔날레(뉴욕)'을 직수입한 기획전이었다. 당시 한국에서는 꽃이나 새 그림이 미술의 전부로 알던 시절이었다. 미국의 첨단미술이 들어왔으니 사람들 어안이 벙벙했을 게 틀림없다.

1993년 당시 <중앙일보>를 보면 이 전시에 참석 D.로스 관장은 "60여 년의 역사를 지닌 휘트니비엔날레가 서울로 첫 해외나들이하게 되어 기쁘게 생각한다, 미국 현대미술과 한국관람객 간에 많은 대화가 나눠지길 희망한다"고 말했다.

휘트니 비엔날레(서울)의 선정 작가는 대부분 소수민족이나 여성작품이 많았다. 전시 작품도 인종차별이나 성차별 그리고 에이즈 등의 주제에 초점을 맞췄다. 당시 한국에서는 좀 버거운 주제였고, 경비가 너무 들어 못 가져온 작품도 있었으나 뉴욕전의 진면목을 보이는 데는 부족함이 없었다. '우물 안 개구리'식이었던 한국미술의 수준을 확 올리는 데 기여했다.

그리고 기억할 점은 백남준이 그렇게 애국주의를 배격했는데도 정말 애국자가 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오랜 외국생활에서 얻은 노하우와 세계미술계 인맥을 동원했을 뿐 아니라, 백남준은 휘트니 비엔날레(뉴욕)에서 받는 상금 25만 달러를 이 전시에 통째로 기부한다. 그러면서 소위 '보은론'을 내세워 한국 청소년들에게 자생력 육성을 강조했다.

'93 대전 엑스포'에서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관 결정

2011년 제54회 베니스 비엔날레가 열리는 이탈리아 베니스 자르디니 공원 내에 위치한 한국관 모습. 전시장 안에 이용백 작가의 작품이 보인다.
 2011년 제54회 베니스 비엔날레가 열리는 이탈리아 베니스 자르디니 공원 내에 위치한 한국관 모습. 전시장 안에 이용백 작가의 작품이 보인다.
ⓒ 이용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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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 8월 7일에서 11월 7일까지 93일간 대전 대덕연구단지에서는 국제박람회기구의 공인을 받아 '93년 대전 세계박람회'가 열렸다. 올림픽 이후 최고 국제행사로, 방문자만 1400만 명이었고 유럽의 정상 등 세계 유명인사도 대거 참가했다.

당시 이 행사의 아트 프로젝트를 맡은 이용우 전시감독은 '아킬레 보니토 올리바'를 초청해 다각적 로비를 시도했다. 올리바는 베니스 비엔날레 총감독이자 이탈리아 현대미술인 '트랜스 아방가르드'의 창시자다. 이 감독은 그에게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관을 만들자"고 제안했다. 그리고 '95 베니스 비엔날레'부터 한국관이 정식으로 생기게 됐다.

당시 베니스 비엔날레의 국가관 설치를 놓고 이탈리아 이민자가 가장 많이 사는 아르헨티나를 포함해 중국 등 6개국이 치열하게 경합했다. 그 국가관이 한국으로 결정되었다는 것은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거의 기적에 가깝다. 여기도 백남준의 입김이 작용했다. 백남준은 "한국미술을 50년 앞당긴 쾌거"라고 좋아했단다.

백남준도 이 엑스포에 초대를 받고 '인간화된 예술'과 '정보화된 기술'의 구상을 펼쳐보였다. 전시장 앞마당에 운송과 정보를 상징하는 자동차 30여 대를 늘어놓았고, 자동차에는 온갖 색채와 장식을 해 놓았다. 자동차 내부에는 한복을 입고 선글라스 쓴 마네킹 등 오브제도 넣었다고 당시 전시 감독이었던 이용우 미술 비평가는 전한다.

백남준의 또 하나의 걸작, '프랙탈 거북선'

백남준, '프랙탈 거북선(Fractal Turtle Ship)' 350×670×400cm 1993. 1993년 '대전세계박람회' 때 출품된 작품으로 '다다익선(1988)'과 비교가 될 정도 웅장한 작품이다
 백남준, '프랙탈 거북선(Fractal Turtle Ship)' 350×670×400cm 1993. 1993년 '대전세계박람회' 때 출품된 작품으로 '다다익선(1988)'과 비교가 될 정도 웅장한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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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으로 '93 대전세계박람회' 때 백남준이 출품한 작품 중 하나를 소개한다. 바로 '거북선'이다. 이순신 장군이 세계 최초로 철갑선을 발명한 상상력에 대한 백남준의 오마주다. 백남준은 이순신의 지략으로 위기에서 나라를 구한 일에 감동받았으리라.

이 작품은 348여 개 TV모니터와 전화기, 녹음기, 카메라, 라디오 등 오브제를 혼합한 것으로 그 조형성이 오묘하다. 물리학 용어인 '프랙탈'이 제목 앞에 붙은 건 '무질서 속에 규칙이 있다'는 뜻 때문인데 그런 분위기가 이 작품에서도 느껴진다.

그리고 옛 과학정신과 오늘의 미디어기술이 결합된 이 전자 거북선이 장대하게 보이는 건 전면에 노와 머리가 달린 거북이를, 후면에 한산도를 균형감 있고 잘 배치했기 때문이다. 또한 폐기물에 생명을 넣어 전혀 새로운 예술품을 만들어내는 백남준의 구상력과 이순신 장군이 전쟁에서 발휘한 상상력은 많이 닮아 보인다.


태그:#1993베니스비엔날레, #전자초고속도로, #황금사자상, #휘트니비엔날레(서울), #대전세계박람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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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중 현대미술을 대중과 다양하게 접촉시키려는 매치메이커. 현대미술과 관련된 전시나 뉴스 취재. 최근에는 백남준 작품세계를 주로 다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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