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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번국도에서 본 음지마을 전경이다.
▲ 음지마을 5번국도에서 본 음지마을 전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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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서쪽 언덕에서 본 음지마을 전경이다.
▲ 음지마을 마을 서쪽 언덕에서 본 음지마을 전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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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지마을과 주막터 (용부원1리)

방이장님과 작별인사를 하고 본격적인 죽령옛길 답사에 나섰다. 죽령옛길은 당동리를 지나 단양IC 나들목 동쪽 고갯길을 따라 올라간다.

거대한 소백산은 위엄을 내 뿜고 있었고, 준령은 어느덧 검붉은 가을 옷으로 갈아입고 있었다. 장엄한 소백산의 허리를 뚫고 질주하는 거대한 회색빛 구조물도 있었다. '중앙고속도로'였다. 자연을 파괴하면서 천년 옛길 위를 함부로 지나는 인간의 오만한 건축 작품이었다.

죽령고갯길은 이 거대한 중앙고속도로 교각 아래로 빠져나가면서부터 시작된다. 이 길은 죽령천을 끼고 좌측 소로를 따라 올라간다. 이 일대의 마을들을 용부원리라 부른다. 용부원리는 죽령의 서쪽사면 전체에 산재되어 있는 1·2·3·4리의 4개 마을이다.

'용부원리는 우리나라의 교통요지였고 군사 요충지였으며 격전지였다. 또 한 때는 도둑때가 들끓었던 마을들이다. 이러한 관계로 전통가문을 찾기 어렵고, 상세한 마을역사가 없다.

그러나 이 마을들은 소백산 자락에 위치하여 빼어난 관광자원과 죽령고개에 얽힌 전설 등 아름다운 민속 문화가 전해 내려오는 곳이기에 용부원리는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마을로 선정됐다.

'사단법인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마을 연합회'는 2010년8월 '죽령옛고개마을'(용부원,1·2·3·4리)을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마을 제 6호'로 선정했다. 

그 이유는 죽령옛고개마을이 '다자구할머니 전설'과 이를 바탕으로 한 산신제가 전승되고 있고, 아이들이 즐겨 불렀던 전래 동요 '실구대 소리'와 '찐득이 타령'이 원형 그대로 잘 보존되고 있기 때문이다. 또 목 없는 장육불상과 영조대왕 옹주 태지비, 보국사 절터, 삼국시대 산성, 한말 의병전투 격전지, 등 과거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역사와 문화 자원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거기에다 죽령계곡을 따라 이어진 뛰어난 산수 자원과 사과를 비롯하여 산나물과 약초 등 산촌 마을의 특성을 가장 잘 보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오늘 죽령고갯길을 따라 이어진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마을 '죽령옛고개마을'의 자연부락들을 하나하나 답사할 것이다.

이 교각 및을 빠져나가면 죽령옛길이 시작된다.
▲ 중앙고속도로 교각 이 교각 및을 빠져나가면 죽령옛길이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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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고속도로 교각 및을 빠져나오면 음지마을로 들어가는길이 바로 나 있다.
▲ 음지마을 가는길 중앙고속도로 교각 및을 빠져나오면 음지마을로 들어가는길이 바로 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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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중앙고속도로 교각 아래로 빠져 나가면 새로 만든 돌탑과 정자가 있는 소공원이 나온다. 이 소공원을 지나 또 한참 올라가다보면 '美德'이라고 쓴 큰 비석과 작은 다리 하나가 나온다. 이 다리를 건너면 '음지마을'(용부원1리)이다.

다리 옆 안내문에는 "음지마을은 뒷산이 높은 탓에 일조량이 짧아서 빨래를 3일간 말린 후 다시 화롯불에 하루를 더 말려야 한다는 뜻에서 유래되었다"는 내용이 수록되어 있었다.
마을 입구에 '미덕'이라고 쓴 비석과 다리가 나온다.
▲ 음지마을 입구 마을 입구에 '미덕'이라고 쓴 비석과 다리가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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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지마을로 들어갔다. 마을 한 가운데에는 '단구제지'라는 한지공장이 있었다. 군사 요충지 마을에도 전통문화는 살아 있었다.

인류 문명은 문자와 종이로 인해 발전되어오지 않았던가. 기원전 3000년 무렵의 이집트 파라오나 1300여 년 전의 왕오천축국전이 남아 있는 것도, 다 '종이'라는 문명 덕분이 아니던가. 그리고 옛날부터 중국 사람들은 고려한지를 최고의 한지로 꼽지 않았던가. 그 한지 제작 기술이 이곳에서도 전승되어 오고 있는 것이다.

이 한지공장의 주인 황동훈씨(1940년생)를 만났다. 그는 충주댐 수몰지에서 1983년 이곳으로 이주했으며, 2대에 걸쳐 수작업으로 전통한지를 생산해 왔고, 지난 2007년에는 충북도 무형문화재 17호로 지정받았다고 한다.

황씨는 "우리나라에서 일본에 한지를 수출하는 업체는 우리밖에 없어요. 46년째 수출을 하고 있는데 생산량의 95%를 수출합니다"라고 한다.  이곳은 전통산업이 건재한 보기 드문 사례의 현장이었다.

또 그는 이 마을 한지 역사에 대해 이렇게 증언했다.

"내가 처음 이곳에 왔을 때 한지공장이 5곳이나 있었어요. 이 마을이 예로부터 '한지마을'이었어요...."

그렇다. 이곳 죽령의 한지산업은 수 천 년 문명의 통로에서 그 전통의 맥을 이어온 산업이었다. 죽령대로(竹嶺大路 / 새재, 추풍령과 함께 嶺南大路의 한곳)의 길목이기에 발전할 수 있었고, 그러자니 한지 원료인 닥나무의 재배도 대대적으로 이루어졌을 것이다. 이곳의 한지는 죽령고갯길을 통해 전국으로 퍼져나갔을 것이다. 때문에 이곳의 한지산업도 수 천 년 역사의 죽령고갯길과 함께 잘 보존하고 가꾸어 가야할 매우 중요한 문화산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을 입구에서 본 전경이다. 동수목과 단구제지 공장이 보인다.
▲ 음지마을 마을 입구에서 본 전경이다. 동수목과 단구제지 공장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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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동훈 사장이 한지를 정리하고 있다.
▲ 단구제지 황동훈 사장 황동훈 사장이 한지를 정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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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뒤쪽에는 깎여진 암벽의 규회석 광산이 허연 생채기를 드러내고 있었다. 천년 옛길의 마을에 또 하나의 흉한 자연 파괴의 현장이다.

이 마을 주민 김무남옹은 이 광산에서 채굴된 규회석으로 비료를 만들었고, 얼마 전까지만 해도 20여 명의 일용직원이 연간 2만톤의 석회질비료를 생산해 왔는데 지금은 문을 닫았다고 한다.

나는 '천년 옛길의 마을에 보기에도 흉한 규회석광산보다는 유휴인력을 이용한 한지전통공예 산업을 육성시키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을까' 생각하며 음지마을을 나섰다. 

옛길은 '음지마을'을 지나 죽령천의 좌측 소로를 끼고 이어진다. 5백여 미터를 더 올라가다보면 토담집이 나온다. 누가 옛 주막집을 재현하려했던 모양인데 좀 허술했다. 그렇다. 이곳이 바로 옛 주막집터였다.

이 토담집 바로 앞에는 수백 년 된 느티나무 한 그루가 주막집터의 역사를 지켜오고 있었다. 대개의 옛 주막들이 경관 좋은 길목에 위치하듯이, 이곳의 옛 주막집터도 주변의 경관을 한 눈에 조망할 수 있는 곳이다. 언덕 아래에는 죽령천의 계곡물이 깊게 흐르고 건너편에는 음지마을 정경이 정겹게 펼쳐져 있다.
단풍이 물들기 시작한 느티나무 옆의 주택이 주막터다. 바로 앞에는 음지마을 주민  김무남옹 부부가 마늘을 심고 있다.
▲ 음지마을 주막터 단풍이 물들기 시작한 느티나무 옆의 주택이 주막터다. 바로 앞에는 음지마을 주민 김무남옹 부부가 마늘을 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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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 내려다보이는 음지마을은 흔한 시골동네의 풍경 그대로다. 뒷산 한 쪽에는 하얗게 깎여진 암벽의 규회석 광산이 자리 잡고 있다. 그러나 불과 수십 년 전까지만 해도 흉한 생채기를 드러낸 광산의 모습은 없었으리라.

초가와 기와집 사이로 밥 짓는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술 빚는 향기가 코끝으로 스며오는 정겨운 모습의 동네였을 것이다. 그리고 이곳 주막터에도 그 옛날엔 숱한 나그네의 발길이 끊어지지 않았던 정겨운 곳이었으리라.

불과 70여 년 전(1942,4,1)의 일이다. 중앙선 철도의 죽령터널이 개통되면서 인적이 끊기기 시작했고, 이로 인해 죽령옛길은 더 이상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이곳의 주막과 함께 점점 쇠락의 길을 갔을 것이다. 듬성듬성 찾아오는 손님을 반갑게 맞아주던 마지막 주모가 세상을 떠나면서 길손들의 애환을 달래주던 옛 주막은 점점 그 흙벽이 스러져 내렸을 것이다.

잠시 나는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갔다. 오래 우리나라 한 시대를 풍미했던 현인이자 당대 최고의 지식인이었던 의상과 안향, 퇴계와 같은 선인들을 이곳 주막에서 만났다. 한 시대를 밝힐 그 분들의 귀한 책 보따리도 본다. 이분들은 하나같이 죽령을 넘어 소백산의 남쪽 아랫마을로 가기 위해 무거운 짐 보따리를 잠시 내려놓고 있다.

나는 또 어물과 소금과 비단과 인삼과 약초 등의 생필품들과 특산물들을 짊어진 수많은 보부상, 관원과, 온갖 사연을 간직한 길손들의 끊임없는 행렬도 본다. 이들은 이곳 주막에서 왕대포 한 사발로 목을 축이고 국밥 한 그릇으로 허기를 달래고는 여정을 이어갔다. 이들은 힘든 죽령고개를 넘어와서, 혹은 넘어가기 위해 이곳에서 한 숨을 돌리고 있었다.

애환이 서린 용부원리 주막, 그 과거로의 여행을 끝내고, 옛길답사의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러나 몇 발자국 못가 죽령옛길은 끊겼다. 중앙고속도로 개설로 옛길의 흔적이 일정구간 끊긴 것이다. 나는 우리의 소중한 문화유산인 천년 옛길의 흔적이 없어진 것에 대한 씁쓸함과 안타까움으로 한 동안 자리를 뜰 수가 없었다.


태그:#죽령 , #음지마을, #용부원리 주막터, #단구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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