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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0일 오전 영화 <국제시장>을 봤다. 지난해 12월 초,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란 영화를 보고 나오다 포스터를 보며 "다음에는 저 영화 보러 오자" 약속하고 한 달 만에 본 것이다.

"영화를 보다가 갑자기 영화를 만든 사람들한테 고맙다는 말을 꼭 하고 싶어지더라!"

이렇게 말하며 놓치지 말고 꼭 보라는 주변 사람들은 많았으나 바빠서 미루고 있었다. 그런데 아무리 바빠도 꼭 봐야겠단 생각을 하게 한 것은 <어이없게도 국수>라는 책 때문이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책 속 '구포 국수' 때문이다.

책 <어이없게도 국수>는 밀가루 음식, 그중 특히 국수를 매우 좋아하는 저자가 '국수로 추억하고, 국수로 삶과, 세상과, 사람을 이야기한' 책이다. 저자에 따르면 구포국수는 부산으로 몰려든 피난민들과 함께 성장한 음식이다.

영화에 국수를 먹는 장면도 나올까? 사소한 호기심도 일었다. 그와 함께 네댓 살 쯤으로 보이는 여자 아이가 구석진 곳에 쪼그리고 국수를 먹는 모습,  업은 아기에게 국수를 먹이는 엄마의 모습 등을 담은 사진작가 최민식의 사진 몇 장이 겹쳐 떠올랐다. 아쉽게도 영화 속에선 구포 국수를 먹는 장면을 발견하진 못했다.

국수의 전설, 구포국수는 소면의 지존이자 적어도 우리 역사에서 최초로 소면의 산업화와 대중화를 이끈 주역이다. '국수천국, 냉면지옥'. 부산에 대한 면식인들 사이의 우스갯소리다. 한마디로 맛있는 국수집은 많고, 냉면 잘하는 집은 별로 없다는 이야기다...

포국수의 중심은 어디까지나 구포에서 생산된, 특유의 쫄깃함과 짭조름한 맛이 일품인 면발에 있다. 구포국수가 국수의 전설로 남은 유래를 살피려면 바다와 강을 낀 독특한 자연 환경, 그리고 예로부터 일본과 문화적 교류가 활발했고, 6·25 때 피난민들의 마지막 보루가 되었던 이곳의 역사적 배경을 이해해야 한다. -<어이없게도 국수> 중에서.

부산은 조선 시대부터 왜관을 통해 일본 문화의 유입이 가장 빨랐던 곳이다. 일본의 대중적 국수였던 소면이 언제부터 우리나라에 들어왔는지 정확하게 알려지지 않았는데, 분명한 것은 부산에선 일제강점기 초 이미 일본의 소면을 먹는 문화가 널리 퍼져있었다는 것이다.

일제의 경부선 개통 그 첫째 목적은 원활한 물자 수탈이었다. 경부선의 종착역이 부산의 한 지역인 구포에 들어서면서 구포는 물자 집산지가 된다. 당시 최대 밀 생산지인 황해도에서 구포까지 밀이 운반되는 루트도 생겼다. 이어 제분 공장과 국수 공장이 들어서게 된다. 지금과 같은 대중적인 마른 국수는 이처럼 부산의 구포에서 시작, 전란을 거쳐 전국으로 확산된 것이다.

불어 터진 국수도 맛있게 먹을 수 있었던 그 시절

재밌는 것은 1950년대에는 구포에서 국수를 받아다 조리한 후 부산 시내로 팔러 다니는 행상도 많았다는 것이다. 익히면 불고 들러붙는 국수를 어떻게 이거나 지고 다니며 팔 수 있었을까? 이해하기 쉽지 않은데, 저자에 따르면 과거 냉면이 가장 대표적인 배달 음식이었다나. 그렇다면 가능했을 것 같다.

아니, 구태여 냉면까지 끌어들이지 않아도, 굶는 날이 더 많았을 보릿고개 시절 옛날의 식량 사정을 헤아려 짐작해 보면 불어터진 국수일지라도 매우 고마운 음식이었을 것. 생각해보니 얼마든지 이해가 된다.

일단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차이는 고명이다. 대개 호박과 달걀지단, 김 가루 정도가 전부인 서울 지역의 잔치국수와 달리 부산지역의 물 국수는 이 모든 고명에 더해 데친 부추가 잔뜩 들어간다. 거기에 간 깨와 채 썬 단무지, 가게에 따라서는 채썬 어묵까지 올리는 경우도 있다, 간장과 고춧가루 듬뿍 든 '다대기'는 기본이다. 묵직하고 진한 감칠맛의 멸치육수는 남해의 강렬한 태양과 짭쪼름한 시원한 바다를 그대로 담아 우려낸 듯 호쾌하다. -<어이없게도 국수>에서.

<어이없게도 국수> 책표지.
 <어이없게도 국수> 책표지.
ⓒ 비아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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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독려한다. "통일이 되면 평양에 가서 진짜배기 평양냉면을 맛보겠노라며 굳은 다짐을 하는 마니아들이 많은데, 구포국수는 현재 대한민국 통치령하에 있는 부산에서, 전국 어디서든 일일 생활권인 부산에서 만날 수 있는 살아있는 국수의 전설이다. 전국의 면식 수행자들에게 고한다. 오라. 여기 소면의 전설, 구포국수가 살아있다"고.

저자는 구포국수를 '거의 최초의 패스트푸드', '소면의 전설'이라 칭한다. 책에는 6·25 당시 부산으로 몰려든 피난민들과 함께 급속도로 성장한 구포국수가 그 후 어떤 변화를 겪었으며, 현재는 어떤 명맥을 이어왔는지 자세히 소개된다.

이야기는 모두 29가지. 이 외에도 고향에서 주로 먹어 면식 수행자인 저자보다 더 찐한 추억이 얽힌 팥칼국수, 처음 들어봤지만 포항 동생 집에 가면 반드시 먹어보고 싶은 모리국수, 요즘처럼 추울 때 엄마가 자주 해주셨던 김치 수제비를 떠올리게 한 수제비, 그 많은 사람에 끼어 사 먹을 자신이 없어 번번이 망설임만 되풀이했던 가락국수 등, 참 많은 국수 이야기들을 들려준다.

그냥 국수 이야기만 들려주는 것이 아니라, 지난날 함께 먹었던 사람들 이야기와 힘들고 지칠 때 국수를 통해 위로받은 이야기, 국수를 통해 해결된 누군가와의 작은 갈등 등을 조근조근 들려준다. 저자의 '누군가와의 무엇인가'가 있어 더욱 특별한 국수 이야기를 읽으며 문득 드는 생각은 나와 특별한 음식이나 물건 등 어떤 존재를 이처럼 다시 보고, 다시 추억하며 자신과 주변을 돌아보는 것도 참 좋겠다는 것이다.

지은이 강중희는... 냉면의 고향 평안도 출신 조모와 그 유전자를 이어받은 부친 덕분에 '혈관 속에 냉면 육수가 흐르는' 뼛속까지 진정한 모태 면식수행자이다. 국수가 있는 곳이라면 세상 어느 곳이라도 수행의 장소로 삼으며 하루 한 끼는 반드시 국수를 먹는 투철한 면식 수행의 길을 걸어온 끝에, 고단한 삶의 위안으로 '좋은 사람과 국수 먹기'의 임상적, 심리적 효과를 홀연히 깨닫고 국수로 책 쓰기에 도전했다.-<어이없게도 국수> '저자 프로필' 중에서.

참, 저자 프로필을 시작으로 책에서 '면식인' 혹은 '면식수행자'라는 명칭이 자주 나오는데, '하루에 한 끼는 반드시 밀가루 음식, 그 중에서 특히 국수를 먹을 정도로 면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자칭 혹은 호칭한다는 용어란다. 어쨌건 이처럼 국수를 좋아하는 사람이 풀어내는 국수에 얽힌 이야기들이니 재미있는 이야기들이 좀 많을까? 저자처럼 국수가, 밀가루 음식이 좋은 사람들은 큰 기대를 가지고 읽어도 절대 실망하지 않으리라. 자신 있게 권한다.

덧붙이는 글 | <어이없게도 국수>(강종희) | 비아북 | 2014-12-15 1만 3000원



어이없게도 국수 - 인생의 중심이 흔들릴 때 나를 지켜준 이

강종희 지음, 비아북(2014)


태그:#국수, #국제시장, #한국전쟁, #구포국수, #면식인(면식수행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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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제게 닿아있는 '끈' 덕분에 건강하고 행복할 수 있었습니다. '책동네' 기사를 주로 쓰고 있습니다. 여러 분야의 책을 읽지만, '동·식물 및 자연, 역사' 관련 책들은 특히 더 좋아합니다. 책과 함께 할 수 있는 오늘,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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