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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국제시장>의 한 장면. 극 중에서 다툼을 벌이던 영자(김윤진 분)와 덕수(황정민 분)는 애국가가 울리자 잠시 멈추고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한다.
 영화 <국제시장>의 한 장면. 극 중에서 다툼을 벌이던 영자(김윤진 분)와 덕수(황정민 분)는 애국가가 울리자 잠시 멈추고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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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국제시장>을 두고 말이 많다. 지난 17일 개봉한 이 영화는 <해운대>로 이름을 알린 윤제균 감독이 배우 황정민과 호흡을 맞춰 개봉 전부터 기대를 모았다. 여기에 굵직한 한국 근현대사 사건들을 영화 소재로 삼았다는 점에서 한국판 <포레스트 검프>로 묘사되기도 했다.

개봉 10일 차에 300만 관객을 동원하며 흥행 조짐을 보이자 영화를 둘러싼 다양한 말들이 쏟아졌다. 영화평론가 허지웅의 말이 그 시작이었다. 그는 지난 25일 <한겨레>에 실린 좌담에서 "<국제시장>을 보면 아예 대놓고 '이 고생을 우리 후손이 아니고 우리가 해서 다행이다'라는 식이거든요. 정말 토가 나온다는 거예요. 정신 승리하는 사회라는 게"라고 말했다.

영화평론가 듀나도 <국제시장>에 대해 "이 영화의 문제점은 신파가 아니에요. 역사를 다루면서 역사에 대한 아무런 생각이 없는 거죠"라고 평했다. 역사적 사건을 시대순으로 나열할 뿐, 뚜렷한 해석이나 관점을 제시하지 않는다 점을 지적한 것이다.

이에 보수 언론이 발끈했다. <TV조선>은 허지웅을 '좌파 평론가'로 묘사하며 그의 평을 '토 나오는 영화'라는 말로 압축해 부각했다. 허지웅은 영화를 대하는 태도를 비판했으나, 보수 언론은 그가 <국제시장> 영화 자체와 보수 진영을 공격한 것으로 왜곡했다.

대통령도 <국제시장>을 언급했다. 박근혜 대통령은 지난 29일 청와대에서 "최근 돌풍을 일으키는 영화에도 보니까 부부 싸움을 하다가도 애국가가 퍼지니까 경례를 하더라"며 "그렇게 해야 나라라는 소중한 공동체가 건전하게 어떤 역경 속에서도 발전해 나갈 수 있는 것 아니겠느냐"고 말했다. (관련기사 : 박 대통령, '국제시장' 언급하며 "괴로우나 즐거우나...")

<국제시장> 보니 떠오르는 <변호인>의 그 장면

보수 진영의 <국제시장> 띄우기에 더해진 박 대통령의 '애국가 발언'은 1년여 앞서 개봉한 영화 <변호인>의 한 장면을 떠올리게 한다. 극 중에서 경감 차동영(곽도원 분)이 주인공인 송우석 변호사(송강호 분)를 구타하다가 멈추는 순간이다. "니들이 애국이 뭔지 알아?"라며 송 변호사를 향해 발길질하던 차동영은, 어디선가 들려오는 애국가에 동작을 멈추고 왼쪽 가슴에 오른손을 올린다. 그리고 태연한 목소리로 "생각해봐, 당신이 할 수 있는 애국이 뭔지"라고 덧붙인다.

이 글에서 두 영화를 전체적으로 비교할 생각은 없다. 다만 두 영화의 등장인물이 행하는 '국기에 대한 경례'를 되짚을 필요는 있다. 비슷한 장면이지만, 두 영화에서 각각 다르게 다뤄졌기 때문이다.

TV조선 <정치옥타곤> 방송 화면. 허지웅을 '좌파평론가'로 묘사하면서, 영화 <국제시장>고 관련된 그의 발언을 '토 나오는 영화'로 부각한다.
 TV조선 <정치옥타곤> 방송 화면. 허지웅을 '좌파평론가'로 묘사하면서, 영화 <국제시장>고 관련된 그의 발언을 '토 나오는 영화'로 부각한다.
ⓒ TV조선 화면캡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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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호인>의 애국가 장면으로 돌아가 보자. 차동영은 자신의 행위를 애국을 위한 하나의 방식으로 미화하며 정당화한다. 무고한 사람을 공안 사범으로 몰아 기소하고, 피해자를 향한 자신의 물리적 폭력도 애국심의 발현으로 포장한다. 변호인에게 당당하게 주먹을 휘두르는 그는, 그것이 진정 나라를 위한 일이라는 듯이 "애국이 뭔지 아느냐"고 뻔뻔하게 묻는다.

동영이 말하는 애국은 '적으로 간주되는 인물을 무참히 짓밟는 것'이고, 고문을 포함한 불법 수단도 여기에 포함된다. 그에게 '국기에 대한 경례'는 자신의 자랑스러운 임무를 되새기는 시간이다. 독재 체제의 정당화를 위한 권위주의 확립, 혹은 비판 세력을 탄압하는 목적으로 자행된 폭력도 애국이 되는 끔찍한 시절을 영화 <변호인>은 잘 보여준다.

영화에서 '국기에 대한 경례'가 풍자하는 것

반면 <국제시장>의 애국가 장면은 어떠한가. 다툼을 벌이던 영자(김윤진 분)와 덕수(황정민 분)는 애국가가 울리자 언쟁을 멈추고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한다. 국기하강식이 진행되는 공원에서, 앉아있던 사람들은 하나 둘 태극기를 향해 일어선다. 동시에 사람들은 애국가가 흘러나오는데도 자리에 앉아있는 영자에게 따가운 시선을 보낸다. 결국 이런 분위기를 이기지 못한 그녀가 울음을 그치지 않은 채 이에 동참하는 게 영화 속 상황이다.

이 모습은 <변호인> 차동영의 행위와 비슷하지만, 의미는 다르다. 차동영은 '국가로부터 승인 받은 폭력'을 실행하는 사람인 반면, 영자는 그저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평범한 소시민이다. 애국가에 반응하는 자세는 닮았지만, 한쪽은 국가에 소속된 국민으로서 '두려움에 의한 복종심'을 느낀다. 권위를 휘두르느냐, 아니면 휘둘리느냐가 주된 차이점인 것이다.

오늘날에는 애국가가 들리더라도 걸음을 멈추고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는 사람을 보기 힘들다. 민주주의 체제는 '국가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다'는 생각에 뿌리를 두고 있다.국가를 상징하는 국기에 '충성을 다짐'하는 태도는 어색하다.

사실 박근혜 대통령이 언급한 <국제시장> 장면은, 관객을 웃기는 풍자다. 사랑하는 사람과 심각한 대화를 하더라도, 애국가가 나오면 일순간 멈춰야 할 정도로 국가의 권위가 폭압적이던 시절의 모습. 2014년의 관객은 이 장면을 보고 폭소한다.

반면 박 대통령은 이 장면을 거론하며 '소중한 공동체'와 '역경 속에서 발전'을 강조했다. 보수 진영의 향수를 자극하는 영화의 흥행에 힘입어, 국민에게 애국심을 고취하는 기회로 삼을 만하다고 생각했는지 모른다. 대통령은 '국기에 대한 경례'에서 건전함을 읽은 듯하지만, 많은 관객은 그렇게 느끼지 않는 걸로 보인다.

한국 대중은 2014년에 발생한 여러 사건에서 국가의 다양한 모습을 보았다. 세월호 참사에서 국가의 무능함을, 문창극 등 총리 후보자의 연이은 사퇴에서는 참을 수 없는 인사의 가벼움을 목격했다. 청와대 비선 논란에서는 소통과 리더십의 부재를 느낄 수밖에 없다. 고교생 폭발물 투척 사건의 심각성을 외면한 채 종북 논란을 부추기는 권력자의 모습은 '국민 대통합'의 슬로건과 동떨어져 심히 걱정스럽다. 나라가 이런 상황의 연속인데, 과연 애국심을 어디서 찾아야 할지 의문이다.

대통령의 '애국가' 발언, 불편한 이유

영화 <변호인>의 한 장면. 극 중 차동영(곽도원 분) 경감은 주인공인 송우석 변호사(송강호 분)를 구타하다가 애국가가 들려오자 멈추고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한다.
 영화 <변호인>의 한 장면. 극 중 차동영(곽도원 분) 경감은 주인공인 송우석 변호사(송강호 분)를 구타하다가 애국가가 들려오자 멈추고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한다.
ⓒ 위더스 필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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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핵심 국정과제 점검회의에서 "즐거우나 괴로우나 나라 사랑해야 한다"고 말했다는 박근혜 대통령. 민경욱 청와대 대변인에 따르면, 박 대통령은 직접 영화를 보지 않고 언론 지면에 나온 것을 인용한 것이라고 한다. 박 대통령이 영화를 직접 보았다면, 관객의 폭소가 터진 그 장면을 두고 민망하게 '나라 사랑'을 거론했을까? 

최근 헌법재판소의 통합진보당 정당해산 결정으로 지지율 반등에 성공한 박 대통령이 애국심을 언급한 것은 지지율 상승세 굳히기로 읽힌다. <국제시장>이 작품성이 아닌 보수 진영의 이념 방어 수단으로 소비되는 현실도 씁쓸하다.

<미디어스>에 기고한 이택광 경희대 교수의 말대로 <국제시장>은 민주화운동을 직접 묘사한 <변호인>과 대척점에 있지 않다. 그보다는 '같은 세계를 바라보는 다른 시선'에 더 가깝다.

<국제시장>은 조금 천진한 시선으로 근현대를 겪은 소시민의 삶을 조명했다. 이를 바탕으로 우리는 아버지 세대의 아픔을 이해할 수도 있다. 하지만 누군가 보수 전체를 합리화하려는 수단으로 영화를 활용한다면 고개를 끄덕이기 힘들다.

정부의 무능으로 야기된 신뢰 붕괴를 걷어내지 못한다면, 대통령이 강조한 애국심은 공허한 메아리로 그칠 것이다. 더불어 보수 진영도 자신들의 '공'을 내세우는 것만큼 과오를 인정하고 반성해야 한다.


태그:#국제시장, #애국가, #변호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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