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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봉준 작. 이소선 여사 추모 그림
▲ 위대한 어머니 김봉준 작. 이소선 여사 추모 그림
ⓒ 김봉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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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일방직 여성노동자들의 나체시위

이 무렵 1970년대의 저 처절하고 끈질긴 여성노동자들의 투쟁의 대명사인 인천의 동일방직노동조합에 대한 탄압 서막이 오르고 있었다.

동일방직노동조합은 1972년 5월, 회사 측의 지원을 받는 남자후보들을 큰 표 차로 물리치고 주길자가 지부장으로 선출되면서 민주적인 노동조합으로 발전했다. 동일방직의 노조는 1972년 5월 말 현재 1383명의 조합원 중 1214명이 여성이었다. 이처럼 조합원의 대다수가 여성인 노조에서 여성지부장이 출현할 가능성은 당연했다. 그러나 그 가능성을 현실화하는 데는 많은 어려움이 따를 수밖에 없었던 것 또한 당시의 상황이었다.

우리나라에서 최초의 여성지부장인 주길자 지부장에 이어 1975년 이영숙 집행부가 들어섰다. 이영숙 지부장을 중심으로 노동조합 활동이 활발히 전개되자 회사 측에서는 노동조합을 노골적으로 탄압하기 시작했다.

회사 측은 1976년 2월 대의원선거를 앞두고 조합원들에 대한 압력을 가중시켰다. 그러나 회사 측에서 내세운 대의원 숫자는 현 집행부를 붕괴 시키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에 회사 측은 자신들이 내세운 지부장 후보 고두영을 당선시키기 위해 대의원들을 온갖 회유, 징계, 협박, 공갈 등으로 탄압했다.

노동조합에서 정상적으로 대의원대회를 개최하려고 시도하면 대의원들을 감금, 납치하여 대회를 무산시키는 수법으로 방해했다.

그러나 이 정도는 시작에 불과했다. 정말 기가 막히는 일이 벌어졌다. 경찰이 이영숙 지부장을 불법으로 연행한 상태에서 이미 노조에서 징계당한 고두영은 관의 비호 아래 7월 23일 기숙사 강당 문을 걸어 잠그고 자파 대의원 24명만으로 대의원대회를 열어 이영숙 지부장을 불신임하고 자신을 지부장으로 선출케 했다. 이는 정족수도 미달될 뿐만 아니라 대의원대회 소집 절차에도 위배되는 불법적인 대회였다.

이에 조합원들은 회사 측의 사주에 의한 대의원대회가 불법무효임을 폭로하기 위해 회사  측이 사전에 기숙사 문을 못질 해놓은 것을 박차고 들어가 농성에 돌입했다. 처음 2백여 조합원이 기숙사 창문에서 뛰어내려 시작한 농성이 오후 2시 출근자들이 합세할 움직임을 보이자 경찰은 연행해간 이영숙 지부장을 일단 석방했다. 그러나 2시 출근자들의 움직임이 어느 정도 진정되었다고 판단한 경찰은 다시 지부장과 이총각 총무부장을 연행해갔다. 조합원들의 분노는 극에 달했다. 밤 10시 출퇴근 자들이 농성에 가담하여 철야농성에 돌입했다.

이튿날인 7월 24일 농성조합원 수는 8백여 명으로 불어났고 농성장 밖에서 3백여 명이 모여 들어 호응하였다. 전면적인 파업농성을 하면서 노동자들은 '이영숙 지부장을 석방하라' '회사는 자율적인 노조활동에 개입하지 말라' '7·23대회는 무효다' '엉터리 고두영 물러가라' 등의 구호를 외쳤다.

다음날까지 계속된 농성으로 노동자들은 한낮의 더위와 배고픔에 지쳐 있었다. 이때 갑자기 경찰, 회사 경비원 그리고 남자사원들이 합세하여 머리채를 끌고 발길질을 하면서 조합원들을 경찰차에 집어넣기 시작했다.

"벗고 있는 여자 몸엔 경찰 아니라 그 누구도 남자들은 손을 못 댄대. 우리 모두 옷을 홀랑 벗어버리자."

노동자들이 흩어지면 안 된다는 생각에 누군가가 다급하게 외쳤다. 그 말에 탈진해 있던 여성노동자들이 옷을 벗어던졌다. 이른바 나체시위였다. 이 얼마나 처절한 투쟁인가! 젊은 처녀들이 자신의 조직과 권익을 지키기 위해 수치심도 내버리고 짐승 같은 남자들 앞에서 옷을 벗은 채 저항을 해야 하는 참혹한 현실이었다. 경찰과 회사 사원들은 나체 상태에서의 저항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노동자들을 개 패듯 해서 72명을 경찰서로 연행해가고 3명의 노동자는 혼수상태에서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다.

이같은 동일방직 노동자들의 처절한 투쟁소식을 접하면서 이소선은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억누를 길이 없었다. 그동안 동일방직 문제를 둘러싸고 청계노조 노동교실에서도 관계자들의 대책회의가 여러 번 있어서 사건 내용을 알고 있었지만, 이처럼 잔인무도할 수 있는가!

이소선은 혼수 상태로 병원에 입원한 조합원들이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병원에 누워있는 이돈희, 이순옥은 초점을 잃은 눈을 멀건히 뜬 채 온몸에 경련을 일으키면서 입가에는 거품만 내뿜는 것이다. 이런 모습을 본 이소선은 기가 차서 뭐라고 말이 안 나왔다. 수건에다 물을 적셔서 입가에 묻은 거품을 닦아주었다. 옆에 회사 사람이나 노동청 직원이 있으면 당장에 멱살을 잡고 어떻게 할 거냐고 따지고 싶었다.

동일방직 노동조합에 대한 탄압은 이후에도 계속돼 정부, 회사, 섬유노조가 야합해서 노동조합을 와해시키고자 했다. 1978년 2월에는 회사 측의 협박을 받으면서도 동일방직노조가 대의원 선출 투표를 감행하려하자 회사 측 남성노동자들이 똥을 날라다가 여성조합원에게 퍼부었던 것이다.

이때 경찰들은 구경만 하였고, 도움을 요청하는 여성노조원들에게는 냉소와 욕설을 퍼부었다. 이 사건이 소위 '동일방직 똥물세례 사건'이다. 회사 측은 노동자 126명을 해고하였고 해고자 명단을 각 사업장에 돌려 재취업을 봉쇄하였다.

회사측 구사대가 여성 노동자들한테 똥물을 뿌린 사진
▲ 동일방직 똥물 사건 회사측 구사대가 여성 노동자들한테 똥물을 뿌린 사진
ⓒ 동일방직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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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과정에서 재야민주세력과 민주노조가 함께 투쟁에 동참했다. 특히 1976년 당시 청계피복노조는 자체 투쟁에서 이기는 싸움을 몇 번 겪고 난 뒤라 노동조합의 힘이 여느 때보다 강했다. 동일방직노조의 투쟁을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동일방직 사건을 주제로 하는 기도회, 집회 등에 조합원들이 집단적으로 참여함으로써 노동자는 지역과 업종을 초월해서 하나라는 의식이 성장하기 시작했다.

풍천화섬 사건

당시만 해도 기업별노조라는 틀에 갇히기를 바라는 자본가들의 논리에 노조 지도자들도 순응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런 잘못된 기업별노조 의식을 의도적으로 깨뜨려야만 했다. 

일차적으로 동일한 업종의 노동자들이 공통된 내용을 가지고 공동으로 투쟁하는 것부터 출발해야 했다. 그리하여 청계피복노조는 같은 봉제업체의 노조결성 문제를 비롯 근로조건 개선 문제, 임금인상 문제 등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기 시작했다.

성수동에 소재한 남진산업의 임금인상투쟁, 월곡동에 소재한 극동피혁 파업농성과 노조결성투쟁, 그리고 동대문 종합시장의 유진산업 집단해고 사건에서 해고수당 3개월분과 퇴직금 지급 등을 따낸 투쟁, 신당동 소재 신일산업사의 폐업철회 투쟁이 대표적이다.

크고 작은 문제에 청계노조는 적극적으로 관여해서 함께 싸웠다. 그 중 가장 대표적인 투쟁이 풍천화섬 노동자들의 노조결성을 위한 투쟁이다.

풍천화섬은 서울 성동구 성수동에 소재한 에이원저지라는 옷감을 생산하는 공장이었다. 생산직 노동자들이 대부분 연소 여성노동자로서 약 8백여 명 규모에 달하는 비교적 큰 사업체였다.

당시 에이원저지는 수출은 물론 국내수요도 많아 경기가 좋은 회사인데도 근로조건은 형편없었다. 공휴일, 생리휴가 등도 무시하면서 하루 3교대 작업을 2교대로 바꾸고, 임금 또한 2~3년 근무한 사람이 일당 480원이었다.

이에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근로조건 개선을 위한 투쟁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고민하다가 근로조건을 개선키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우선 노동조합을 결성해야겠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이들은 청계피복노조에서 운영하는 노동교실에 가면 노조결성 하는 방법을 잘 가르쳐줄 것이라는 소문을 듣고 노동교실로 찾아갔다.

머리가 유난히 긴 십대 후반의 박숙녀라는 처녀가 동료 4명을 인솔해서 노동교실에 찾아왔다. 노동교실 실장인 이소선 등은 이들이 말하는 회사 사정을 자세히 듣고, 노조를 결성하고자 하는 각오를 확인했다. 그래서 청계노조 간부와 당시 노동교실을 드나들던 노동운동가들을 통해 이들을 집중적으로 교육시켰다.

이들 중에 가장 두드러진 사람이 애초에 동료들을 인솔해서 노동교실에 찾아왔던 박숙녀였다. 그녀는 나이는 어렸지만 야무지고 대담성이 있었으며 동료들로부터 신망이 두터웠다. 이소선 등은 박숙녀에게 또 다른 그룹을 만들어서 데리고 오라고 했다. 그래서 박숙녀는 5명 단위로 네 그룹을 조직해서 인솔해와 노조결성에 대한 교육을 받게 했다.

이들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중심이 되어 노조결성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농성투쟁을 하면서 투쟁현장에서 노동조합을 결성키로 했다. 구체적인 방법으로는 추석날인 9월 9일에도 휴가를 주지 않고 일을 시키는 것에 항의농성을 하면서 이 자리에서 노동조합 결성식을 거행키로 했다.

9월 9일, 박숙녀는 아침 기숙사 베란다에 5백여 명의 동료들을 모이게 한 후 「단결의 노래」를 부르며 임금인상, 기숙사 외출의 자유 보장, 공휴일 근무제 폐지, 부서이동의 복귀, 노조결성 등 7개 사항을 요구하는 유인물을 돌리고 이를 구호로 외쳤다.

기숙사 베란다에서 한참을 노래와 구호를 외치면서 농성을 하다가 이들은 운동장을 돌며 시위를 했다. 이때 중앙일보사의 취재차가 회사 안으로 들어와 취재를 하자 그동안 무관심과 멸시·천대 속에 살아온 노동자들이 추석날조차 고향은커녕 작업을 해야 하는 자신들의 처지에 극도로 흥분했다. 취재를 마치고 회사 정문으로 나가는 취재차를 따라 120여 명이 가두시위를 하게 되었다.

자신들의 요구가 적혀 있는 휘장을 두르고 약 3km 가량을 아무런 제지도 받지 않고 시위를 하던 이들은 뒤늦게 출동한 경찰에 의해 한양대 부근에서 머리채를 휘어 잡히고, 군홧발로 걷어차이는 폭행을 당했다. 그리고 76명이 동부경찰서에 연행되었고 2명이 동부시립병원에 입원했다.

이들 노동자들의 가두시위는 유신 이후 버스안내양들의 집단탈출 등과는 별도로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국가보위에 관한 특별조치법, 대통령 긴급조치 9호 등이 엄존한 상태에서 공장노동자들로서는 처음 있는 가두데모였다.

이소선은 이 소식을 전해 듣고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분노를 억제하지 못하고 일시에 폭발시켜버렸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자신들의 분노를 폭발시키는 것은 좋지만 결과적으로 조직적이고 지속적인 투쟁에는 실패할 수밖에 없는 것이 아쉬웠다.

이소선은 경찰서와 병원으로 연행된 노동자들을 면회를 가야 하나, 어떻게 해야 하나 걱정하고 있던 차에, 저녁 8시경에 노동교실로 전화가 걸려왔다. 전화를 건 사람은 다름 아닌 오늘 사건의 주동적 인물인 박숙녀다.

박숙녀는 경찰과 싸우는 과정에서 많이 다쳐서 동부시립병원에 입원해 있는 사람 중의 하나였다. 그런데 그가 어떻게 노동교실로 전화를 할 수 있단 말인가? 자세히 들어보니 그는 동부시립병원 2층에 입원해 있었는데 경찰의 감시가 소홀한 틈을 이용해 2층에서 뛰어내려 지금 어린이대공원 근처에서 전화를 걸고 있다는 것이다. 이 전화를 받고 이소선은 양승조 총무부장을 즉시 택시를 타고 박숙녀가 있는 곳으로 가게 했다. 양승조는 박숙녀를 만나 안전한 곳으로 피신시켜 놓았다.

이렇게 해서 주동자를 놓친 경찰은 당황했다. 사건 자체는 큰 사건인데 주동자를 놓쳐버렸지, 그렇다고 거의가 나이 어린 여성노동자들인 데다가 단순가담을 했기 때문에 박숙녀 이외에 다른 사람을 구속시킬 명분은 없으니, 경찰로서는 난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소선과 청계조합원들은 사태의 추이를 예의주시 하면서 시치미를 떼고 일상 활동을 수행해 나갔다.

덧붙이는 글 | [이소선 평전<어머니의 길>]은 매일노동뉴스와 함께 연재합니다



태그:#이소선, #전태일, #청계피복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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