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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사 (문제)의 퇴보를 목격하고 있다."

4일 오전 서울 서초구 대법원 앞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조영선 변호사(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긴급조치변호인단 간사)가 일갈했다. 그는 "이용훈 대법원장 시절 과거사에 대한 많은 반성이 있었지만, 양승태 대법원장이 취임하면서 과거사를 되돌리는 판결이 많아졌다"며 강하게 비판했다. 특히 이날 기자회견의 주제였던 긴급조치 9호 판결이 '퇴보'의 징표라고 지적했다.

문제의 판결은 10월 27일에 나왔다. 이날 대법원 2부(주심 이상훈 대법관)은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옥살이를 했던 서태열·장의식씨에게 국가가 그 손해를 배상할 책임이 있다고 판시했다. 1976년 이들이 수사 받는 과정에서 국가기관이 고문 등 가혹행위를 했다고 인정했기 때문이다(관련 기사 : 긴급조치 9호 피해, 국가 불법행위 입증돼야 국가배상).

그런데 판결문에는 의아한 구절이 있었다.

"당시 시행 중이던 긴급조치 9호에 의해 영장 없이 피의자를 체포·구금해 수사를 진행하고 공소를 제기한 수사기관의 직무행위나 유죄판결을 선고한 법관의 재판상 직무행위는 긴급조치 9호가 위헌·무효임이 선언되지 않았던 이상, 공무원의 고의 또는 과실에 의한 불법행위에 해당한다고 보기 어렵다."

'악법도 법'이라는 대법원

한 마디로 '악법도 법'이란 얘기다. 앞서 헌재는 2013년 3월 긴급조치 1호와 2호, 9호가 위헌이라고 결정했는데, 대법원은 이번 소송에서 과거 유죄판결은 당시 긴급조치 9호가 현행법이었던 것에 근거를 뒀으니 그로 인해 징역형을 살더라도 국가의 손해배상책임이 없다고 봤다. 다만 서태열씨와 장의식씨가 고문 등으로 허위자백을 했다는 이유로 재심에서 무죄 확정판결을 받은 만큼, 이들이 국가배상금을 받아야 한다고 했다.

대법원의 이번 판결은 곧바로 '피고 대한민국'의 무기가 됐다. 조영선 변호사는 "이 판결 이후 열리는 하급심에서 대한민국은 긴급조치 피해자들에게 수사기관의 고문, 폭행을 입증하라는 날선 공격을 거듭 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런데 국가의 날선 공격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1975년 5월 13일부터 효력이 생긴 긴급조치 9호는 1979년 12월 8일에서야 해제됐다. 존속기간이 수개월에 그쳤던 다른 긴급조치들 보다 상당 기간 유지된 탓에 피해자는 많았다.

해제 당일 <경향신문>은 "4년 6개월 27일 동안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1000여 명의 학생과 교수 등이 구속됐다"고 전했다. 2006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가 긴급조치 위반사건 589개의 판결문을 분석한 결과를 봐도 92.4%가 9호 위반사건이었다.

하지만 그 피해를 보상받은 사람은 아직 일부다. 조영선 변호사는 "긴급조치 9호 피해자들 가운데 민변 지원을 받거나 개별적으로 국가배상금을 받은 사람은 500명쯤으로 파악했다"며 "앞으로 소송을 진행할 나머지 피해자들은 대법원의 이번 판결을 근거로 (국가배상 책임이 없다고 하는) 국가와 싸워야 한다"고 설명했다. 긴급조치 9호가 위헌판결난 것만으로는 부족하니 피해자들은 다시금 고통스러운 기억을 더듬어가며 자신의 피해를 직접 증명해야 한다.

"긴급조치로 인생이 무너졌는데..."

피해자들은 한 목소리로 사법부를 성토했다. 이들은 기자회견문에서 이번 판결은 궤변, 꼼수며 건전한 시민의 법상식을 뒤집는다고 비판했다. 또 "어떤 법관들은 (형사사건) 재심 무죄판결을 하며 '선배 법관들의 지난날 잘못을 대신 사과한다'는 말로 우리를 숙연하게 만들었는데, 대법원이 후배 법관들의 뒤통수를 느닷없이 후려갈긴 셈"이라고 지적했다.

서태열씨 등의 1심 재판부(서울중앙지방법원 민사42부·재판장 이건배)만 해도 판결문에서 "이 사건 공소사실의 증거는 증거능력이 없거나 증명력이 부족한데도 법원은 원고들의 유죄를 인정하는 판결을 선고·확정했다"며 과거 판결도 국가의 위헌적 불법행위로 꼽았다.

하지만 2심(서울고등법원 민사17부·재판장 김용석) 판결문에는 이 내용이 빠졌고, 대법원은 아예 '정당했다'는 결론을 내렸다. 긴급조치 피해자들은 대법원이 사실상 판례 변경을 시도했다며 절차 역시 문제라고 본다.

그럼에도 별 다른 방법은 없다. 한 피해자는 기자회견에서 "최후의 수단으로 당사자에게 구상권 청구하는 것도 검토하겠다"고 말했다. 긴급조치를 발동했던 박정희 대통령을 가해자로, 딸 박근혜 대통령을 상속인으로 보고 손해배상금을 요구하겠다는 뜻이다. 하지만 조영선 변호사는 "시효와 입증의 문제가 있다, 판결 변경밖에는 방법이 없다"며 난색을 표했다.

대학교 4학년이던 1978년 5월,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1년간 복역했던 최정순(59)씨는 이날 "긴급조치로 인생이 바뀌고 젊음을 뺏겼는데 대법원은 억장이 무너지는 판결을 했다"며 "그냥 두고 볼 수 없다, 너무나 억울하다"고 말했다. 그는 "우리는 배상금을 많이 받으려는 목적이 아니다"라며 "과거에 잘못을 한 법관과 검사 등이 반성하는 시대를 바란다"고 덧붙였다. 또 박근혜 대통령의 도의적 책임을 거론하며 과거사 문제 해결을 촉구했다.

"박정희 대통령의 잘못을 딸 박근혜 대통령이 바로 세우지 않으면 두 정권이 뭐가 다르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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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박정희, #긴급조치, #박근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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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정치부. sost38@ohmy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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