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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통선 철책과 쌀 익는 들녘의 이채로운 풍경을 함께 볼 수 있는 접경동네 문산읍 장산리.
 민통선 철책과 쌀 익는 들녘의 이채로운 풍경을 함께 볼 수 있는 접경동네 문산읍 장산리.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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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 지도에서 '문산'(경기도 파주시 문산읍)을 치면 남북으로 분단된 우리나라의 경계를 흐르는 임진강을 따라 북녘 땅이 훤히 보이는 임진강역, 임진강의 하중도(河中島) 초평도 등을 품은 지역이 나온다. 특히 이맘때면 민통선 철책선 따라 펼쳐진 쌀이 익어가는 노란 들판까지 나있어 자전거 여행자라면 안 가볼 수 없는 곳이기도 하다.

경의선 문산역에서 임진강변을 따라 조선시대 황희 정승이 갈매기를 벗 삼아 여생을 보낸 반구정, 임진강 기차역과 철길 건널목, 민통선 철책을 품은 풍성한 가을들녘, 정다운 시골 마을 장산리... 인적이 드물고 익숙하지 않은 접경 지역이지만 자유로 옆길, 농로 옆 임도, 철책길, 마을길을 이어 붙인 'DMZ 평화누리길'이 이어져 있어 길을 잃고 헤맬 걱정이 없어 좋다. DMZ 평화 누리길은 김포에서 파주, 경기도 연천군 경원선 신탄리역 사이의 접경지역을 지나는 길로, 포장도로가 많아 걷기보다는 자전거 타고 가기 더 좋은 길이다.  

철책이 둘러쳐진 임진강가의 아름다운 정자, 반구정

동네 사람들이 다 나온듯 북적이는 문산 오일장.
 동네 사람들이 다 나온듯 북적이는 문산 오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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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강이 잘 보이는 명당자리 반구정에도 철책이 둘러서 있다.
 임진강이 잘 보이는 명당자리 반구정에도 철책이 둘러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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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서 경의선 전철을 타고 북쪽으로 1시간쯤 달렸을까, 경기도 일산과 파주를 지나면서 누렇게 익어가는 가을 들판이 전철 창에 가득 찼다. 마치 가을 들녘을 찍은 큰 사진작품을 연달아 보는 것 같았다. 추색이 완연한 들녘 연작(連作)을 감상하다 보면 어느새 종점인 문산역이다.

원래 종점이었던 경의선 임진강역은 오전, 오후 하루 두 번만 오가는 DMZ 관광열차로 바뀌면서 일반 열차는 더 이상 오가지 않는단다. 하는 수 없이 자전거 여행의 출발지가 임진강역이 아닌 문산역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몰랐던 문산 오일장, 임진강역 가는 자유로 옆 임도길, 임진강변의 아름다운 정자도 알게 되고 오히려 여행이 풍성해졌다. 

문산역 앞 문산읍엔 매 4일, 9일마다 오일장이 펼쳐진다. 장터 입구에 시장을 모조리 빨아들이기라도 하려는 듯 이마트가 거대한 진공청소기처럼 자리하고 있었다. 큰 오일장은 아니지만 많은 주민들이 찾아와 먹거리와 물건을 사고팔고, 흥정하고, 반갑게 인사를 나누는 정겨운 동네 장터다. 추수의 계절답게 밤, 대추, 배, 감들이 흔히 보이고, 어느 식당 앞에서 홍보용으로 전어를 굽는 냄새가 집 나갔던 식욕을 한껏 돋우었다.

단 냄새를 풍기며 아저씨가 만드는 '달고나 뽑기'와 애완용으로 파는 귀여운 새끼고양이들 앞은 동네 아이들 세상이다. 타지역 아시아 국가에서 이주한 젊은 어머니들과 아이들도 장터에서 흔히 마주쳤다. 한핏줄, 한민족이라며 순수혈통을 강박적으로 주입 시켰던 학창 시절 교과서와는 달리 원래 한반도는 몽골, 중국, 인도사람까지 도래했던 다민족국가였다. 이제 서남 아시아인까지 섞인 다음 세대는 새로운 다민족 국민의 얼굴을 가지게 될 듯싶다.  

문산읍에서 '반구정' 이정표를 따라 차도와 농로 옆 임도를 이삼십 분 달리다 보면 어느새 임진강변으로 들어서게 된다. 함경남도 덕원군 마식령 산맥에서 발원한 임진강은 황해북도 판문군과 강원도를 거쳐 경기도로 들어와 연천, 적성, 고랑포를 적시다 문산에서 비로소 하류가 되면서 서울 한강으로 유입되어 황해 바다로 흘러드는 강이다. 한강으로 유입되기 전 임진강의 마지막 모습을 볼 수 있는 문산이지만, 자유로와 높다란 군용 철책이 시야를 가로막았다. 그런 방해물에서 벗어나 임진강을 잘 볼 수 있는 유일한 곳이 바로 '반구정'이라는 전망 좋은 정자다.   

반구정은 경기도에서 관리하고 있는 공식 문화재로 조선 세종 때 유명한 정승이었던 황희(1363∼1452)가 관직에서 물러나 갈매기를 친구 삼아 여생을 보낸 곳이다. 그래서 정자 이름이 반구정(짝 伴, 갈매기 鷗, 정자 亭)인가 보다. 6·25전쟁 때 그만 불타 버렸다가 황희의 후손들이 1967년 옛 모습으로 다시 개축했다. 이웃의 한강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 바다의 내음이 느껴지는 강 하류 특유의 모습과 널찍한 모래톱 등 임진강을 이렇게 가까이에서 보니 새롭다.

맑은 날 정자에 오르면 멀리 개성의 송악산까지 볼 수 있다지만 지금 반구정과 임진강 사이엔 날카로운 철조망이 쳐져 있고 초소엔 총을 든 군인들이 경계를 서고 있다. 이곳에서 말년을 보냈다던 황희 할아버지는 못난 후손들로 인해 이런 살풍경이 펼쳐질 줄 상상이나 했을까. 반구정 옆 반구정 나루터는 큰 장어식당이 되어 운영 중인데 이 식당의 자랑이었던 임진강 경치 또한 철책으로 빛을 잃었다. (반구정 운영시간 오후 6시까지, 입장료 천 원, 문의는 031-954-2170 )

남한의 최북단 유원지가 된 임진강역

임진강역 앞 최북단 무인 철도 건널목 운천2리 철도 건널목.
 임진강역 앞 최북단 무인 철도 건널목 운천2리 철도 건널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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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 여행을 더 즐겁게 해주었던 겁없는 무사 사마귀.
 자전거 여행을 더 즐겁게 해주었던 겁없는 무사 사마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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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구정을 나와 임진강역을 향해 농로 옆 임도를 달렸다. 논밭 옆 시골길을 달리는 기분도 좋고 떡하니 길을 막아서서 자전거를 향해 앞발질을 하는 타고난 무사 사마귀도 재미있다. 경의선 최북단 무인 철도 건널목인 '운천2리 건널목'에 닿으니 철길 너머로 임진강역이 보였다.

자전거 여행자에겐 쉼터로도 좋은 곳이다. 쓸쓸했던 접경지역 기차역이 이젠 많은 시민들이 놀러오는 최북단 유원지가 됐다. 보통 유원지와 다른 건 놀이공원시설과 함께 지하 벙커 관람, DMZ 철책길 투어 같은 이채로운 볼거리가 있다는 것이다.

해설을 겸하는 인솔 군인들과 함께 관광용으로 개조한 옛 지하 벙커를 돌아보고 나온 한 어린 아이가 "아빠, 북한은 좋은 편이에요, 나쁜 편이에요?"하고 물었다. "지금은 비록 총부리를 겨누고 있는 적이지만, 머지않아 어깨동무를 하고 함께 살아 나아가야 할 좋은 편이란다"라고 말하고 싶은 표정의 젊은 아빠. 하지만 차마 길게 설명하지 못하고 그만 "응... 바이킹 타러 갈까" 하며 얼버무리는 모습이 남일 같지가 않았다. 

나라마다 철도 폭(궤간)이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된 임진강역.
 나라마다 철도 폭(궤간)이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된 임진강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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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강역 안에 들어가 물도 얻어 마시고 역무원 아저씨와 담소를 나누다 흥미로운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자전거를 기차에 싣고 북한은 물론 이어진 러시아, 시베리아를 달려 유럽까지 여행 가보는 게 꿈이라고 말하자, 그 꿈을 실현하기 위해 기술적으로 반드시 넘어야 할 산이 있단다. 한국과 러시아의 철도 폭(궤간)이 다르다는 것.

다 똑같이 보였던 철도 폭은 국가와 지역별로 다르다고. 한국과 중국은 1435㎜ 표준궤를 쓰며, 러시아를 비롯한 구소련지역과 그 영향권에 있던 몽골은 1520㎜의 광궤를 쓰고 있다. 유라시아 철도의 과제는 이 표준궤와 광궤를 연결하는 것이다. 일본과 동남아에선 상대적으로 좁은 폭의 협궤를 깔았다.

일본이 자국에 깐 협궤보다 비용이 많이 드는 표준궤를 한반도에 깐 것은 향후 중국과 러시아 대륙으로의 군사적 진출을 도모하고, 조선에서 수탈한 물건을 다량으로 본국에 빠르게 옮기려는 계산이 숨어 있었다.1905년 러일전쟁이 발발하자 한반도를 종단하는 경부선 철도와 경의선 철도를 가장 먼저 놓은 것에서 그 의도를 파악할 수 있다.

배부른 금빛 들판을 가르는 민통선 철책

흰 옷 입은 백로가 농부처럼 논을 지키고 서있다.
 흰 옷 입은 백로가 농부처럼 논을 지키고 서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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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밧골 주민 아저씨가 먹어보라며 건네준 대추, 덕분에 장산에 오를 수 있었다.
 맨밧골 주민 아저씨가 먹어보라며 건네준 대추, 덕분에 장산에 오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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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강역에서 잘 쉬고 다시 5분 거리의 '운천2리 철도 건널목'으로 내려오면 DMZ 평화누리길 이정표가 민통선 철책과 너른 평야를 향해 나있다. 문산읍 장산리 가는 길로 접경지역의 애잔함과 청정함을 가까이에서 느낄 수 있는 길이다. 초소의 군인들이 지키는 민통선 철책과 흰 옷 입은 깔끔장이 백로가 지키고 서있는 가을 들녘길을 따스한 햇볕을 실컷 쬐며 달려갔다.

추수 직전 알알이 여문 쌀들을 알처럼 품고 고개 숙인 벼들 사이의 한적한 들판을 달리는 기분은 가을 여행의 제 맛이다. '평야는 평화다'란 외침이 절로 터졌다. 하늘엔 잠자리들이 길 섶에선 작은 뱀, 개구리들과 임진강 뻘에서 온 게들까지 지나가 자전거 페달을 살살 밟게 된다. 한갓진 들판이 심심해 옆에 나있는 민통선 철책길로 들어섰다.

민통선 안 임진강가에도 너른 논이 펼쳐져 있고 농민들이 정원 가꾸듯 논을 돌보고 있었다. 전에 단체로 라이딩을 해본 곳이어서 익숙하게 달려간 지 채 몇 분도 되지 않아 초소에서 나온 앳된 얼굴의 군인, 자전거를 탄 초급 장교가 헐레벌떡 쫓아왔다. '내 거동이 수상했나?' 했는데 이 철책 길은 개인이 와서 허가 없이 지나가면 안된다고 친절하게 알려 주었다. 

융자 끼고 거금 5천만 원 주고 장만했다는 신통방통한 기계 콤바인으로 추수를 하는 농민 부부를 만났다. 민통선 철책길이 가른 들판에서 나오는 이 쌀의 이름이 있는데 바로 '파주 임진강 쌀'이란다. 충청도 예당평야, 전라도 만경평야 등 드넓은 유명 곡창지대가 있지만, 북쪽의 파주와 철원에도 이렇게 많은 논밭이 있다. 파릇파릇한 초록색에서 어느새 금빛으로 알알이 여무는 벼들을 보니, 70년 대 경제개발시대부터 지금까지 국가로부터 소외되고 버림받아온 농민들의 끈질긴 삶을 보는 것 같았다. 

장산 고갯 마루에 서니, 임진강의 자연섬 초평도와 너머의 북녘땅이 한눈에 펼쳐진다.
 장산 고갯 마루에 서니, 임진강의 자연섬 초평도와 너머의 북녘땅이 한눈에 펼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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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러기들이 떼로 비행을 하며 나누는 소리가 생생하게 들려왔다.
 기러기들이 떼로 비행을 하며 나누는 소리가 생생하게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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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원주택 같은 세련된 집과 옛 시골집들이 섞여 모여 있는 정답고 아담한 마을 장산리 마을회관에 들어갔다. 마을회관에 앉아있던 할머니 한 분이 채 말도 꺼내지 않았는데 물통에 물을 채워주셨다. 임진강과 초평도, 북한 땅까지 보인다는 장산 전망대에 간다는 내 말에 물 먼저 마시고 다시 물통을 채워가라는 할머니의 배려는 다 이유가 있었다. 장산리엔 마을 뒷산이자 고갯마루까지 계속 오르막길이 이어진 장산이 있어서였다.

장산 가는 길에 마주친 정다운 이름 '맨밧골'이라는 마을에선 동네 아저씨가 대추나무에서 딴 대추 너덧 개를 먹어보라고 주셨다. 추석 땐 밍밍했던 대추 맛이 잘 익은 사과를 먹는 달고 사각거렸다. 맛난 대추 덕분인지 자전거에서 내려 '끌바'(자전거를 끌고 간다는 자전거 용어)를 하며 장산 전망대에 거뜬히 올라갔다. 절도 없는 산에 웬 포장된 임도가 깔렸나 했는데 산꼭대기에 군용 헬기장과 곳곳에 방공참호, 방호벽 등 군사시설물들이 있었다. 접경지역이다보니 아담하고 전망 좋은 동네 뒷산도 군 작전에 동원된다.

강바람이 시원한 장산 고갯마루에 올라서니 DMZ 생태의 보고인 임진강 유일의 자연섬 초평도와 남북 접경지역이 한눈에 들어왔다. 왼쪽으로 DMZ 안 대성동 마을과 북쪽 기정동 마을이 나란히 보이고, 오른쪽 강 너머엔 실향민 마을인 진동면 해마루촌이 아련하게 펼쳐졌다. 고갯마루 정자에 기대어 앉아  멍하니 초평도를 바라보고 있는데 머리 위에서 꿩소리 비슷한 거친 새소리가 들려왔다.

하늘을 올려다보니 기러기들이 브이자로 대형을 이루며 북쪽으로 힘차게 날아가고 있었다. 기러기들끼리 나누는 대화가 어찌나 생생하게 들려오던지, 맨 앞의 기러기가 맨 뒤의 기러기에게 "자, 힘내, 조금만 가면 북녘땅이야" 이런 얘기를 하는 것 같았다. 나도 자전거 타고 신나게 북으로 달려갈 날이 어서 오길 기러기들을 보며 기원했다.

* 주요 자전거 여행길 : 경의선 문산역 - 반구정 - 임진강역 - 민통선 철책 옆 논길 - 장산1리 마을회관 - 맨밧골 - 장산 고갯마루 전망대

덧붙이는 글 | 지난 10월 4일에 다녀 왔습니다.



태그:#문산, #DMZ 평화누리길, #문산 오일장, #반구정, #문산읍 장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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