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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9월 3일, 목동종합운동장에서 열린 전국금융산업노동조합 총파업 현장에 아이돌 가수 '크레용팝'이 축하 무대를 가졌다.
 지난 9월 3일, 목동종합운동장에서 열린 전국금융산업노동조합 총파업 현장에 아이돌 가수 '크레용팝'이 축하 무대를 가졌다.
ⓒ 전국금융산업노동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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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일, 전국금융산업노동조합(아래 금융노조)은 14년 만에 총파업에 나섰다. '관치금융 철폐', '낙하산 인사 저지' 등을 구호로 내세우며 서울 목동종합운동장에서 집회도 열었다. 하지만 이 날의 주인공은 14년 만에 총파업을 벌인 금융노조가 아니라 초대가수 '크레용팝'이었다.

크레용팝의 금융노조 총파업 현장 공연은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화제가 됐다. 이는 크레용팝의 과거 전력 때문이기도 하다. 크레용팝 멤버들은 극우 성향의 인터넷 누리집 <일간베스트>(아래 일베)의 회원이 아니냐라는 논란에 휘말린 전력이 있다. 일베 논란을 겪은 아이돌이 '파업'현장에서 공연을 했다는 사실 자체가 많은 누리꾼들의 호기심을 끌었다.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짓인데 크레용팝을 비난하지 말자"라는 의견부터 "'삐까뻔쩍 나도 한 번 잘살아보자'(크레용팝의 노래 '어이'의 가사 중)는 가사가  데모에 최적화됐다"라는 의견까지 다양했다. 한 사진 관련 인터넷 커뮤니티에서는 "백골단 따라했던 애들이 금융노조 투쟁 현장에 가?"라며 의아함을 표출하거나 "크레용팝이 파업에 간 것은 정상, 파업 측에서 크레용팝을 부른 것이 이상"이라며 금융노조를 비판하는 의견도 있었다.

<한겨레>의 보도에 따르면, 금융노조와 크레용팝 모두 서로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상태에서 이뤄진 공연이었다. 기획업체에 가수 섭외를 의뢰했던 금융노조는 크레용팝의 '일베' 논란에 대해 알지 못했다. 크레용팝의 소속사 역시 행사명을 '금융노조 축제 한마당'으로 소개 받았을 뿐 총파업 현장이었다는 사실을 뒤늦게서야 알았다. 순간의 해프닝으로 끝날 만한 일이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여전히 금융노조를 향해 손가락질을 하고 있다. '일베 전력이 있는' 크레용팝을 무대에 올렸다는 점을 지적하는 사람도 있고 '아이돌' 가수를 총파업에 섭외한 것 자체를 비판하는 이도 있다. 과연 그게 진짜 중요한 것일까?

크레용팝의 일베 논란, 중요하지 않다

크레용팝을 둘러싼 일베 논란은 총파업 행사와 관련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지난 2013년, 크레용팝은 소속사의 부적절한 홍보, 특정 인물 비하로 의심되는 어휘 사용 등의 이유로 물의를 일으켰다. 하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우리는 그들이 해당 단어의 뜻과 용례를 정확히 알고 썼는지 단정할 수 없다. 만일 그들이 뜻을 알고 썼더라도 그것은 그들이 윤리적으로 비판받거나 이미지 훼손으로 인해 간접적으로 영향 받아야 할 지점이다. 그들이 어떤 무대에는 갈 수 있고 어떤 현장에는 갈 수 없는지를 가르는 기준이 될 수는 없다.

행사 주최자와 당사자가 계약과 대화로 해결하면 충분할 문제를 굳이 바깥의 우리가 나서서 시시비비를 명백히 가릴 필요는 없다. 심지어 이미 크레용팝은 충분한 사과와 해명을 하지 않았는가. 크레용팝 행사 논란의 대마는 '걸그룹을 노조 총파업에 불러도 되는가'와 '노조 총파업이 행사로 취급받아도 괜찮은 걸까'이다.

총파업이라는 '신성'한 장소에 어떻게 걸그룹을 부르냐는 인식은 경직된 엄숙주의에 지나지 않는다. 기자가 학내외 집회 현장을 가봤을 때 항상 들었던 의문점은 "왜 항상 민중가요만 부를까"였다. 내가 듣거나 편하게 즐기던 노래는 '소녀시대', '국카스텐', '10cm'의 노래인데 왜 저 행사는 그런 노래를 틀어주지 않았을까. 그래서 그런지 행사들은 재미가 없었고, '그저 그렇고 옛날 냄새 나는 진부한' 것으로 기억에 남았다.

저런 경험을 했던 사람으로서 금융노조의 걸그룹 섭외는 참으로 신기하게 느껴지는 한 수이다. 흔히 볼 수 있는, '머리에는 끈을 묶고, 깃발은 흔들리고, 주먹쥔 손을 든' 집회만으로는 더 이상 흥미롭지 못하다. 그것 말고도 다른 콘텐츠를 보여줘야 공감과 연대의 끈이 강고해진다. 최근 집회 현상에서 뮤지컬 <레 미제라블>의 '두 유 히어 더 피플 싱'(Do you hear the people sing)을 부르는 것도 그 일환이다.

물론, 생과 의지를 걸고 하는 파업이다. 진한 울림을 줘야 할 현장에서 경박스러운 노래가 울려퍼지는 것이 방해가 될 수 있다. 그러나 그 진한 울림조차 개인의 감수성에 따라 큰 격차가 있다. 집회와 시위가 익숙지 않은 젊은 세대들에게 너무나 '구시대적' 무언가일 수밖에 없다.

최근 화제가 된 아이스 버킷 챌린지와 금융노조의 걸그룹 섭외는 크게 다르지 않다. 엄숙주의 위주의 기부문화에 '재미'를 곁들여 긍정적 파란을 낳은 아이스 버킷 챌린지와 엄숙하기만 한 파업현장에 젊은 세대의 문화 콘텐츠를 도입해 '흥미'를 느끼게끔 하려는 금융노조의 시도는 유사하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파업 현장을 찾은 젊은 노조원들은 분명 크레용팝을 보면서 즐거움을 얻지 않았을까. 노조원 개인과 노조 전체에도 장기적으로 좋은 경험이 될 것이다.

우리가 정말로 주목해야 하는 것

서글픈 것은 노조 총파업이 '행사'로 취급받는 현실이다. 파업은 '노동자가 노동 조건을 개선하기 위해 단결하여 노동을 하지 않음'으로 정의된다. 그러나 파업은 저 지난한 수식어보다 더 큰 힘을 갖고 있다. 노동자끼리의 연대를 통해 생산 현장에서 벌어지는 파업 투쟁은 세계사의 주요 변곡점마다 큰 역할을 차지했다.

일례로 2011년 1월 시작된 이집트 혁명의 불꽃은 노동자들의 연대파업으로 더욱 거세졌다. 한국의 양대노총처럼, 조직된 이집트 노동자들이 중요한 구실을 하면서 파업 물결에 추진력이 더 커졌다. 그들은 무바라크 집권당과 관련된 사장과 부패한 관리자를 해고하라며 생산현장과 거리에서 투쟁했다.

하지만 신자유주의가 심화되고 사회가 보수화됨에 따라 어정쩡한 탈정치 바람과 어줍잖은 냉소주의가 사회에 판을 치기 시작했다. 그로 인해 대학생들은 지엽적인 학문만을 공부하고, 기성 세대는 생계에만 보다 집중한다. 시위와 집회, 파업은 모두 우리의 이야기가 아니라 그들만의 이야기가 된다. 자신이 동종 업계에 일을 하더라도 파업은 일부 '빨갱이'만의 무엇으로 치부된다. 그렇게 삶의 투쟁이던 파업은 칸막이화된 사회에서 배양되는 우리에게 '행사'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지점장이 직접 파업에 참여하는 직원에게 전화해 인사상 불이익을 이야기하고, 보수 언론은 '귀족 파업'이라 몰고 간다. 정부가 각 은행을 협상장으로 끌어오며 금융노조의 파업은 반쪽자리가 되고 있다. 박근혜 정부는 정권 유지를 위해 은행 간 합병을 맹목적으로 서두르고 낙하산 인사를 반복한다. 개인 금융거래 정보가 단돈 몇 푼에 팔려 나가고, 천문학적 규모의 대출 사고가 연일 터지는 현실을 개선하기 위해 정부와 사용자에게 경종을 울리려던 파업이었다. 그러나 현실은 참여 독려를 위해 섭외했던 걸그룹에만 집중되고 있다.

"왜 하필 다른 가수도 아니고 크레용팝을 불렀냐"라든지, "총파업 현장에 아이돌 가수가 웬말이냐"라는 의견은 사건의 본질을 꿰뚫지 못한다. 걸그룹 섭외는 그저 파업 참여를 독려하기 위한 장치다. 이러한 종류의 개량을 비판하는 데 매몰되면 서로 간의 발목잡기일 뿐 그 이상의 무언가는 만들지 못한다. 우리가 집중적으로 비판해야 하는 것은 저렇듯 파업 자체를 발목잡은 작금의 슬픈 사회다.


태그:#금융노조, #총파업, #아이돌, #크레용팝, #일간베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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