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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우리 동네 구청 정원(해운대)에는 '황금 연못'이 있다. 이 연못 안에는 잉어들이 수백 마리가 산다. 종종 나는 그 연못가에 앉아 잉어들이 헤엄쳐 다니는 것을 오래 지켜보곤 한다. 그들은 잠시도 쉬지 않고 움직인다.

가만히 보면 그들은 제 갈 길을 찾아 부지런히 움직이는데, 그들은 결국 '물의 감옥'에 갇혀 생존과 소멸을 반복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이를 모른다는 것이다. 이렇듯 우리의 인생도 어디론가(죽음을 향해) 분주히 바쁘게 움직이며 가고 있는데, 그곳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는 점에서 결코 다르지 않다. 

 황금물고기가 노니는 연못
 황금물고기가 노니는 연못
ⓒ 송유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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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단잉어가 노니는 황금연못
 비단잉어가 노니는 황금연못
ⓒ 송유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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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 누가 묻는다면, 나의 시의 근거는 삶과 죽음이 혼재 된 우리의 삶의 본질적인 고민으로부터의 시작이라고 대답(가장 기초적인)할 것이다. 현존의 자취를 남기지 않고 사라지는 슬픈 존재(생명이 모든 것들)들을 향한 나의 사색으로부터 현란한 시의 이미지(상징)들이 탄생한다 하겠다.

이렇게 나에게 '시를 쓴다'는 의미는 불온한 슬픈 존재에의 비애를 말랑말랑하게 시로 느껴보고자 하는 업에 다름이 아닐 터이다. 그러나 언제나 생각하는 나의 시와 시를 쓰는 나 사이의 간극은 너무 넓었다. 등단 초기에는 순전히 '감각'에 의지해서 시작을 하였다. 그리고 그것이 불변하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나는 위대한 작가 고갱의 대표작 <우리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라는 그림을 본 후, 나는 내가 얼마나 작은 것에 집착하고 매달려 시를 쓰는지 성찰하는 계기가 됐다. 지금도 나는 고갱의 작품을 처음 보았을 때의, (온 몸이 얼어붙는 그 강렬한 느낌)시명에서 아직도 자유로울 수 없는 듯하다. 그리하여 많이 접하게 된 철학책들과 불경과 성경들이 내 시 세계를 확장하는 데 일조하였다고 본다.

먹기 위해 쓰는 그릇이나 살기 위해 먹는 마음이나
한번 쓰고 나면 씻어두어야 다음을 위해 쓸 수 있는 것이라 싶다
그러나 물만 마시고도 씻어두는 유리컵만도 못한 내 마음은
더렵혀지고 때 묻어 무엇 하나 담을 수 없다
금이 가고 얼룩진 영혼의 슬픈 그릇이여
깨어지고 이가 빠져 쓸데가 없는 듯 한 그릇을 골라내면서
마음도 이와 같이 가려낼 것은
가려내서 담아내야 하는 것은 아닌가 생각한다
 
소설가 양귀자씨는 위의 작품 <냄비의 얼굴은 반짝인다>를 통해, "처음 무심하게 읽다가 그만 마음 속 어딘가가 서늘해져 버렸었다. 내처 다시 읽었더니 이번에는 마치 예전부터 홀로 숨 죽여 올리던 나의 기도문 같았다. (중략) 그녀의 시는 읽는 순간 그냥 물처럼 스며든다"라고 이야기한 적도 있다.

<냄비의 얼굴은 반짝이다>는 '마음'을 '그릇'에 전이하여 우리 삶을 움직이는 주체가 '마음(영혼)'임을 각인시키고 있겠다. 그러나 나의 시에 대해 칼로 무를 자르듯이 분명한 경계를 그어 이야기하기는 힘들 것 같다.

따라서 내 시의 깊이 시추하는 일이 분산되기도 하면서, 나는 '홀로 숨 죽여 올리는 기도문'을 작성하려는 작위적인 의지로, <공(空)>의 창작(연작)에서 실패하기도 했다. 이런저런 연유에서 텅 비어 마주하는 신산한 삶과 중첩되는, 절대적인 자아와의 조응에서 중얼중얼 나르시시즘 맥락의 연시를 읊기도 했다. 어느 순간 화들짝 놀라, 내 시에서 배제되고 있는 시대적 현실, 동시대의 역사, 사회적 현실의 아픔에 대해 애써 관심을 갖기도 했다.

그러니까 나의 시는, 배제 원리에서 창작된 시와 그러지 않은 시로 나눌 수가 있겠다. 그러나 금강경의 부처님 말씀(법(法)을 법(法)이라고 할 때 법이 아니다)처럼, 시(詩)는 시라고 말할 때 이미 시(詩)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번번이 내 시 앞에서 나는 모래성처럼 힘없이 무너지고 바람에 흩어지곤 하였다.

이해하라! 독자들이여, 시인이란 불온한 슬픔에 부대끼는 영혼들이다. 세계를 이루는 조화 속의 부조화가 이루는 질서, 정의와 부조리가 융화되어 살아가는 삶에게 백기를 들기도 하지만, 궁극적으로 인간(시인)은 무상하나 예술(시)은 영원하다는 진부한 이 말을 지푸라기처럼 잡고 예까지 승냥이처럼 울부짖고 왔는지 모르겠다. 아니 그럴지도 모른다. 나는 아직도 시를 쓰지만 시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지도. 많은 시를 써왔지만, 기실은 한 편도 쓰지 못한 것이다…. 

상처 입은 자연에의 교향시

십년감수(十年減壽). 최근 쓰고 있는 연작시 <유칼리 숲의 물리치료실>에서 내 시의 미래를 애써 실마리로 찾을 수 있겠다. '물리치료실'이란 비시적 공간을 시적공간으로 탈바꿈시키면서, 팔이 부러지고 다리가 꺾인 물리치료실의 공간을 울울한 숲으로 환유하여, 자연과 인간의 합일점을 소명해 보였다.

두 개의 이질적인 공간이 충돌하나, 예상 외로 새로운 의미망들이 탄생한다. 그 주체는 바로 '유칼리 숲의 물리치료실 사람들'이다. 즉 상처 입은 자연(요양병원의 환자들)이다. 왜? 어떻게? 무엇 때문에? 이곳으로 흘러들어와,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점에서 앞서 기술한, '황금연못' 속의 물고기 신세와 같다고 봐도 틀린 것은 아닐 것 같다.

그 창은 거미줄이었다…. 마리아 노(老) 수녀는 재활병동에 입원한 후 보청기를 통해 새소리를 듣고 처음으로 흙에 입을 맞추었다. 은행나무 침상을 함께 쓰는 환우들은 이 숲에서는 밤이 너무 일찍 오고 낮이 너무 짧다고 투덜댔다. 유칼리 잎 뜯어먹고 사는 '코알라'가 잠이 오지 않는 것은 늙은 징조라고 놀려댔다. 새벽 물소리 숲을 깨우면 지난 가을 날벼락 맞은 숱한 동무나무들이 동시에 비명을 질러댔다. 머리에 잎사귀를 꽂은 간병인이 이마를 맞대어 커튼을 드리워주었다. 종종 예고 없이 혈압이 상승한 새들의 찢어진 울음으로 나무의 회랑에는 햇빛 향기 비릿했다. (중략)유칼리 숲은 종종 살균 소독 냄새에 치매처럼 지워졌다.
 송유미의 <유칼리 숲 물리치료실 2>부분

노자는 <도덕경>에서"불행이란 몸을 가진 가짐으로써 시작되는 것 몸이 없다면 어디에 불행이 있을 수 있을까"라고 적고 있다. 그러므로'상처를 입은 자연(인간)'은 그럼 어디에서 치유와 상생할 수 있는가. 인간의 영혼을 어루만지고 보듬던 '숲(강)'은 깊이'병'들어있다. 순환이 깨어져버린 자연. 더 이상 훼손된 자연은 치유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걱정할 필요는 없는 듯하다.

이 시는 필자의 직접 체험(몇 년 전에 교통사고를 당함)이 육화되어 있다. 영원 재귀의 '숲(자연)'에의 치유는 스스로의 상생의 힘을 가지고 있다. 인간의 상처 입은 몸(영혼)도 스스로 치유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한다. 이러한 연장선 위에서 읽는다면, '노자'의 '무위사상'이 나뭇잎처럼 <유칼리숲의 물리치료실> 회랑에 수북이 깔려 있겠다.

하여 모든 슬픔의 불온한 존재들을, 이 '숲(병동)' 안에 작위적으로 잘 재배치시키는 시작에 몰두할 예정이다. 하여 '한 편의 시도 쓰지 못했기에, 그 한 편으로의 시에의 완성을 향해서' 나는 겨우겨우 시에게로 가보려 한다. '황금연못' 속의 물고기의 말을 잠시 빌려서.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이 글은 시전문지 심상 8월호 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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