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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대의 섬, 발리(Bali)의 뜨거운 태양에 조금 지쳐갈 때쯤 나는 발리의 해변을 떠나 해발 1600m의 고원 지대인 브두굴(Bedugul)로 향했다. 브두굴은 발리의 다른 지역과 달리 낮에도 제법 시원하고 밤에는 쌀쌀해서 더위를 피하려는 여행자들에게 제격인 곳이다. 브라딴 호수가 내려다보이는 보엔(Gunung pohen) 산중턱의 브두굴 식물원(Bedugul Botanical Garden)은 시원한 날씨 속에서 삼림욕을 할 수 있는 곳이다. 브두굴에 다녀가는 여행자라면 바쁜 여정 중에도 지나쳐서는 안 될 곳이다.

발리 남부의 평야지대에서 북쪽으로 계속 올라가니 야자수와 구름 사이로 발리의 높은 산악지대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차는 고산지대의 구불구불한 산길을 굽이굽이 올라간다. 고개를 넘어가는 언덕 위에는 딸기 언덕(Strawberry Hill)이라는 전망 좋은 식당도 있고, 부근에서는 브두굴 딸기도 팔고 있다.

날씨가 선선한 브두굴 인근은 고랭지 채소와 함께 딸기 같은 과일 재배가 많이 이루어진다. 발리의 딸기가 우리나라 딸기에 비해서는 당도가 떨어진다고 하여 따로 사지는 않았다. 발리 친구, 아롬도 이곳에서 딸기를 많이 재배한다고 말하면서도 굳이 딸기를 사라고 추천하지는 않는다.

발리의 해변에서 더위에 지치면 높은 산으로 올라가 더위를 식힌다.
▲ 발리 고산지대 발리의 해변에서 더위에 지치면 높은 산으로 올라가 더위를 식힌다.
ⓒ 노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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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더운 발리에서 한국의 가을 날씨를 느끼다

계단식 논으로 유명한 빠중(Pacung)에서 북쪽으로 20분을 달리던 차는 브두굴 지역에 들어선다. 브두굴의 브라딴 사원(Pura Ulun Danu Bratan) 방향으로 가던 차는 사원 바로 앞에서 좌회전하여 아치로 장식된 브두굴 마을 입구로 향했다.

브두굴 과일시장 뒤편으로 들어선 차는 약 2km 정도 산 안쪽으로 더 들어갔다. 마을이 끝나는 곳에 정갈하게 정돈된 잔디와 거대 수목으로 둘러싸인 공간이 눈앞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발리 사람들은 이 식물원에서 추억을 남긴다.
▲ 식물원 사진 발리 사람들은 이 식물원에서 추억을 남긴다.
ⓒ 노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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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관광객이 밀림의 거대나무를 이용한 밧줄타기를 즐기고 있다.
▲ 트리탑 어드벤쳐 한 관광객이 밀림의 거대나무를 이용한 밧줄타기를 즐기고 있다.
ⓒ 노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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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식물원 입구에 들어선 후 차에서 내리면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인도네시아를 무시하는 것은 아니지만, 인도네시아라고 믿기지 않을 정도로 식물원이 잘 정돈되고 세밀하게 가꾸어져 있기 때문이었다.

마치 유럽 도시 외곽의 한 공원에 나와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여기가 해변의 뜨거운 태양으로 유명한 발리인지 헷갈릴 정도이다. 나는 스펙터클한 자연환경을 가지고 있는 발리에서 열대의 자연환경과는 또 다른 모습을 찾았다.

이 브두굴 식물원(Bedugul Botanical Garden)은 인도네시아어로 '케분 라야(Kebun Raya)'라고 부르는데, 이는 '큰 정원'이라는 뜻이다. 발리 내 유일한 식물원인 이곳은 1959년에 열대의 정원을 제대로 느껴볼 수 있도록 만들었다. 다양한 종류의 수목과 화초들을 지속적으로 수집하여 심은 결과 지금은 155만㎡에 달하는 숲 속의 드넓은 열대 수목원으로 발전하였다.

인도네시아 전역을 포함하여 전세계에서 수집한 무려 4500종에 달하는 화초와 수목이 있으니 천천히 걸어 다니면서 수목원을 모두 구경하면 족히 3~4시간은 걸린다. 나는 차로 식물원 내부를 이동하면서 원하는 구역에서만 내려서 식물원을 감상하기로 했다.

차문을 열고 내리니 발리 남부에서 느끼던 후덥지근함은 사라지고 없다. 날씨도 쾌청하고 바람도 너무 시원해서 자연을 감상하며 여행하기에는 딱 좋은 초가을 날씨이다. 브두굴 지역은 발리 중북부 지역의 해발 1500m 고도의 산지에 호수가 함께 위치해 있어서 날씨가 쾌적하다. 발리에서 비교적 시원하다는 우붓(Ubud)보다도 훨씬 시원한 곳이 이 브두굴 지역이었다.

나와 아내는 차에서 내리자마자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아, 날씨가 너무 시원해! 발리에도 이렇게 시원한 곳이 있을 줄 몰랐네. 날씨가 딱 좋은데?"

그런데 함께 동행한 발리 친구, '아롬'은 춥다면서 긴팔 옷을 껴입는다.

"너무 추워요. 너무 춥지 않아요? 이 날씨가 시원하다고요?"

사람은 살아온 환경에 영향을 받는다. 사계절이 있고 엄동설한을 겪는 한국 사람들에게 이 정도 선선함은 쾌적하다고 표현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이 시원한 공기를 발리 사람들이 춥다고 느끼는 이유는 이 사람들의 신체가 더위에 익숙해있기 때문일 것이다. 휴양지인 발리에서도 한국 사람들이 몸을 쉬며 제대로 휴양할 수 있는 날씨가 브두굴의 날씨였다. 

원숭이들과 사투를 벌이는 거대한 악마상

식물원을 들어서자마자 여행자들을 압도하는 웅장한 석상이 눈앞을 가로막는다. 발리의 많은 현지인들이 거대석상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으며 추억을 남긴다. 힌두교의 대서사시인 '라마야나(Ramayana)'에 나오는 악마가 포악하게 원숭이들과 사투를 벌이고 있다.

쿰바카르나가 원숭이를 집어삼킬 듯이 노려보고 있다.
▲ 쿰바카르나 쿰바카르나가 원숭이를 집어삼킬 듯이 노려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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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의 왕 라바나(Ravana)는 우주의 질서를 지키는 비슈누(Vishnu) 신이 현신하여 태어난 라마(Rama) 왕자가 숲에서 악마들을 퇴치하자 화가 잔뜩 났지요. 라바나는 라마의 아내인 시타(Sita) 공주를 유괴하여 랑카(Lanka) 섬으로 들어갔어요. 시타가 유괴된 사실을 알고 시타를 찾아 나선 라마는 한 호숫가에서 자신에게서 도움을 받은 적이 있던 원숭이의 왕 수그리바(Sugriva)를 만나게 되었죠."
힌두교 악의 왕국의 거인인 쿰바카르나가 원숭이 군대와 사투를 벌이고 있다.
▲ 쿰바카르나 힌두교 악의 왕국의 거인인 쿰바카르나가 원숭이 군대와 사투를 벌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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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마의 거대한 석상을 유심히 보고 있는 나에게 아롬은 라마야나 대서사시 속의 신들과 그들의 신화를 알려주려고 애를 썼다. 대서사시에 등장하는 신들의 이름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 나에게 아롬의 설명은 계속 이어졌다.

"원숭이의 왕은 원숭이 부하들을 통해 시타의 행방을 찾아냈고, 라마는 원숭이 대군을 이끌고 랑카 섬까지 다리를 놓은 후 라바나의 성을 공격하였죠. 원숭이 군대와 악의 군대는 치열한 격전을 벌였는데 결국 라마가 라바나를 물리치고 시타를 되찾아 오게 되었어요. 라마는 시타와 함께 아요디야(Ayodhya)에 개선하여 왕이 되었습니다."

아롬의 설명을 듣고 거대석상을 다시 올려다보았다. 원숭이와 싸우고 있는 거대한 몸집의 주인공은 악의 왕 라바나의 동생, 쿰바카르나(Kumbakarna)였다. 쿰바카르나가 원숭이를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고 있고, 수많은 원숭이들은 시타를 구하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해 싸우고 있다. 산과 같은 쿰바카르나의 어깨, 배, 다리에 달라붙어 사투를 벌이고 있는 원숭이들의 고함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악의 화신은 마치 손으로 움켜 쥔 원숭이를 씹어 먹을 듯한 기세이다. 신화 속에서 쿰바카르나는 라마군의 원숭이 군대와 싸우면서 한 입에 100 마리씩 먹어치웠다고 한다. 여행지에서는 아는 만큼 보인다는 게 참으로 적절한 표현이다. 힌두교 대서사시의 광대함이 내 눈앞에서 펼쳐지는 듯 하다.

나는 석상에서 벗어나 식물원 안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식물원은 생각보다 아주 넓고 녹색의 향연이 펼쳐지는 아름다운 공원이었다. 마음과 몸이 상쾌해지는 이 공원은 발리인들에게 소풍이나 주말 데이트 장소로 인기가 아주 높은 곳이었다. 식물원을 광범위하게 덮고 있는 파란 잔디밭 곳곳에는 돗자리를 깔고 편안하게 도시락과 과일을 먹고 있는 현지인들이 보인다.

가족과 소풍 나온 모습이 사람의 가장 행복한 모습 중의 하나이다.
▲ 식물원 소풍 가족과 소풍 나온 모습이 사람의 가장 행복한 모습 중의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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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인장에 난초까지... 각양각색 식물들의 향연

식물원 안을 자세히 보니 외국의 여행자보다 발리인 가족들이 훨씬 더 많이 보인다. 현지인들에게 추억의 장소로 남을 만큼 식물원이 아름답기 때문이다. 함께 소풍 나온 한 가족의 모습을 보고 있으려니 인간의 가장 행복한 모습 중에 가족과 소풍 나온 모습이 가장 행복한 모습이라는 생각이 든다. 다음 여행에는 이 브두굴 식물원에 도시락을 싸들고 한번 와야겠다.

나는 아내와 차에서 내린 후 차에서 벗어나 한동안 식물원을 자유롭게 산책했다. 한가롭게 잔디밭을 걷는데 식물원 한쪽에 사람들이 몰려있고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아이들 체험활동에 적합한 '발리 트리탑 어드벤쳐 공원(Bali Treetop Adventure Park)'이 식물원 내부에 있었다. 어른들도 많이 이용하는 이 어드벤처 공원에는 한 무리의 중국인 관광객들이 모여 있다. 여러 중국인들이 나무 사이에 걸린 그물을 발로 밟고 밧줄타기를 하고 있다. 한 중국인 여자 관광객이 배에 와이어를 매고 소리를 지르며 이 나무에서 저 나무로 휙 날아가고 있었다.

아내와 함께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조금 걸었다. 맑은 햇살 아래 투명한 유리로 싸여진 선인장 온실이 눈에 들어왔다. 안으로 들어가 보니 며칠 전 제주도 여행을 갔다가 들렀던 한림식물원의 선인장 온실에 다시 들어온 것 같다. 발리나 제주도나 사막기후는 아니라서 외국의 선인장들을 수입하여 전시한다. 전세계의 사막지대에서 자라는 신기하게 생긴 선인장들만 모아 두었다. 제주에서 보았던 종류의 선인장 몇몇은 이곳에서도 보인다.

무더운 발리 남쪽에서는 선인장을 비만 피하면서 기르면 되지만 이곳 브두굴은 날씨가 선선해서 선인장을 온실에서만 기를 수 있을 것이다. 전세계에서 수집한 104종의 선인장 중에서도 아메리카가 원산지인 선인장은 거대한 몸집이 온실 전체를 압도하고 있다. 건조하고 수분이 적은 사막에서 살아가기 위해 퉁퉁한 줄기와 잎에 수분을 저장하고 있는 모양이 새삼 신비롭다.

세계 각국의 기묘한 선인장들이 모두 모여 있다.
▲ 선인장 온실 세계 각국의 기묘한 선인장들이 모두 모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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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네시아에서도 난초를 알뜰히 키운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 난초 정원 인도네시아에서도 난초를 알뜰히 키운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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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두굴 식물원에는 주제에 따라 다양한 식물을 구경할 수 있도록 여러 개의 전시관이 따로 있다. 우리는 이끼 낀 분수가 옛 저택의 정원을 연상케 하는 한 전시관 안으로 들어가 보았다. 발리, 자바(Java), 술라웨시(Sulawesi) 등지에서 모은 난초를 320종이나 전시하고 있는 난초정원이었다. 이 여린 난을 동북아시아에서만 즐기는 줄 알았는데, 발리에서도 난을 소중히 기르고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이 정원 속의 난초들은 난초의 종류가 이렇게도 많다며 서로 경연을 하는 것 같다.

광활한 호수를 배경으로 뛰노는 아이들

하늘에는 푸른 하늘이 반이고 뭉게구름이 반이다. 식물원 뒷산에 걸린 구름이 서서히 움직이고 있다. 걷다가 다리가 지치면 차를 이용해야할 정도로 넓은 식물원이었다. 우리는 차를 타고 언덕을 넘어 호수가 보이는 산마루로 이동했다.

화산이 폭발해 생긴 호수의 정경이 포근하기만 하다.
▲ 브라딴 호수 화산이 폭발해 생긴 호수의 정경이 포근하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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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변 잔디밭에서 아이들이 엄마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 브라딴 호수의 아이들 호수변 잔디밭에서 아이들이 엄마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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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리에 있는 4개의 큰 호수 중 3개가 브두굴 주변에 몰려 있는데, 식물원의 높은 언덕을 넘어서면 눈 아래에 브라딴 호수(Danau Beratan)의 시원하고 광활한 정경이 아스라이 펼쳐진다. 화산이 터지면서 만들어진 깊은 호수는 신비 속의 호수 그 자체이다. 멀리서 화산호수의 전경을 관조하는 것도 멋진 일이다.

호수를 바라보는 언덕은 시원하고 적당한 경사가 있어서 아이들이 뛰어놀기에 좋은 곳이다. 발리의 어린이들이 엄마와 함께 소풍을 나와 있다. 선글라스를 낀 발리의 젊은 엄마들은 벤치에 앉아 휴식을 취하며 호수와 아이들을 번갈아가며 보고 있다. 발리 아이들과 엄마들의 평화로운 풍경이다.

옆에서 아이들을 지켜보던 아롬이 발리의 어린이들은 다양한 체육활동을 우선 하는 학교활동을 하고 있다고 한다. 이 행복한 아이들을 보면서 나는 이토록 편안하게 뛰어놀지 못하는 우리나라의 아이들이 생각났다.

"우리나라와 발리, 어느 나라 아이들이 더 행복한 거지? 우리나라가 국민소득은 더 높지만 우리나라 아이들은 학원 다니기에 바쁘니... 이 광대한 자연에서 마음껏 뛰어노는 발리의 아이들이 더 행복한 것 같아. 나 어릴 적만 해도 친구들과 학교 운동장에서 마음껏 뛰어 놀았는데 말이야. 지금 우리나라 아이들은 힘든 경쟁을 어려서부터 시작하고 있으니 너무 애처로워."

나와 아내는 화산이 남긴 거대한 호수를 바라보며 잔디밭에 앉았다. 푸른 호수와 초록 나무가 나의 감성을 가득 자극하고 있었다. 브라딴 호수 위로 시원한 남국의 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

덧붙이는 글 | 오마이뉴스에만 송고합니다. 제 블로그인 http://blog.naver.com/prowriter에 지금까지의 추억이 담긴 세계 여행기 300 여 편이 있습니다.



태그:#인도네시아 여행, #발리, #브두굴, #식물원, #브라딴 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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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와 외국을 여행하면서 생기는 한 지역에 대한 궁금증을 해소하는 지식을 공유하고자 하며, 한 지역에 나타난 사회/문화 현상의 이면을 파헤쳐보고자 기자회원으로 가입합니다. 저는 세계 50개국의 문화유산을 답사하였고, '우리는 지금 베트남/캄보디아/라오스로 간다(민서출판사)'를 출간하였으며, 근무 중인 회사의 사보에 10년 동안 세계기행을 연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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