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시험을 보게 된 건 우연이었다. 내가 뭐 학력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도 아니고 학력이 고등학교 중퇴라는 것 때문에 불편한 것도 없었다. 20년 동안 시내버스 운전하면서 학교를 안 다녀서 남한테 꿀리는 것도 없었다. 오히려 친일 역사관을 지닌 대학 교수나 박사라는 자들을 보면서 '배운 놈들이 어찌 저런 역사관을 가지고 있을까' 하고 우습게 보기도 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작은책>(내가 발행인으로서 펴내고 있는 잡지다) 일꾼과 대화 도중에 방송통신대(방통대)에 관한 이야기가 나왔다.

"방통대 문화교양학과가 재미있대요. 좋은 교수들도 많고 또 답사 여행도 다닌대요."

맞다. <작은책> 독자들 가운데 친한 사람들이 방통대 다닌 사람들이 많았다. 내가 이 나이에 대졸 학력이 필요한 것도 아니고 박사학위 딸 것도 아니지만 문화교양학과가 재미있다고 하니 '급' 마음이 끌렸다. 그런데 난 고등학교 중퇴라 갈 자격이 안 된다.

"검정고시 한 번 봐봐요."
"그래 볼까? 어디 검정고시 기출문제 나온 거 없나? 문제나 한 번 풀어볼까?"

인터넷에서 기출문제를 내려받아서 풀어보니 커트라인인 평균 60점은 넘게 나온다. 그래, 시험 한 번 볼까? 내가 중학교 졸업 검정고시를 봤을 때가 1974년이다. 벌써 40년이 지났다. 그 뒤로 교과서는 한 번도 들춰보지 않았다. 방통대를 가려고 쓸데없는 문제를 풀어봐야 한다는 게 마음에 내키지 않았지만 한번 해보기로 했다. 잘 보면 내년에 방통대를 갈 수 있겠지. 시험 날짜는 8월 6일. 접수는 6월 23일부터 27일까지였다. 접수 날짜만 기다렸다.

지난 6월 23일 첫날 접수하러 용산공고에 갔다. 어린 학생들이 많았지만 드문드문 나 같은 '늙은'이들도 있었다. 국어, 수학 등 필수 과목이 여섯이구나. 그런데 선택과목은 뭘 하지? 대개 가정과학을 한다는데 난 '공업기술'과 '도덕'을 택했다. 내가 도덕적인 인간이 아닌데 '도덕' 점수가 잘 나올까? 헌책방에 들러 기출문제집을 샀다. 참 싸네. 모두 만 원이다.

"방통대가 재밌대요"... 나도 검정고시 한 번 볼까

1974년 중학교 졸업 검정고시 합격 증명서
 1974년 중학교 졸업 검정고시 합격 증명서
ⓒ 안건모

관련사진보기


기출문제집을 보니 옛날에 느낀 것과는 다르다. 어렵다고 생각했는데 문제를 풀어보면 영어가 60점 이상, 국어, 도덕은 80점 이상 나온다. 공부 따로 안 해도 되겠군. 하지만 날짜가 다가올수록 은근히 걱정이 됐다. 몰래 봐야 하는데, 입이 싸서 보는 사람마다 검정고시를 본다고 소문을 냈다. 그래도 아내한테는 말을 안 했는데, 아내가 집에 놔둔 검정고시 문제집을 보고는 알아버렸다. '떨어지면 어떻게 하지?' 하는 걱정이 은근히 들었다.

7월 말, 2009년부터 2013년까지 나온 기출문제집을 한 권 더 샀다. 책이 두꺼워 연도별로 책을 찢어서 호치키스로 박아 갖고 다녔다. 주로 문제집을 풀어본 장소는 지하철이었다. 옆 사람들이 힐끗힐끗 보면, '그 나이에 검정고시 보려고 하는구나' 하고 눈치 주는 것 같은데 그런 것쯤 무시했다. '내 나이가 어때서?' 참고로 올해 내 나이 쉰일곱이다.

시험 5일 전, 8월 1일은 해남 여행을 했다. 해남으로 귀농한 지인들을 만나 놀 생각이었다. 여행지에서 문제집을 본다고 갖고 갔지만 손에 잡은 건 술병이었다. 8월 4일 서울로 올라왔다. 그날 저녁에도 해남에서 같이 올라온 선배와 뒤풀이 술자리를 했다.

8월 5일, 으, 내일이 시험이다. 아무래도 수학 몇 문제는 맞춰야겠다는 생각에 올해 스물세 살인, 지인의 딸을 불러 세 시간 동안 문제를 풀어봤다. 집합과 이차방정식은 대충 이해가 됐다. 그런데 함수는 전혀 모르겠다. 싸인, 코싸인? 포기했다.

드디어 8월 6일, 시험 날이다. 지하철 디지털미디어역에서 상암중학교를 가는 버스를 탔다. 젊은이들이 많이 탔다. 상암중학교에서 내려 그쪽으로 가는 걸 보니 모두 시험을 보러 가는 듯하다. 검정고시 보는 아이들이 이렇게 많구나. 상암중학교 정문 쪽에서 웬 사람들이 이리저리 뛰면서 유인물을 나눠 주고 있다.

뭘까? 받아보니 '주부학교' 선전물이다. 학교를 다니지 못한 성인 여자들만 다닌다는 비인가 학교다. 그리고 학원에서 나온 젊은이들이 학원 선전용 유인물을 나눠 주고 있고 컴퓨터용 사인펜을 파는 할머니도 있다. 시험 보는 곳에서 볼 수 있는 흔한 풍경. '아, 나도 수험생이구나' 하는 게 이제야 피부로 와닿는다.

복소수, 부등식, 대칭이동... 이런 걸 왜 알아야 돼?

검정고시 과외 특강
 검정고시 과외 특강
ⓒ 안건모

관련사진보기


3층에 있는 교실을 찾아 자리에 앉았다. 한 반에 30명이다. 슥 훑어보니 전부 아이들인데 아주머니가 다섯이다. 나 같은 늙은이(?)들은 없네. 나보다 조금 아래 나이인 듯한 50대 초반 아주머니 세 분이 내 바로 옆줄에 있다. 드디어 시험 시간 임박. 방송이 나온다.

"핸드폰 가져온 사람은 배터리를 완전 분리해 가방 안에 넣어 맡기세요. 안 맡기면 핸드폰을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 불법 행위로 간주하겠습니다."

첫 시간, 국어. 25문제를 40분 만에 풀어야 한다. 그렇게 어렵지는 않네. 고어 문제 말고는 별로 어려운 게 없다. 그런데 OMR 용지에 '똥그라미' 치는 게 어렵네. 옆으로 삐져나올까봐 손이 조금 떨린다. 젠장, 채점하기 쉽게 하려고 시험 보는 사람을 어렵게 하네. 이건 수험생을 위한 제도가 아냐. 푸는 시간보다 동그라미에 색칠하는 시간이 더 걸리는 것 같다.

그래도 20분 만에 다 풀고 멀뚱멀뚱 앉아 있었다. 먼저 문제를 다 풀어도 나갈 수는 없다. 담배를 피우고 싶은데 어디서 피우나. 국어 시간이 끝났다. 다음 시험 시작 10분 전에 입실해야 하니 시간이 별로 없다. 참자.

두 번째, 수학 시간. 풀 만한 문제가 몇 개 보인다. 집합 문제 한두 개는 알겠다. 복소수, 부등식, 대칭 이동, 함수, 부채꼴의 중심각의 크기는? 이런 문제들은 모르겠다. 대학을 가는데 이런 걸 왜 알아야 할까? 이걸 배워서 뭘 하지? 이런 건 수학을 전공할 사람들만 선택 과목으로 시험 봐도 괜찮은 거 아냐? 어차피 모르는 걸 붙잡고 씨름해도 소용없겠지. 20분 만에 답을 써놓고 쉬었다. 아, 담배를 피워야 하는데.

띵똥땡똥! 끝나는 종이 울리고 밖으로 나가봤다. 헐~ 고등학생 정도나 스무 살 안팎 되는 아이들이 남녀 할 것 없이 학교 정문 안쪽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다. 어, 학교 안에서는 금연이라고 써 있는데? 요즘 아이들은 정말 배짱 좋다. 나는 정문을 나가서 한 대 피웠다. 음, 이 맛이야. 담배 한 대 피우니 벌써 다음 시험 시간이 다 됐다.

영어는 몰라도 '눈치'로 푼다

고등학교 졸업 검정고시 수험표
 고등학교 졸업 검정고시 수험표
ⓒ 안건모

관련사진보기


영어 시간. 첫 문제, '밑줄 친 부분의 뜻으로 알맞은 것은?'. 영어 낱말의 뜻을 묻는 문제다.문장을 보니 줄친 부분 'charactor'의 뜻은 모르겠는데 'He'가 나오고 'man'과 'good'이 나온다. 보기가 '계획', '모험', '발전', '성격'. 그러면 '그 사람의 좋은 ~'이면 답은 '성격'밖에 없다. 4번 찍자.

문제. 유형은 대개 이렇다. '대화가 이루어지는 곳은?', '대화에서 두 사람의 관계로 알맞은 것은?', '대화의 주제로 알맞은 것은?' 이런 문제들이 많다. 이런 건 쉽다. 이를테면 어떤 대화 가운데 'phone', 'problem', 'buttons', 'order' 이런 것들이 나오면 답은 '전화기 고장'이다. '전화기 분실', '전화기 광고', '전화기 요금 미납'은 아닐 거란 말이다.

20분 만에 답을 다 적고 둘레를 훔쳐봤다. 내 옆줄에 있는 아주머니 해답지가 보인다. 아무 것도 적지 않았다. 가만 보니 시험지에 답을 표시해 놓고 5분 전부터 OMR 용지에 색칠을 한다. 그런데 3분쯤 남았는데 그때까지도 답을 적지 않고 있다. 2분 전. 어떻게 하려고 그러지? 앗, 드디어 답을 적는다. 그런데 가만 보니 답을 사선으로 찍고 있다. 1, 2, 3, 4, 3, 2, 1, 2…. 웃음도 나오고 한편으론 안타깝기도 하다. 나랑 맞는 답이 하나도 없다.

점심시간 뒤에 다시 과학 시간. 이번 시험부터는 시간이 30분밖에 없다. 어려운 건 아무리 생각해도 모른다. 대충 10분 만에 풀고 시간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그런데 2분 남겨 놓고 답안지를 보니 사인펜 자국이 조금 묻어 있다. 손을 들어 감독관을 불렀다.

"이거 괜찮죠?"

"안 돼요. 안 돼. 다시 하셔야 돼요" 하면서 얼른 다른 답안 용지를 준다.

"어, 시간 괜찮을까요?"
"그래도 하는 데까지 해보세요."

1분 남았다. 이름 적고, 번호 적고, 번호 표시하고, 답안에 다시 동그라미에 까만색 칠을 다시 했다. "띵똥땡똥!" 휴, 겨우 끝냈다.

사법고시도 아닌 검정고시 합격, 이렇게 기쁠 수가

고등학교 졸업 검정고시 가채점 답안지
 고등학교 졸업 검정고시 가채점 답안지
ⓒ 안건모

관련사진보기


도덕과 국사 시간을 끝으로 드디어 시험이 끝났다. 나가는데 입구에서 한 검정고시 학원에서 시험문제 정답을 알려주는 유인물을 나눠주고 있다. 정말 빠르다. 나도 답안지 한 장을 얻었다. 비가 온다.

버스를 타고 답안지를 보니 맨 마지막에 본 국사 시험 문제 답만 빼고 다 있었다. 자리에 앉아 대조해봤다. 두근두근. 과연 몇 점이나 맞았을까? 합격일까? 국어 88점. 수학 50점. 영어 72점. 어, 수학하고 영어가 웬일로 이렇게 많이 맞았지? 사회 72점, 과학 88점, 도덕 96점. 으, 도덕적인 인간이 아닌데 웬일로 이렇게 잘 맞았어? 공업 88점. 마지막 국사만 50점 넘으면 합격 아냐? 아싸, 합격이다. 버스 안에서 혼자 웃음이 나왔다.

야, 합격이야! 도대체 어떻게 이럴 수 있는 거지? 40년 전에 고등학교 검정고시를 보려고 공부하다가 포기했었다. 40년이 지난 지금, 따로 특별히 공부를 안 했는데 합격했어. 아, 이젠 말할 수 있다. '공부가 가장 쉬웠어요.' 이거 학생들한테 돌 맞을 소리지? 이런 우스갯소리를 진지하게 듣는 사람은 없겠지? 사법고시 합격도 아니고 검정고시 합격한 걸 가지고 이렇게 좋아하는 사람은 아마 나뿐일 거다.

그날 오후 6시에 서울시교육청 누리집에 올라온 정답과 다시 맞춰봤다. 마지막에 본 국사는 64점이었다. 평균 77점. 분명 합격이다. 내가 검정고시에 합격했다는 말을 들은 사람들 반응은 여러 가지다.

"아니, 그 나이에 검정고시는 뭐 하러 봐?"
"그 나이에 대학은 뭐 하러 가?"

글쎄, 내년에 방통대를 한번 가봐야겠다. 그동안 나는 '고퇴'(고등학교 중퇴)였다. 내가 고퇴라고 하면 아는 이가 "중졸이지" 하고 놀렸다. 이젠 방통대 등록하면 졸업을 하건 안 하건 '대재'(대학교 재학)다. 대학생이 되면 뭘 할까? <작은책> 일꾼 중엔 학생운동을 하고 싶어서 대학을 간 사람도 있는데 나도 학생운동을 해볼까? 아, 미팅이란 것도 한번 해봤으면 좋겠다. 방통대엔 그런 거 없나? 음, 졸업을 안 하고 그냥 평생 '대재'로 남을까? 흐흐.


태그:#검정고시
댓글4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