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고령읍 뒷산인 주산 일대를 뒤덮고 있는 대가야 고분군의 공식 이름은 '지산동 고분군'이다. 그렇게 명명된 이유는 이곳 이외에도 대가야의 고분군이 산재해 있기 때문.(왼쪽 사진) 내려다본 지산동 고분군. 이곳 고분군은 올라가면서 볼 때와 내려가면서 보는 경관이 아주 다르기 때문에 꼭 곳곳에서 사진을 찍으며 경치를 감상해야 한다. (오른쪽 사진) 대가야 고분군의 모습을 전형적으로 보여주는 사진. 답사자들께서는 꼭 이 사진 한 장을 남기시라!
▲ 대가야 고분군(사적 79호) 고령읍 뒷산인 주산 일대를 뒤덮고 있는 대가야 고분군의 공식 이름은 '지산동 고분군'이다. 그렇게 명명된 이유는 이곳 이외에도 대가야의 고분군이 산재해 있기 때문.(왼쪽 사진) 내려다본 지산동 고분군. 이곳 고분군은 올라가면서 볼 때와 내려가면서 보는 경관이 아주 다르기 때문에 꼭 곳곳에서 사진을 찍으며 경치를 감상해야 한다. (오른쪽 사진) 대가야 고분군의 모습을 전형적으로 보여주는 사진. 답사자들께서는 꼭 이 사진 한 장을 남기시라!
ⓒ 정만진

관련사진보기


'신비의 왕국'이라는 이름을 얻은 나라, 대가야. <삼국사기>에 시조 이진아시왕(伊珍阿豉王)부터 마지막 도설지왕(道設智王)까지 16대에 걸쳐 무려 520년 동안이나 존속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도 역사의 대부분이 알려지지 않고 있는 나라. 순장의 흔적, 엄청난 규모와 개체수의 고분군으로 후대인들의 궁금증을 불러 일으키는 나라.

가야 건국신화
가야연맹은 전기와 후기의 맹주가 다르다. 전기는 김해의 금관가야가 맹주이고, 광개토대왕의 친정 이후 금관가야가 급격히 쇠락한 후인 후기는 대가야가 맹주가 된다. 그래서 가야 건국신화는 두 가지가 전한다.

가야산에 살던 산신 정견모주와 하늘에서 내려온 천신 이비가 사이에 두 아이를 낳는다. 큰아들은 대가야의 시조 이진아시왕이 되고, 둘째 아들은 금관가야의 시조인 수로왕이 된다. 이는 최치원의 <석이정전>의 이야기를 인용한 조선 초 <동국여지승람>에 실려 있는 대가야 중심의 건국신화다.

하늘에서 6개의 커다란 알이 내려온다. 가장 먼저 깨어난 동자가 금관가야의 수로왕이 되고 나머지 5개의 알에서 나온 동자들은 5가야의 왕이 된다. 이는 고려 중기 <가락국기> 내용을 일연이 <삼국유사>에 인용해 놓은 금관가야 중심의 건국신화다.
대가야의 유적지는 경북 고령이다. 광개토대왕의 정벌 이후 급격히 무너진 금관가야를 대신하여 후기 가야연맹의 맹주였던 대가야는 고령읍 뒷산인 주산 능선 등에 엄청난 고분군을 남기고 있다. 사적 79호.

평지나 산속 아닌 능선의 거대 고분군

지산동 고분군은 주산의 '능선'에 있다. 이 점은 대가야 고분군의 특징 중 한 가지다. 경주에 있는 대부분 거대 왕릉들이 평지에 자리잡고 있고, 부여와 공주의 고분들도 산중턱에 모셔져 있는 데 견주면 아주 색다르다.

대가야의 고분들이 왜 산 능선에 자리잡고 있는 것일까? 침범해온 외적들이 멀리서 바라보았을 때에도 대뜸 눈에 들어오도록 하려는 목적에서 그렇게 봉분을 축조했을 것이라는 추측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외적들에게 두려움을 안겨주어 기선을 제압하려는 의도였다는 것이다.

가야대학교 기숙사 뒷산을 보면 능선에 볼록볼록한 봉분이 잘 드러난다. 이렇게 지산동 고분군(사적 79호)은 평지나 산 중턱이 아닌 능선에 군집을 이루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산 능선에 고분군이 드러나 보이도록 사진을 찍어보는 것, 대가야고분군 답사에서 놓쳐서는 안 되는 필수 체험이다.
 가야대학교 기숙사 뒷산을 보면 능선에 볼록볼록한 봉분이 잘 드러난다. 이렇게 지산동 고분군(사적 79호)은 평지나 산 중턱이 아닌 능선에 군집을 이루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산 능선에 고분군이 드러나 보이도록 사진을 찍어보는 것, 대가야고분군 답사에서 놓쳐서는 안 되는 필수 체험이다.
ⓒ 정만진

관련사진보기

하지만 대가야는 '신비의 왕국'답게 멸망의 역사도 신비 그 자체이다. 안개를 틈타 기습한 10대 소년 사다함의 신라군 선봉대에 하루 아침에 멸망했다고 전해지기 때문이다.

산 능선에 그토록 웅장한 고분군을 쌓았는데, 안개에 가려 사다함은 그것들을 미처 보지 못했다는 것인가?

왕릉전시관에서 순장의 흔적을 둘러보고

대가야 고분군의 특징 중 하나인 순장 흔적은 대가야박물관 뒤편의 대가야왕릉전시관에서 확인할 수 있다.

대형 분묘 형태의 외관 덕분에 답사자들의 눈길을 사로잡는 대가야왕릉전시관은 무덤의 속 구조를 생생하게 보여준다는 장점을 자랑한다. 당연히 답사자들은 왕릉전시관부터 관람한 후 주산 능선을 따라가며 대가야의 고분들을 살펴보는 것이 좋다.

왕릉전시관이 보이는 풍경. 멀리 보이는 산 꼭대기가 주산성(사적 61호) 자리.
 왕릉전시관이 보이는 풍경. 멀리 보이는 산 꼭대기가 주산성(사적 61호) 자리.
ⓒ 정만진

관련사진보기

이곳 고분군을 답사하는 또 다른 방법은 군청 뒤쪽으로 난 평탄한 산길을 따라 걷는 것인데, 노약자들에게 특별히 권장할 만하다.

주산성(사적 61호) 흔적이 곳곳에 보이는 이 길은 경사가 거의 없어 누구나 오를 수 있는데다, 그늘이 우거져 있어서 더위와 피로도 예방할 수 있다. 게다가 고분군 가장 높은 지점에서 왕릉전시관으로 천천히 내려가며 힘들지 않게 대가야의 자취를 감상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

올라가며 보든 내려가며 보든 산이 낮아 등산을 한 듯한 기분은 별로 느껴지지 않는다. 좀 더 걷고 싶은 이들에게 권할 만한 길은 따로 있다. 고아동 벽화고분(사적 165호)에서부터 출발하는 방법이다. 문이 굳게 답혀 있어 고분 내의 벽화는 볼 수 없지만, 이 길을 따라 주산성 정상까지 걸으면 충분히 산을 탄 듯한 쾌감을 맛볼 수 있다.

사적 165호인 고아동 벽화 고분. 평상시에는 문이 잠겨 있어 안을 볼 수 없다. 고분 오른쪽으로 오르면 한찬을 걸어 왕릉전시관이 나오고, 거기서 계속 오르면 주산성까지 닿는다. 이렇게 걸으면 주산을 등산하는 가장 먼 길을 밟게 된다.
 사적 165호인 고아동 벽화 고분. 평상시에는 문이 잠겨 있어 안을 볼 수 없다. 고분 오른쪽으로 오르면 한찬을 걸어 왕릉전시관이 나오고, 거기서 계속 오르면 주산성까지 닿는다. 이렇게 걸으면 주산을 등산하는 가장 먼 길을 밟게 된다.
ⓒ 정만진

관련사진보기

대가야박물관, 우륵박물관 꼭 답사해야

고령읍을 찾았으면 대가야박물관과 우륵박물관은 꼭 둘러보아야 한다. 대가야는 '신비의 왕국'답게 주산의 고분군을 제외하면 유적도 별로 남아 있지 않기 때문에 박물관을 둘러보아야 제대로 그 역사를 알 수 있다. 우륵박물관은 고령읍 쾌빈리 162번지에 있다. 쾌빈리는 신라에 망명한 우륵이 가야금과 음악을 연구했던 곳이다.

그런가 하면, 읍내 중심부의 연조리 128-1번지 고령초등학교 교정에도 특이한 답사지가 있다. 우물이 하나 있는데, 대가야의 왕이 사용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래서 우물의 이름이 어정(御井)이다.

백제 임금의 우물

팔각정(문화재자료 103호)
 팔각정(문화재자료 103호)
ⓒ 정만진

관련사진보기

대가야 임금의 우물로 추정되는 유적이 고령초등학교 교내에 있는 것처럼, 백제 왕궁의 우물로 추정되는 유적도 부여여자고등학교 교정에 있다. 문화재자료 103호인 이 우물의 이름은 팔각정. 이름이 그렇게 붙여진 데에는 길게 다듬은 돌로 팔각의 우물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곳은 주변에서 백제의 고급문화를 말해주는 유물들이 출토되어 왕궁터로 추정할 수 있는 단서가 되었다. 또 우물 주변에서 잘 다듬은 백제 시대의 주춧돌과 집 자리에 썼던 판석들이 나왔고, 백제의 도로 유적 및 연못 자리도 발굴되어 백제 이래 중요 관청 건물이 있던 자리로 확인되었다. 실제로 조선 대에도 이곳은 부여현의 관청 건물 소재지였다.



태그:#대가야, #주산고분군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