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김봉준 작. 이소선 여사 추모 그림
▲ 위대한 어머니 김봉준 작. 이소선 여사 추모 그림
ⓒ 김봉준

관련사진보기


이소선은 밤새도록 울면서 기도했다. 날이 새자 집으로 돌아왔다.

"그래, 하나님이 고기 준다고 그럽디까?"

전태일 친구들이 심드렁하게 물었다.

"주겠지, 그렇게 울면서 달라고 했는데 왜 안 주시겠냐."

이소선은 이들을 달래서 사무실로 출근시켰다. 그날 낮에도 여느 때처럼 시장에서 장사를 마치고 노조사무실로 갔다.

"어머니, 어떤 곱게 생긴 아주머니들이 어머니를 만나러 집으로 갔다가 어머니가 안 계셔서 이리로 왔었어요. 조금 있다가 오실지 모른다고 했더니 저 밑에 대명다방에서 기다린다고 하면서 오시면 대명다방으로 전화하라고 전화번호를 주고 갔어요."

이소선은 이 말을 듣고 무슨 일인가 하고 전화를 했다.

"우리가 올라갈까요?"

고운 목소리가 들렸다. 이소선은 생판 처음 듣는 목소리였다. 이리로 올라오라고 하고 나서 전화를 끊었다. 조금 있으니까 여자 5명이 들어왔다. 아주 인텔리하게 보이는 여자들이었다.

"아이고 태일이 엄마, 이렇게 고생을 하다니. 젊은이들, 당신들은 태일이가 죽고 나서 그 뜻을 이루기 위해 고생들을 하는데, 우리는 지식인입네 하면서 공부만 하고 있었다니 정말 미안하구려."

이소선을 붙들고 백년지기처럼 악수를 하고 간부들 손목을 잡는다.

"위대한 뜻을 가지고 있는 당신들이야말로 정말 훌륭한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이건 또 무슨 엉뚱한 사람들인가 하고 멀뚱멀뚱 쳐다보기만 했다.

"태일이 어머니, 잠깐 나가서 얘기를 좀 했으면 하는데요."

그들은 인사치레가 끝나자 이소선의 소매를 붙들었다. 이소선은 영문을 몰랐지만 나쁜 사람들은 아니구나 하는 생각에 그들을 따라 나섰다. 여자들은 이소선을 데리고 식당으로 들어갔다. 식사를 함께 하면서 애기를 하자는 것이었다. 이소선은 차마 자기 혼자서만 그분들과 밥을 먹을 수가 없었다.

"성의는 고맙지만 나 혼자서만 먹을 수가 없습니다. 쟤네들도 밥을 안 먹고 있는데 차라리 나도 안 먹겠어요."

이소선은 간부들을 생각하고 여자들한테 미안하지만 그냥 사무실로 올라왔다. 그분들도 이내 이소선의 뒤를 따라 오더니 사무실에 있는 사람들이 몇 명이냐고 물었다.

"아홉 명은 될 겁니다"하고 이소선이 대답했다.

"그러면 어머니까지 열 명이구먼. 우리가 내려가서 준비를 해놓고 있을 테니깐 전화하면 식당으로 내려오세요. 금방 오셔야 합니다."

그들은 다시 오던 걸음을 돌려 식당으로 갔다.

"우리는 안 가도 되니까 어머니는 저녁 드시고 오세요."

노조 간부들이 이소선을 밀어내면서 한사코 식당으로 가라고 했다.

"너희들이 안 가면 나도 안 간다."

이소선은 딱 부러지게 말하고는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면 우리도 곧 내려갈 테니, 어머니가 먼저 내려가서 기다리세요."

이소선은 조합 간부들의 그 말을 듣고서야 계단을 내려왔다.

노동조합 사무실 아래에는 불고기 집이 많이 있었다. 이들은 가까운 불고기집으로 들어갔다. 노조 간부들하고 들어가니 그분들이 기다리고 있었는지 반갑게 맞아들였다. 장정들이 자리에 앉으니 방이 꽉 찬 느낌이었다. 지식인들이라고 자신들을 소개했던 여자들은 고기를 주문하고 방석까지 집어주었다.

쇠판에 얹은 고기가 지글거리며 익어간다. 방안 가득히 고기 굽는 냄새가 코를 벌렁거리게 만들었다. 조합간부들은 침을 꿀꺽 삼키며 젓가락을 집어 든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젓가락을 움직이기 시작하자 쟁반에 있던 고기가 금세 바닥이 났다. 여자 손님들이 고기가 없어지기가 무섭게 계속해서 주문을 했다. 모두들 별 말도 없이 고기 먹는 데만 온 정신이 팔려 있었다. 잠깐 사이에 6인분이나 되는 고기를 한 사람씩 먹어 치웠다.

그때서야 밥을 먹으면서 이야기를 할 수 있었다. 그 손님들은 조합 간부들이 먹는 것을 보면서 그렇게 즐거워할 수가 없었다.

그 손님들은 이우정, 윤종호, 이효재 그런 분들로서 나중에 알고 보니 대학교수들이었다. 고기를 먹게 된 인연으로 그들을 만나게 되었다.

"청년, 한 번 일어서보게."

윤종호 교수가 밥을 다 먹은 신진철한테 손짓을 했다.

"왜요? 내 밑에 뭐가 있어요?"

신진철이 고개를 두리번거린다.

"아니야. 갑자기 먹으면 위가 나빠질까봐 그러는 게야."

윤종호 교수는 맘씨 좋은 아줌마처럼 신진철을 대했다.

"거뜬합니다."

신진철이 헤벌쭉 웃었다.

"그래? 소주도 한 잔 할란가?"

윤 교수는 흡족한 미소를 띠었다.

"선생님, 얘들한테 소주는 안 됩니다. 아직 근무 중이라서······."

이소선은 실례를 무릅쓰고 나서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어머니, 모처럼 고기를 먹었는데 소주 딱 한 잔만 먹고 우리 사무실에 가만히 앉아 있을게요."

간부들이 모두 이소선의 얼굴을 쳐다보고 사정을 했다. 근무 중에는 절대로 술을 먹지 말라고 그간 신신당부를 해왔었다. 간부들 얼굴을 쳐다보니 굳었던 이소선의 마음이 스르르 녹아내렸다. 그는 고개를 끄덕거려 주었다.

한참 풍성한 저녁자리가 무르익자 이렇게 저렇게 해서 간부들이 굶게 되었다는 말을 하게 되었다.

"아유, 그래요? 다른 것은 사지 말고 꼭 쌀을 사서 밥을 해먹고 용기를 가지고 살아가세요. 우리도 계속 관심을 가지고 또 많은 사람들이 그럴 것이니 용기를 잃지 말고 열심히들 하세요. 정말 부끄럽군요. 이런 실정인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그들은 쌀 한 가마 살 돈을 주고 가면서 간부들 손목을 일일이 잡으며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 젊은 장정 한 사람당 6인분씩의 고기를 먹었고, 쌀 한 가마니 값이나 주고 갔으니 가지고 온 돈을 몽땅 주고 간 셈이었다. 이소선은 참으로 그들이 고마웠다.

이소선은 진정으로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돌아왔다.

"참, 하나님도 귀가 밝구만."

간부 하나가 엉뚱한 말을 그에게 던졌다.

"건 또 무슨 말이야?"
"어머니가 어젯밤에 눈이 퉁퉁 붓도록 기도하고 오시더니만 저 사람들한테 고기 사주라고 명령을 했던 모양이죠?"

듣고 보니 그럴 듯한 말이었다.

"사람이 노력하면 안 되는 게 없어."
"어머니 우리 다시 열심히 할게요."

전태일 친구들이 이소선을 둘러싸고 힘차게 말했다. 그 일로 간부들은 용기를 얻게 되었다.

이소선은 이효재 선생, 이우정 선생, 윤종호 선생 같은 분들은 평생 잊지 못했다. 노동조합 못하겠다고 고기나 먹고 죽자는 판이었는데 어쩌면 그렇게 때를 잘 맞춰 찾아올 수 있단 말인가. 하나님이 기도를 들어서 그 마음을 움직였다는 것은 이들의 뜻이 결코 헛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이소선은 그때 얼마나 고마웠는지 두고두고 그 고마움을 잊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다. 간부들도 그때 일이 생각날 때면 "아! 그때 고기 사주신 선생님들" 하며 고마움을 느낀다.

고기에 밥까지 먹고, 거기다가 쌀을 한 가마 사다 놓으니 그런 부자가 이 세상에 어디 있겠는가!


태그:#이소선, #전태일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