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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부선은 1905년 1월 1일 전 구역을 개통했다. 서울역은 현대식 역사만이 아니라 옛날 모습도 보여주지만 2층 목조로 지어졌던 대구역의 초기 모습은 아무도 볼 수가 없다.
 경부선은 1905년 1월 1일 전 구역을 개통했다. 서울역은 현대식 역사만이 아니라 옛날 모습도 보여주지만 2층 목조로 지어졌던 대구역의 초기 모습은 아무도 볼 수가 없다.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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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가는 '1900년 전후에 유행한 서양 곡조의 우리나라 노래' 정도로 정의된다. 1905년에 경부선 철도가 개통된 사실에 맞춰 최남선이 지은 <경부철도가>도 당시 창가 중 하나이다. 영국 민요 <호밀밭을 걸으며>의 곡조에 붙여 애창되었던 이 노래는 우리나라 최초의 7.5조 노래로 알려져 있기도 하다. 

우렁탸게 토하난 긔뎍소리에
남대문을 등지고 떠나 나가서
발니 부난 바람의 형세 갓흐니
날개 가던 새라도 못 따르겟네

늘근이와 뎖은이 석겨 안졌고
우리네와 외국인 갓티 탓으나
내외 친소 다 갓티 익히 다니니
됴그마한 딴 세계 뎔로 일웟네

1절은 '우렁차게 기적소리를 토하며 남대문을 등지고 출발하여 바람처럼 기차가 달려가니 새보다도 빠르다'는 뜻이고, 2절은 '남녀노소,  내국인 외국인, 친한 사람 낯선 사람 모두 함께 타고 다니니 기차 안은 예전에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세상'이라는 의미이다. <경부철도가>는 신문물인 기차를 매개물로 활용, 신세계가 열린 풍경을 노래하고 있는 것이다.

대구 약전골목에 있는 한의약박물관. 한의약 체험장, 한의약 역사전시장 등으로 다양하게 꾸며진 내부가 일품이다. 대구 여행자는 꼭 찾아볼 만한 필수 답사지이다.
 대구 약전골목에 있는 한의약박물관. 한의약 체험장, 한의약 역사전시장 등으로 다양하게 꾸며진 내부가 일품이다. 대구 여행자는 꼭 찾아볼 만한 필수 답사지이다.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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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의 개통은 대구약령시의 발전에 큰 도움을 주었다. 1658년 개장되어 한국기네스위원회로부터 '가장 오래된 약령시' 인정을 받은 대구약령시는 처음에는 경상감영 객사 주변에 있었으나 경부선이 개통된 뒤인 1908년부터 현재의 자리로 옮겨졌다. 그리고 비약적인 발전을 이룩했다. 중국인들이 기차로 압록강을 건너 신의주, 서울을 거친 다음 대구까지 한약재를 사러 달려왔기 때문이다.

중국인들, 철도 타고 압록강 건너 대구로

1905년 이래 대구에 드나들던 중국인들은 그때부터 대구에 눌러 살기 시작했다. 당시 대구는 서울, 평양과 더불어 3대 도시였고, 전국 3대 시장의 한 곳인 서문시장을 거느리고 있었는데다, 거대한 한약시장과 철도역을 가진 대도시였으므로 충분히 화교들이 눈독을 들일 만했다.

지금도 화교 협회 건물, 화교 소학교, 전통을 자랑하는 중국음식점 영생덕 등이 건재하고 있지만, 당시에도 화교들의 주된 활동무대는 역시 종로, 북성로 등지였다. 그런데 화교협회 건물에는 1946년의 비극적인 콜레라 대전염 사건이 서려 있어 이곳을 찾는 답사자들을 늘 안타깝게 한다.

화교협회 건물은 본래 대구 최고의 부자 서병국이 1925년에 지었다. 서병국은 1946년 대구에 확산된 콜레라 전염 때 최초의 사망자가  되었다.
 화교협회 건물은 본래 대구 최고의 부자 서병국이 1925년에 지었다. 서병국은 1946년 대구에 확산된 콜레라 전염 때 최초의 사망자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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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 대구 인구는 20만 정도였다. 그런데 그 중 1만여 명이 콜레라에 감염됐고, 1200여 명이 그 탓에 죽었다. 시민 전체의 0.6%가 콜레라로 사망한 것이다. 이를 현재의 대구 인구 250만에 견주면, 어느 한 해의 봄부터 여름 사이에 무려 1만5000명이나 콜레라에 감염되어 목숨을 잃었다.

그 해 대구에서 콜레라로 생명을 잃은 첫 사망자의 이름은 서병국이었다. 그는 1925년 중국인 기술자들을 동원하여 1000여평의 땅에 자신의 저택을 짓기도 했던 사람으로, 당시 대구 최고의 부자였다. 그런데도 콜레라의 첫 희생자로 역사에 이름을 남겼다.

대구 화교소학교 교정의 장개석 흉상과 조형물
 대구 화교소학교 교정의 장개석 흉상과 조형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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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병국의 집은 현재 화교협회 건물로 사용되고 있다. 화교들은 또 협회 맞은편에 화교소학교를 열기도 했다. 이곳에는 '1930년대 대한민국 상해 임시정부를 적극 지원'(흉상 안내판의 표현)하였고, '1943년 카이로 회담 때 한국의 독립을 건의'했던 장개석의 흉상이 세워져 있다.

경부선철도 개통과 순종의 굴욕

경부선 철도가 대구에 남긴 역사의 한 가지로 결코 잊을 수 없는 일이 있으니 바로 순종의 대구 방문이다.

이토 히로부미는 조선의 실질적 지배자가 일본이라는 것을 세계에 인식시키기 위해 순종을 강제로 경부철도에 태워 한반도를 순회시켰다.

그래서 순종은 1909년 1월 12일 달성공원을 찾아 이토 히로부미와 나란히 신사참배를 하고 기념식수를 하는 치욕을 맛보아야 했다. 지금도 달성공원 중앙부에는 두 사람이 심은 것으로 추정되는 일본 향나무 두 그루가 좌우에 있다.

국가사적 62호인 달성은 풍납토성과 더불어 우리나라에 남은 가장 오래된 토성으로 인정되는 역사 유적이다. <삼국사기>에 261년(첨해왕 15) 축성된 것으로 기록된 달성은 1596년(선조 29) 경상감영이 설치되기도 했다.

일본은 우리 민족의 역사가 서린 달성을 1905년 공원으로 만들어버렸고, 신사까지 설치했다. 이는 물론 민족정신 말살정책의 일환이었다. 하지만 지금도 달성은 역사 유적으로서의 본래 면모를 되찾지 못한 채 여전히 일제가 조성한 공원 노릇을 하고 있다. <경부철도가>는 기차 운행 이후 '신세계가 절로 열렸네' 하고 노래했건만, 일제 잔재는 아직도 곳곳에 찌꺼기로 변함없이 남아 있는 것이다.

1909년 1월 12일 순종이 달성공원 신사를 방문한 광경(대구근대역사관 게시 사진)
 1909년 1월 12일 순종이 달성공원 신사를 방문한 광경(대구근대역사관 게시 사진)
ⓒ 대구근대역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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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화교, #약령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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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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