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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한 딸은 자신을 낳아 길러준 어머니를 '친정 어머니'라고 한다. 물론 3인칭으로 가리켜 부를 때다. 대면하거나 통화할 때는 당연히 '엄마'다. 예외가 없다. 그 딸과 결혼한 남자에게 아내의 친정 어머니는 장모(丈母)다. 아버지는 장인(丈人)이다.

장모를 빙모(聘母)라고도 한다. 장인의 다른 이름도 빙부(聘父)다. 빙장(聘丈)은 그 높임말이다. 빙장의 '장(丈)'은 '어른'이다. '빙장 어른'이라고 깍듯이 높여 부르는 건 말의 중복이다.

'빙(聘)'은 '찾아가다', '예를 갖추어 안부를 묻다'라는 뜻을 가진 한자말이다. 뜻풀이를 하자면 장모(빙모)와 장인(빙장)은 사위가 찾아가서 예를 갖추어 안부를 묻는 어른들이다. 사위를 '백년손님'이라고 했던 것도 그런 까닭에서였을 것이다. 그 말에는 영원하고 귀한 손님이므로 사위하고는 일정한 거리를 둘 수밖에 없는 사이라는 뜻도 담겨 있는 것이리라.

과거 이 땅의 장모들 대부분은 '부족한 여식'을 기꺼이 거두어 준 고마운 사람이라고 해서 사위를 어렵고 귀하게 여겼다. '사위가 찾아오면 씨암탉을 잡는다'는 속담도 그래서 나왔을 것이다. 어느 집을 막론하고 장모는 딸 내외가 친정 나들이를 오면 사위에게 음식을 정성껏 만들어 대접했다.

'친정 나들이'라는 말이 있었다. 지금은 잘 쓰지 않는 말이다. 아니 쓸 필요가 없어졌다. 그건 '출가외인'이라는 말이 정설로 여겨지던 시절 얘기다. 시집 간 딸이 어쩌다 한 번씩 친정집에 다녀가는 걸 일컫는 말이 '친정 나들이'였던 것이다. 

요즘 여자들은 친정집을 뻔질나게 드나든다. 친정 엄마하고 김장도 함께 담는다. 무시로 드나들면서 친정집 냉장고에서 반찬을 가져다 먹는 출가외인들이 흔하다. 하긴 친정 엄마가 대주는 반찬이 없으면 밥상조차 제대로 차릴 줄 모르는 새댁들도 부지기수니 말 다했다.    

바쁘게 살아가다 보니 삼시끼니를 제대로 챙겨먹는 집이 별로 많지 않다. 아침은 과일이나 빵조각으로 대충 때운다. 점심은 식당에서 해결한다. 집에서 차려먹는 반찬도 어지간한 건 조금씩 사다 먹는다. 아파트 상가마다 반찬가게 하나쯤은 다 있다. 마트나 백화점의 반찬 코너에도 없는 반찬이 없다. 맛도 좋다. 번창일로다.

동네 반찬가게 이름 중에는 '장모'나 '처가'와 직간접으로 관련된 것들이 많다. '장모님 손맛', '장모님 반찬가게', '친정엄마 손맛', '처갓집 반찬', '친정어머니의 정성' 같은 것들이다. 하다못해 출입문에라도 '장모님'을 적어 붙인다.

식당도 크게 다르지 않다. '장모님 곰탕', '장모님 김치찌개', '장모님 밥상', '처갓집 된장맛' 같이 적힌 간판을 자주 발견하게 된다. '처갓집 양념치킨'이나 '장모님 치킨'이라는 프렌차이즈 상표까지 있다. 그 옛날 어느 장모가 씨암탉을 잡아서 기름에 튀겨준 적 있었는지 모르겠다. 음식점 상호가 거두절미하고 '처갓집'인 곳도 여럿이다.

그 간판에 '장모'나 '처가'를 들이대는 것은 딸과 사위들의 보편적 정서를 자극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딸 내외에 대한 친정엄마나 장모의 정성이 담긴 음식이고 반찬이니 믿고 잡수시라는 얘기일 것이다. 아이들한테는 그게 외할머니의 손맛일 터이다. 요즘 젊은이들, 식당에 가면 주인아주머니한테 '이모'라고는 잘도 부르면서 '고모'를 찾는 이는 없다. 

어느 식당이나 반찬가게를 가도 '시어머니'나 '시댁'을 갖다 쓴 이름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대형 식품 제조업체 상표가 붙은 반찬 포장지에서도 '시어머니 손맛'이니 '시집 전통의 맛'이니 하는 말을 발견하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 까닭이야 불문가지다. 판매에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생각해 보자. 누군가의 친정은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시집 아닌가. 결혼한 딸과 아들이 있는 어머니는 장모이면서 동시에 시어머니다. 그런데 어째서 '시어머니'나 '시댁'이라는 이름은 맛있는 음식과 거리가 먼 것으로 생각하는 걸까. 

사위한테 음식을 해먹일 때는 온갖 정성을 다하니까 없던 음식 솜씨까지 저절로 생기고, 며느리한테는 대충 해서 먹이기라도 한다는 말인가. 정말 그런가? 시어머니는 며느리한테 음식 장만을 시켰으면 시켰지 손수 상을 차려서 대접하지는 않았으니까? 그것도 연탄 실은 삼륜차가 골목길을 누비던 시절까지로 효력이 만료되었다.

세상이 달라졌다. 직장에서 야근까지 하고 퇴근한 젊은 가장들은 온종일 집에서 애기 돌보느라 고단한 아내를 위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기저귀 갈고 젖병 물린다. 명절 때 친정 부모 선물이 시댁 것보다 가격이 적어도 두 배 차이가 난다는 건 이미 다 알려진 사실이다.
시골 병원에 진료 받으러 오는 노인들 보호자는 열에 아홉은 딸이고, 며느리는 하나 꼴이란다. 아들만 넷을 낳아 번듯하게 길러낸 어느 시어머니는 딸 하나 없는 게 이토록 아쉬울 줄 미처 몰랐다며 이따금 한숨을 쉰다. 줄줄이 딸을 낳으면 금메달, 섞어 낳으면 은·동메달, 아들만 낳으면 목메달이다.

이 땅의 사위들은 이제 더 이상 백년손님이 아니다. 아들과 함께 시댁을 찾아와 준 고마운 며느리들이 오히려 백년지객이고 귀하신 몸으로 대접받는다. 21세기 시어머니들, 며느리 눈치 보고 비위 맞추기 바쁘다. 모처럼 찾아와서 선심 쓰듯 하룻밤이라도 자고 가주면 그게 고마워서 새벽부터 일어나 밥상 차리는 게 요즘 시어머니들이다. 물론 다 그렇다는 건 아니다.

어쨌든 그림의 '장모님 설렁탕'이 '시어머니 설렁탕'으로 바뀔 날도 얼마 남지 않은 듯하다.

'장모님 설렁탕'이라고 적힌 어느 음식점 간판
 '장모님 설렁탕'이라고 적힌 어느 음식점 간판
ⓒ 송준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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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장모, #손맛, #시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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