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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갱이와 장갑. 저 도구가 없었더라면 고구마 밭의 잡초들과 씨름할 엄두도 내지 못했을 것이다.
▲ 도구 골갱이와 장갑. 저 도구가 없었더라면 고구마 밭의 잡초들과 씨름할 엄두도 내지 못했을 것이다.
ⓒ 김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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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가 고구마라도 심어 먹어보라며 밭 몇고랑을 선심쓰듯이 분양(?)했다. 분양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고추와 가지모종을 사다 심어주고, 몇몇 지인들과 두어고랑씩 고구마순을 심었다.

그런데 고구마순을 심고나서 가뭄이 심했고, 순은 드문드문 올라와서 고구마땜빵까지 해야했다. 그랬음에도 고구마밭은 고구마를 거둘 수 있을지 의심이 갈 정도로 볼품이 없다.

"고구마 농사 망했지?"
"충분해, 가을에 캐니까 지금 저 정도면 그래도 몇 박스는 나올걸?"
"그냥 고구마 캘때 시장가서 두어 박스 사와야 겠다."

밭을 분양해준 친구는 긍정이고, 나는 부정이다. 친구는 고구마밭에 잡초가 무성하니 마져 메자고 한다. 얼마 전에도 잡초를 뽑았는데, 다 뽑지 못했던 곳에 잡초가 무성하게 자랐단다.

24절기 중 11번째 절기인 소서, 본격적인 무더위가 시작된다는 날 아침 일찍 밭으로 나갔다. 도통 비가 오지 않았음에도 잡초들엔 이슬이 내렸다. 참 신기하다.

날이 뜨거워지기 전에 잡초뽑기를 마쳐야 한다. 안 그러면 녹초가 될 것 같다. 부지런히 쪼그리고 앉아 잡초와 씨름을 한다.

겨우겨우 고구마순이 퍼지는가 싶었는데 새순부분을 고라니들이 전부 잘라 먹었다. 농사로 먹고 살아야 하는 농민들에게 밭으로 내려오는 산짐승은 참으로 곤란한 손님일 터이다.
▲ 고구마순 겨우겨우 고구마순이 퍼지는가 싶었는데 새순부분을 고라니들이 전부 잘라 먹었다. 농사로 먹고 살아야 하는 농민들에게 밭으로 내려오는 산짐승은 참으로 곤란한 손님일 터이다.
ⓒ 김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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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그런데 고구마순을 누군가 따먹었다.

새순만 잘려나간 것을 보니 고라니의 짓이다. 그야말로 볼품없는 고구마밭인데, 이제 겨우 순이 퍼져나가기 시작하는데, 올라오는 새순마다 고라니가 뜯어놨으니 조금은 난감하다.

주변의 다른 고구마밭과 비교하면 창피할 정도인데다가, 내가 보기엔 그야말로 한 두 상자도 건지지 못할 것 같다. 그런데 고라니의 습격이라니.

'그래 콩 세알을 심는 마음으로 농사를 져야지. 하나는 날짐승의 몫으로, 하나는 들짐승의 몫으로, 하나는 농사꾼의 몫으로 그렇게 농사를 져야지. 고라니가 새순만 따먹었으니 얼마나 좋아. 어떤 집은 멧돼지가 겨우 여물기나 했을까 싶은 고구마밭은 다 헤집어 놓았다는데 이 정도면 감사하지.'

그냥 나를 위로했다.
그래도 고라니가 탐을 낼만한 새순 정도는 나왔으니 헛농사를 진 것은 아니지 않는가?

날이 점점 뜨거워진다.
손아귀도 점점 힘이 빠지고, 온몸은 땀범벅이다.

아주 이른 새벽에 나와 지열이 올라오기 전까지만 밭에서 일하는 것이 정석인데, 영 농사에 서툴고 거기에 전념하지 않으니 그야말로 뙤약볕에서 개고생이다.

친구가 아예 밭에 앉아서 잡초를 뽑고 있다. 본격적인 무더위가 시작되는 소서라고 하지만, 대서보다도 더 더운 것 같다. 가만보면 고구마순이 보잘 것 없이 드문드문 나왔다.
▲ 잡초뽑기 친구가 아예 밭에 앉아서 잡초를 뽑고 있다. 본격적인 무더위가 시작되는 소서라고 하지만, 대서보다도 더 더운 것 같다. 가만보면 고구마순이 보잘 것 없이 드문드문 나왔다.
ⓒ 김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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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랑마다 잡초는 무성하고, 애써 심은 고구마순은 초라하다. 그래도 최선을 다해서 키우다 보면 고구마순이라도 먹겠지 싶다.

주로 오늘 속을 썩이는 풀은 쇠비름과 중대가리풀이다.
친구에게 잡초 이름을 가르켜 주었더니만 대뜸 한 마디 한다.

"이게 중대가리풀이라고 했지? 그런데 이것들이 불심도 없냐? 뿌리가 워낙 퍼져서 애를 먹이네?"
"오늘이 소서라며? 그런데 무더위는 진작부터 왔고, 오늘은 대서보다도 더 더운 것 같은데?"
"올해 들어 제일 뜨거운 것 같아."
"딱 12시까지, 아니 고구마밭만 정리하고 오늘 작업 마치자."

뽑아서 흙을 툴툴 떨면 이내 시들어버릴 정도로 날씨가 뜨겁다.
▲ 잡초 뽑아서 흙을 툴툴 떨면 이내 시들어버릴 정도로 날씨가 뜨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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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이 얼마나 뜨거운지 가문 땅에서 뽑힌 잡초는 툭툭 털면 흙이 다 떨어지고, 밭두렁에 던지면 이내 시들어 버린다.

그래도 아침 이른시간부터 서너시간 친구와 달라붙어 잡초를 뽑았더니만 고구마밭이 훤하다. 고구마밭은 정리하고 나니 정오다.

"정말 고구마를 캘 수 있을까?"
"믿어, 자라기 시작하면 금방 자라니까 걱정하지마."
"그나저나 고라니, 멧돼지가 다 파먹겠구만."
"골치야 아프지만, 다 안먹겠지. 지들도 양심이 있지."
"풋, 양심? 요즘 사람들도 양심따위는 놓고 사는 것 같은데?"
"개네들은 사람이 아니잖아. 믿을만 하지 않아?"

가지와 토마토와 고추를 땄다. 토마토와 가지는 갈증해소용이고, 고추는 점심 반찬거리다. 밭에서 완숙된 토마토는 비록 벌어지고, 점도 박혔지만, 제대로된 토마토 맛이다. 이 맛에 농사짓는다.
▲ 채소 가지와 토마토와 고추를 땄다. 토마토와 가지는 갈증해소용이고, 고추는 점심 반찬거리다. 밭에서 완숙된 토마토는 비록 벌어지고, 점도 박혔지만, 제대로된 토마토 맛이다. 이 맛에 농사짓는다.
ⓒ 김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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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을 먹으러 올라가는 길에 고추와 토마토와 가지를 땄다.
토마토와 가지는 갈증해소용 간식이다. 토마토가 잘 익어 손을 데니 쩍 갈라진다. 하나를 친구와 반으로 나눠먹고 그 맛에 홀딱 반해서 두어 개를 더 따왔다.

가지도 덥썩 먹으니 한낮 더위에도 어찌 그리 많은 즙을 간직하고 있었는지 갈증이 해소된다. 점심을 안 먹어도 될 것 같지만, 고추가 있지 않은가?

밥에 물을 마는 것인지 물에 밥을 마는 것인지 모르겠으나, 나는 밥에 물을 말았다. 그리고 막된장과 고추를 반찬으로 점심을 맛나게 먹었다.

이 친구가 우리 고구마 밭의 새순을 따먹은 범인은 아닙니다. 그냥 친구입니다.
▲ 고라니 이 친구가 우리 고구마 밭의 새순을 따먹은 범인은 아닙니다. 그냥 친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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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고구마를 심었으나 일이 바빠 함께 하지 못한 친구에게 전화를 했다.

"야, 고구마밭 정말 힘들데?"
"근데 잘 됐나?"
"고라니가 와서 새순을 뜯어 먹을 정도니까 아주 잘 되었지."
"그래?"

아마도 듬성듬성 고구마밭이 초라한 것을 보면 깜짝 놀랄거다. 어서 비가 내리고, 고구마가 잡초처럼 자라서 순이라도 무성해지면 좋겠다.


태그:#잡초, #고구마밭, #소서, #텃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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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소재로 사진담고 글쓰는 일을 좋아한다. 최근작 <들꽃, 나도 너처럼 피어나고 싶다>가 있으며, 사는 이야기에 관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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