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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표 전날 템펠호프 공원에서 투표를 독려하는 시민 단체의 모습
▲ 템펠호프 공원 투표 전날 템펠호프 공원에서 투표를 독려하는 시민 단체의 모습
ⓒ 신희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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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월 25일 독일 베를린에서는 두 가지 투표가 있었다. 하나는 유럽 의회 투표 그리고 다른 하나는 베를린 시민들의 이목이 집중된 템펠호프 공원의 개발에 관한 주민 투표였다. 두 번째 투표의 결과는 시민의 승리였다. 정부의 개발안에 맞선 시민주도 단체의 제안이 선택되고, 정부의 제안이 거부 당한 것이다.

'베를린'하면 으레 베를린 장벽, 브란덴부르크 문, 국회 의사당을 최고의 관광지로 뽑는다. 많은 관광객들이 잊지 않고 그곳을 방문한다. 하지만 현재 베를린에서 꼭 방문해야만 하는 장소를 말하라면, 베를린 시민들은 주저 없이 '템펠호프 공원(Tempelhofer Feld)'을 꼽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공원은 현재 베를리너에게 가장 사랑받는 공원이자 다른 관광지들만큼이나 큰 역사적 의미를 지닌 장소이기 때문이다.

베를리너가 가장 사랑하는 '템펠호프 공원'

주민투표 이후 공원에서 여유를 즐기는 모습
▲ 템펠호프 공원 주민투표 이후 공원에서 여유를 즐기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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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원에서는 카이트 서핑, 연 난리기 등 다양한 야외활동을 한다.
▲ 템펠호프 공원 공원에서는 카이트 서핑, 연 난리기 등 다양한 야외활동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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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항 폐쇄 전까지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공항이었던 템펠호프 공항은 과거 냉전 당시 봉쇄 당한 서베를린의 시민들에게 생필품을 전달해 주던 장소였다. 그들의 생명줄과도 같았던 공항은 베를린 사람들에게 큰 의미를 지닌 곳이었다.

그런데 2008년 공항의 구조적 한계(너무 짧은 활주로)와 도심부에 위치해 큰 소음을 유발하는 등의 문제 때문에 폐쇄 결정이 내려졌다. 동시에 베를린 신공항 사업이 계획됐고, 2008년 4월 신공항을 개장할지에 대한 주민찬반투표가 있었다. 그 결과, 25%에 못 미치는 20.7%의 찬성표(공항 개장)로 템펠호프 공항은 최종 폐쇄 결정이 내려졌다.

그 해 10월 공항은 폐쇄됐고, 2010년 5월 시민들에게 공원으로 개방되었다. 그렇게 개방된 공원은 몇몇 운동 시설을 제외하고는 특별한 변화가 없이 원래의 공항의 거친 모습 그대로였다.

활주로는 고스란히 이용객들의 놀이 장소가 되었다.
▲ 비행 활주로 모습 활주로는 고스란히 이용객들의 놀이 장소가 되었다.
ⓒ 신희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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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펠호프 공항의 면적은 약 355만m²으로, 베를린의 유명한 공원인 티어 가르텐 공원(Tiergarten)의 약 1.7배, 서울숲의 약 3배에 달하고 뉴욕의 센트럴 파크보다 약 14만m² 큰 거대한 공간이다. 하지만, 그 안을 새롭게 채우는 것은 없었다.

최근 만들어진 공원을 떠올릴 때면 항상 화려하게 디자인된 곳을 생각한다. 그러나 템펠호프 공항은 특별한 디자인 없이도 간단히 사랑받는 공원이 되었다. 대신 사람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이 공원을 즐기며 넘치는 사랑을 주었다.

이 놀라운 공원이 우리에게 하고 싶은 말은 간단하다. 공원을 화려하게 잘 꾸미는 것보다 공원을 이용하는 사람들이 화려하게 즐기고 이용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말이다.

베를린이 예전 같지 않다

강제 퇴거로 인해 사망한 이들을 기리는 추모 작품이 공원 한켠에 있다. 사망자들의 이름과 사연이 담긴 이 작품 끝에는 거울이 있는데, 나 자신도 언젠가는 희생자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강제 퇴거로 인해 사망한 이들을 기리는 추모 작품이 공원 한켠에 있다. 사망자들의 이름과 사연이 담긴 이 작품 끝에는 거울이 있는데, 나 자신도 언젠가는 희생자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 신희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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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렇게 사랑받던 템펠호프 공원이 주택 부족과 사회 주택(저렴한 임대료의 임대 주택) 부족 등의 이유로 베를린 시정부의 개발 예정지가 됐다. 하지만 주민들은 정부 개발안에 반발하며 '100% 시민주도의 템펠호프 공원'이라는 시민 주도 단체를 만들었다. 이들은 시민 투표를 청원하고, 시민 투표를 성공적으로 이끌어내며 공원을 지켜냈다.

시민들은 승리했다. 공원은 이제 개발로부터 자유로워졌다. 하지만 베를린에서 6개월 이상 산 사람들이 요즘 많이 하는 이야기가 있다. 베를린이 예전 같지 않다는 말이다. 가장 큰 이유는 집값(월세)이 급격히 상승했다는 것이다. 세계화 시대의 어느 도시에서 안 그렇겠냐만은, 베를린의 지난 몇 년간의 집값 상승률은 이전과 다르게 정말 가파르다.

시 정부가 템펠호프 공항 부지를 개발하려는 가장 큰 목적도 그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서는 논란이 끊이지 않았다. 정부는 템펠호프 공원 개발 사업이 베를린의 부족한 주택 상황을 고려해 임대주택 중심의 개발 공약인 것처럼 홍보해 왔다. 하지만, 시민단체들은 임대주택의 비율이 터무니없이 계획이라고 주장했다. 게다가 그 임대주택의 예상 임대료는 현재 베를린의 적정 임대료보다 높은 수준이었다. 그렇기에 정부의 개발안은 시민들의 선택을 받을 수 없었다.

베를린에서는 이번 사례뿐만 아니라 시민들의 힘을 통해 정부의 개발을 저지해낸 사례가 많다. 하지만 한국 사회와 마찬가지로, 비상식적인 '전면 철거 후 재개발(Kahlschlagsanierung)' 같은 불도저 방식의 개발과 기존 거주민을 내쫓는 개발이 있었고, 지금도 일어나고 있는 상황이다.

일반적인 주택과 저렴한 임대 주택의 수는 줄고, 그 자리엔 고급 주택과 개인 주택이 들어서고 있다. 또 저렴한 임대주택은 외국 자본가에게 팔려서 비싼 임대주택으로 탈바꿈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템펠호프 공원마저도 개발 압력을 받게 된 것이다.

공원은 지켜냈지만, 온전히 즐길 수 없다

시민들의 힘으로 도심고속도로 개발을 저지하고 공원화시킨 베를린의 Gleisdreieck(글라스드라이에크) 공원
 시민들의 힘으로 도심고속도로 개발을 저지하고 공원화시킨 베를린의 Gleisdreieck(글라스드라이에크) 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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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표 후 개발이 저지되자, 시 정부는 기다렸다는 듯이 금방 대체 부지를 찾아냈다. 그리고 기존에 개발 예정 중이었던 사업을 빠르게 승인해 주택 공급을 늘릴 수 있었다. 즉, 대안은 이미 존재했던 것이다. 다만 그런 대안을 찾기에 앞서, 사람들이 많이 찾아오긴 하지만 개발되지 않은, 텅 빈 불모지 같은 정부 소유의 땅을 손쉽게 개발하려 한 것이다.

한국에 방영된 독일 관련 다큐멘터리와 기사들을 통해 사람들은 흔히 독일을 세입자와 일반 시민들의 천국으로 알고 있다. 그런 독일에서도 실제로는 수많은 세입자가 각종 치사한 방식으로 억압 받거나 불합리한 대우를 받는다. 심지어 한 겨울에 강제로 쫓겨나고, 대책 없이 쫓겨나서 목숨을 잃는 세입자도 허다하다. 또한 베를린에서는 최근 10여 년간 이와 같은 현상이 심화됐다.

템펠호프 공원은 지켜냈으나, 이것은 시작에 불과하다. 앞으로 자본은 더 많이 유입될 것이고 시민들은 서로를 도와가며 개발 압력과 월세 상승으로부터 도시를 지켜야 한다. 시민의 공원을 지켜낸 승리가 기쁘면서도, 온전히 즐길 수만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태그:#독일, #베를린, #템펠호프공원, #주민투표, #민주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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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과 도시를 이야기합니다. 1. 유튜브: https://bit.ly/2Qbc3vT 2. 아카이빙 블로그: https://intro2berlin.tistory.com 3. 문의: intro2berlin@gmx.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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