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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월 중순, 전화기에 낯선 번호가 떴다.

"당신 누구야?"

전화를 받은 내 첫마디는 이랬다. 지난 4월, 보이스 피싱 전화를 받고 황당한 일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보이스 피싱 전화를 받은 뒤 모르는 번호로 온 전화는 최대한 받지 않았다. 하지만, 수화기 너머 들려온 목소리를 듣고 나서는 전화를 끊을 수 없었다.

"선생님, 저예요. 저, 대근(가명)이에요. 이 번호로 여러 번 전화했었어요. 지난주에도 했었는데 안 받으시더라고요. 잘 지내시죠?"

대근이였다. 대근이는 올해 봄에 입대해 자대 배치를 받은 지 3개월 정도 지난 이등병이다. 그런데 녀석의 목소리는 힘이 없었다. 책 읽기를 좋아하고, 거리를 활보하며 모르는 사람들과의 스침을 즐기는 녀석은 항상 긍정적이었다. 대근이는 언제나 웃었다. 어른들을 존중할 줄 알고 호기심이 많았으며 사람이 가져야 할 부끄러움이 뭔지도 아는 아이였다.

대근이는 부모님이 이혼했을 때도 엄마와 아빠의 상황이 다 이해된다며 그 결정을 받아들인 멋진 아들이기도 했다. 대근이는 부모님의 이혼을 겪고 나서부터 힘이 들 때면 나를 찾아와 긴 대화를 나누곤 했다. 대근이는 자신의 기분을 정확하게 드러낼 줄 알았고, 조언을 구할 줄도 알았다. 나는 그저 그 아이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일만 했다. 그럼에도 대근이는 내게 언제나 감사하다는 말을 했다.

이등병 대근이에게 무슨 일이 생겼던 걸까

취사병인 대근이에게는 무슨 일이 생겼던 걸까.
 취사병인 대근이에게는 무슨 일이 생겼던 걸까.
ⓒ 오마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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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근아. 너, 목소리가 왜 그래? 감기라도 걸린 거야? 목소리가 변했어. 이제서야 변성기가 온 거니?"
"왜 제 목소리를 들은 사람들은 다 그런 말을 할까요. 선생님까지…."

확실했다. 대근이에게 무슨 일이 있는 것이다. 대근이는 언제나 자신에게 힘든 일이 생기면 내게 전화를 걸곤 했다. 대근이는 처음부터 자신의 힘든 이야기를 하진 않았다. 통화를 하다 끊을 때가 되면 우유나 커피를 사달라고 했다. 그 말은 만나고 싶다는 신호였다. 그렇게 대근이를 만나면 한참 동안 수다를 떨다가 자신의 고민을 털어놓곤 했다. 나는 대근이의 목소리만 들어도 좋은 일이 있는지, 힘든 일이 있는지 감 잡을 수 있을 정도가 됐다.

"너, 무슨 일이 있는 거지? 왜? 취사병 생활이 힘들어?"
"저, 취사병이 되고 싶지 않다고 했잖아요. 조리 관련 학과에 다녔다고 해서 취사병이 되는 건 좀 그래요."
"그래도 몸은 힘들지만, 먹는 건 실컷 먹을 수 있어 좋지 않아?"

대근이는 "정신이 괴로운 것보다 몸이 힘든 게 더 낫다"라고 말했다. 대근이는 내무반 생활은 정말 편하고 즐겁다고 했다. 동기들끼리 생활하는 곳이라 서로에게 위로가 된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취사병 역할은 자신을 우울하게 한다고 말했다.

대근이의 보직은 간부식당 취사병이었다. 간부들을 상대로 음식을 만들다 보니 일반 병사들을 위한 음식보다 신경을 더 써야 한다고 했다. 간부들의 눈총을 받는 걸 싫어했던 선임은 소소한 일에도 대근이에게 욕설을 해댔다.

"야, 이 XX야. 다리도 긴 놈이 왜 그렇게 느려? XX, 일하기 싫어서 그러는 거지?"
"죄송합니다. 빨리 움직이겠습니다."

그는 훈련을 받을 때 다쳐서 거동이 부자연스럽다고 했다. 군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지만 나을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이런 이유 때문에 대근이는 느리다는 이유로 선임에게 욕을 들어야 했던 것이다.

"느리다는 이유로 욕을 먹으니까 안 되겠더라고요. 그래서 외진을 받았어요. 그런데 선임은 일하기 싫어서 외진 받았다고 더 심한 욕설을 퍼붓는 거예요. 제 노력은 생각도 안 하고…. 선생님도 아시겠지만 저는 원래 욕을 안 하잖아요. 가끔 농담으로 욕을 하지만 그런 수준이 아니에요. 사회에서 듣는 욕과는 느낌이 달라요."
"그놈 너무한 거 아냐? 요즘 군대에서 누가 그렇게 욕을 해? 일을 더 잘하려고 외진 다녀왔다고 말하지 그랬어. 왜 말 안 했어?"

"죄송합니다"라는 말에 더욱 화내는 선임

간부식당 취사병 선임은 대근이가 "죄송합니다"라고 말하면 더욱 화를 냈다고 한다.
 간부식당 취사병 선임은 대근이가 "죄송합니다"라고 말하면 더욱 화를 냈다고 한다.
ⓒ 오마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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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임이 심한 욕설을 하고 나면 대근이는 모든 게 자신의 잘못인 것 같다고 했다. 자신이 욕을 먹어야 하는 이유를 알 수 없어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한편으로는 자신에게 문제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힘들다고 했다. 그래서 대근이는 선임에게 욕을 먹고 나면 "죄송합니다"라는 말이 저절로 나오게 됐다. 하지만 선임은 대근이의 "죄송합니다"라는 말을 들으면 더 화를 냈단다.

"새끼야, 너는 매번 죄송하다는 말만 해. 그리고는 변화가 없어. 야! 너는 선임이 얘기하하는데 쳐다보지도 않냐? XXXX, 이제 사람을 막 무시하네. XXXX!"

대근이는 선임의 말대로 빠른 일처리를 위해 일에만 집중한 것이었다. 그럴 때마다 그 선임은 대근에게 말을 걸었고, 쳐다보지 않았다며 거친 욕설을 내뱉었다.

"느리다고 해서 일을 빨리하려고 하면 말을 걸어요. 그리고 '쳐다보지 않았다'고, '듣는 척만 한다'고 해요. 이야기를 들으면서 일을 할 정도로 제가 능숙한 게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트집을 잡아요."

대근이는 입대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몸무게가 20킬로그램이 넘게 빠졌다. 나는 대근이의 마른 몸을 상상할 수가 없었다. 통통하고 귀여워 고등학생 같았던 그가 20킬로그램씩이나 빠졌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선생님, 잠을 잘 수가 없어요. 내무반에 있을 때는 마음이 편해요. 아침에 일어나 간부식당에 가려고 하면 숨이 차고, 어지럽고, 답답해요. 이러면 안 되는 거 아는데 죽을 것만 같아요."

나는 대근이에게 견디라고 말해줬다. 군대는 폐쇄적인 공간이라 환경적인 요인을 무시할 수 없다고, 그 선임도 힘이 들어서 네게 그러는 것이라고, 그의 좋은 점을 보려고 노력하라고. 하지만 이런 말을 하면서도 나도 뭔가 잘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직접적으로는 말하지 않았지만, '네가 그런 일을 겪는 것은 네게도 잘못이 있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 같기도 했다.

"너무 힘이 들면 윗사람에게 말해서 보직을 바꿀 수는 없니?"
"친한 선임에게 고민을 털어놨어요. '죽을 만큼 힘이 들면 높은 사람을 찾아가서 말하라'로 하더라고요. 저, 정말 죽고 싶을 만큼 간부식당에서 일하고 싶지 않아요. 취사병은 저와 맞지 않아요. 선생님, 어쩌죠?"

나는 대근이에게 바로 윗사람을 만나보라고 말해줬다. 정신이 처참하게 밟힌 뒤에 환경을 바꾼다고 해서 마음이 온전하게 제자리로 돌아오는 것은 아니니까. 그런데 대근이는 쉽게 결정할 수 없는 일이란다. 그 이유는 선임이 한 말 때문이었다. 한 선임은 대근이에게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그래, 너 힘든 거 알아. 그런데 너 힘들다고 윗선에 얘기하면 그 사람들은 뭐가 되냐? 너 때문에 왜 많은 사람들이 피해를 봐야 할까. 그리고 그런 일 생기면 너는 좋을 것 같아? 관심병사 되는 거지."

대근이는 군에서 관심병사가 되면 군 생활이 더 힘들어진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단체 생활에서 열외가 된다는 것은 노골적인 따돌림과 다르지 않았다.

"대근아, 넌 내게 소중한 존재란다"

며칠 전에도 대근이와 통화를 할 수 있었다. 대근이는 우울증이 깊어졌는지 자신의 얼굴을 보는 사람마다 무슨 일이 있냐는 질문을 한다고 전했다. 여전히 그는 힘들어하고 있었다. 목소리는 더 어두워졌다. 대근이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선생님, 저 이러다 죽을 거 같아요. 동기가 저보고 곧 자살하기 직전의 사람 같다고 그래요. 표정이 왜 그러냐고."

나는 대근이의 말을 듣고 어떤 말을 해줘야 할지 몰랐다.

"웃기지 마. 선생님이 너 없으면 누구한테 손 편지를 쓰겠어? 내가 6일 전에 편지 보냈는데 아직 못 받았니? 왜 아직도 전해지지 않았지? 일곱 장이나 썼는데…. 너도 긴 답장을 보내줘야 해. 내가 너 때문에 손 편지도 써봤어. 정말 고마워. 우리 대근이, 쌤이 사랑하는 거 알지?"

나는 그러면 안 된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선임에게 너는 도움이 되지 않는 사람일 수 있지만, 내게는 네가 꼭 필요한 사람이고 나를 행복하게 해주는 존재'라는 사실만 전했다.

지난 21일 강원도 고성 22사단 GOP(일반전초)에서 총기 난사 사건을 일으킨 뒤 탈영한 임 병장의 일은 내게 충격 이상의 것으로 다가왔다. 그가 그렇게 행동한 이유는 아직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그만의 잘못은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다.

나는 오늘도 대근이의 편지를 기다린다. 그리고 한여름, 백일 휴가 때 녀석이 웃으며 나를 찾아올 그때가 빨리 오길 바란다.

"대근아, 너는 내가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사람이야."


태그:#선임, #취사병, #고통, #잠못이룸, #관심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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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의 경의로움에 고개를 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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