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다시, 386이다. 6·4지방선거에서 여야가 모두 승리했다고 말 할 수 없는 결과를 얻었지만, 386만큼은 분명 돋보였다. 그 주인공은 남경필 경기도지사, 원희룡 제주도지사, 권영진 대구시장 그리고 안희정 충남도지사다. 시간이 흘러 이들은 40대 후반, 50대 초반의 나이가 됐다. 그렇다고 이들을 486, 혹은 586이라고 부를 필요는 없다. 386이 가지는 사회적, 정치적 의미는 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386세대는 1990년대 후반에 등장했다. '30대, 80년대 학번, 60년대 태어난 세대'를 말한다. 그 안에는 민주화운동이 활발하던 1980년대 학생운동을 경험한 세대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이들이 1990년대 중반부터 정치권에 등장하면서 386이라는 단어는 '개혁'과 '세대교체'라는 의미를 갖게 된다. 그러나 386이 주인공인 무대는 쉽게 오지 않았다. 이전 세대보다 '탈지역적', '탈권위적' 성향의 그들은 오랫동안 '비주류'로 남게 된다.

그랬던 그들에게 이번 지방선거는 어쩌면 주인공으로 설 무대의 리허설이 될 수 있다. 네 사람이 각기 다른 의미로 변방에서 정계 중심으로 도약했다. 존재감은 커졌고, 차기 대선주자로 이름이 오르내리기도 한다. 이미 상당한 정치경력을 쌓은 이들이 이제 각 광역단체에서 새로운 출발을 맞이하고, 앞으로의 활약에 따라 몸값은 더욱 오를 수 있다. 네 사람 당선의 의미를 짚어봐야 하는 이유다.

[경기도지사 남경필] '독일식 연정 실험'으로 승부수

6·4 지방선거에서 경기도지사로 당선된 새누리당 남경필 후보가 5일 오전 경기도 수원시 장안구 선거사무소에서 당선 축하 꽃목걸이를 걸고 웃고 있다.
 6·4 지방선거에서 경기도지사로 당선된 새누리당 남경필 후보가 5일 오전 경기도 수원시 장안구 선거사무소에서 당선 축하 꽃목걸이를 걸고 웃고 있다.
ⓒ 연합뉴스

관련사진보기


남경필(49) 경기도지사 당선자는 정치적 의미의 '386'과는 거리가 있다. 1965년생으로 올해 49세인 남 당선자는 매우 유복한 가정에서 자랐다. 수원에서 큰 버스회사를 운영하는 아버지 남평우 전 의원의 아들로 대학 시절에도 학생운동과는 거리가 있었다. 이후 경인일보 기자로 짧은 경력을 쌓은 후 1993년 미국 예일대학으로 유학을 떠난다. 1998년 3월 국회의원이었던 아버지의 부음으로 돌아와, 그 해 아버지 지역구(수원 팔달) 보궐선거에 출마해 당선된다.

당시 그의 나이는 33세. 그 후 내리 같은 지역구에서 5선을 한다. 비록 1980년대 민주화운동에서는 비켜나 있었지만, 미국에서 공부를 한 영향으로 한국 보수의 변화를 꿈꾸었다. 그러나 결과는 실패였다. 16대 대선을 앞둔 2001년 이회창 한나라당 총재는 그를 총재비서부실장과 대변인에 기용했지만, 대선에서 이 총재에게 닥친 '병풍'을 피해가지 못했다. 남 당선자 역시 대선 패배의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이후로도 그는 당내 '쇄신파, 소장파'로 분류되면서 주류에서 비켜난 길을 걸었다. 특히 16대 국회 시절 당 쇄신파를 상징하던 '남원정(남경필, 원희룡, 정병국)'의 한 축을 담당했다. 그러나 당에 큰 변화는 만들지 못했다. '만년 소장파'라고 불렸으며 당 내에서도 손꼽히는 5선 의원이었지만 존재감이 크지 않았다. 그래서 이번 당선이 갖는 의미가 더욱 크다. 경기도지사 선거는 전체 판세의 급소 같은 곳으로 여겨졌다.

그는 당선 이후 행보에서도 주목 받는다. 남 당선자는 도지사직인수위를 구성하면서 '사회통합부지사'라고 명명한 정무부지사 자리에 야당 추천을 제안했다. '독일식 연정'을 하겠다는 것이다. 그동안 야권단일화를 통한 야권 내에서의 공동지방정부체제는 경상남도 등에서 실험이 됐지만 여야가 정부를 공동으로 구성한 사례는 없었다. 중앙정부에서도 하지 못한 일을 지방정부에서부터 먼저 시작하려는 셈이다. 남 당선자의 공동정부 구성이 성과를 낼 경우 그는 더욱 주목 받게 될 전망이다.

[제주도지사 원희룡] 제주도에서 성공해야 중앙으로 진출 가능

원희룡 제주도지사. 선거유세 당시의 모습.
 원희룡 제주도지사. 선거유세 당시의 모습.
ⓒ 이주빈

관련사진보기


원희룡(50) 제주도지사 당선자는 '386'의 대표 인물이다. 1982년 대입고사에서 전국수석과 서울대학 법대 입학으로 주목을 받은 그는 20대에 민주화운동, 노동운동에 몸을 던졌다. 소련과 동구권의 몰락으로 전향했다. 이후 1992년 사법시험에 합격해 검사로 일하다가 1998년 그만둔다. 당시 정치권은 '3김시대'의 종식과 함께 여야 모두가 젊은 피 수혈을 위해 열을 올리고 있었다. 원 당선자는 합리적 보수를 천명하며 한나라당으로 향했다.

당에서 그는 성공적인 길을 걸었다. 서울시 양천구 갑 소속 제16, 17, 18대 국회의원을 지냈고, 남 당선자와 정병국 의원과 함께 '남·원·정'으로 불리면서도 당 대표에 도전하는 등 소장파의 선두 주자 역할을 했다. 2004년 총선 이후 치러진 전당대회에서는 당 대표 선거에 출마해 박근혜 당시 대표에 이어 두 번째 많은 득표를 했다. 유력한 대선주자로도 분류됐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에서 당 사무총장을 맡으면서 개혁 이미지가 훼손되고, 2012년 총선 불출마 이후에는 공백이 길어졌다.

제주지사 당선으로 그는 재기의 기회를 얻었다. 다만 제주지사만으로는 한계가 있다는 지적도 이어진다. 제주도가 군사적·경제적으로 중요한 지역이 되고 있지만, 제주도지사를 발판으로 다시 중앙 정치로 나갈 수 있어야만 진정한 재기가 가능할 것이라는 전망이다. 물론 그것 역시 제주지사직을 성공적으로 마쳤을 때 가능하다. 원 당선자는 경쟁 상대였던 신구범 새정치연합 후보에게 지사직 인수위원장을 제안하면서 남경필 당선자와 마찬가지로 연정을 시도하고 있다. 과거 개혁 이미지를 회복하기 위한 실험으로 여겨진다.

[대구시장 권영진] 위기의 대구 구하고, 새누리당 앞마당 지켜야

권영진 대구시장 당선자가 선거사무실에서 지지자들이 함께 한 가운데 당선인사를 하고 있다.
 권영진 대구시장 당선자가 선거사무실에서 지지자들이 함께 한 가운데 당선인사를 하고 있다.
ⓒ 조정훈

관련사진보기


권영진(52) 대구시장 당선자는 경북 안동에서 태어나 고려대학교 시절 민주화운동에 가담했다. 이후 고려대 대학원 총학생회장을 하면서 전국 대학원 총학생회 설립을 주도했다. 권 당선자 역시 원희룡 당선자와 마찬가지로 소련과 동구권이 몰락하던 시기 다른 길을 찾기 시작했다. 1990년 통일부에서 관료생활 한 그는 1999년 가을 당시 한나라당 이회창 총재의 요청으로 정치권과 인연을 맺기 시작한다.

2000년 이회창 총재의 보좌역으로 한나라당에 입당한 그는 2002년 대선에서 이회창 후보의 언론 인터뷰 팀장을 맡는다. 그 후 2004년 서울 노원에서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2006년 오세훈 서울시장 시절 초대 정무부시장을 지냈고, 2008년 총선 다시 노원에 출마해 당선됐다. 초선으로 그는 국회에서 개혁적인 활동을 보였으며 몸싸움 없는 국회를 위한 '국회개혁 5대 법안'을 발의하기도 했다.

그러나 2012년 19대 총선에서 그는 다시 낙선했다. 그리고 그 해 대선에서 박근혜 대통령이 당선되면서 대표적인 친이명박계 인물로 여겨지는 그의 복귀는 쉽지 않아 보였다. 이번 새누리당 대구시장 경선이 이변으로 여겨지는 것도 이 같은 이유에서다. 그는 현역의원이면서 대표적 친박계인 서상기 의원과 격돌해 승리했다.

본선은 더욱 어려웠다. 김부겸 새정치연합 후보와 맞대결을 펼치게 된 것. 오랫동안 대구에 공을 들여온 김부겸 후보와의 대결은 쉽지 않았다. 아무리 새누리당의 성지와 같은 대구지만,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었고 세월호 참사라는 정부여당에게 악제까지 겹쳤다.

비록 김 후보에게 40%대의 득표를 허용했지만 그는 위기의 대구를 지켰다. 그에게 주어진 임무 역시 이와 같다. 당의 앞마당을 지키는 일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대구의 변화에 민감하게 대응해야 한다. 그가 인수위부터 '개혁'를 크게 부르짓는 이유이기도 하다.

[충남도지사 안희정] 야권 386의 자존심... 대선주자로 우뚝 서다

재선에 성공한 안희정 충남지사
 재선에 성공한 안희정 충남지사
ⓒ 심규상

관련사진보기


안희정(49) 충남도지사 당선자를 빼놓고 386을 말할 수 없다.  그는 고등학교 시절부터 민주화 운동에 주도적으로 나섰고, 대학시절과 이후 생의 대부분을 운동과 정치활동으로 채워왔다. 1989년 김덕룡 민주당 의원실에서 정치와 처음 인연을 맺은 그는 1990년 3당합당 당시 김영삼을 따라가지 않고 노무현이 있는 꼬마민주당에 남았다. 1992년 총선에서 부산에 출마했다가 낙선한 노무현 전 대통령을 돕기 시작한 그는 2002년 노무현 대선후보 캠프에서 정무팀장을 지내 대통령을 만드는데 일조했다.

이후 잘 알려져 있다시피 그는 2002년 당시 기업체들로부터 불법 대선자금을 받은 혐의(나라종금 로비의혹 사건)로 구속됐다. 형량 1년을 모두 채운 그는 참여정부 임기 동안 공직을 사양했고, 2010년 지방선거에서 충남도지사에 출마하기까지 긴 공백기를 가진다. 그는 당시 송영길 인천시장 당선자, 이광재 강원도지사 당선자와 함께 386의 부활 그리고 친노의 귀환을 상징하게 된다.

그 가운데 이제 안 당선자만이 살아남았다. 송영길 전 인천시장은 유정복 당선자와 경쟁에서 패배했고, 이광재 전 지사는 박연차 게이트 사건으로 2011년 대법원 확정판결을 받아 정치자금법과 공직선거법에 따라 10년간 피선거권이 제한된 처지다. 안 당선자는 공히 문재인 의원과 함께 친노 진영의 투톱으로 자리잡았다. 또한 그는 당장 유력한 차기 대선주자로 평가받고 있다.


태그:#안희정, #남경필, #원희룡, #권영진, #386
댓글7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