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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오는 날에도 나와서 염색 작업을 진행하는 사람들
▲ 테너리의 작업 비가 오는 날에도 나와서 염색 작업을 진행하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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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는 달리고 또 달린다. 이틀에 걸쳐 달려왔던 길을 하루 만에 돌아가기 위해서다. 고된 여정이 피곤했는지 일행들 모두 잠에 빠져 들었다. 가는 길 중간 버스정류장에 내려달라고 기사에게 부탁했다. 페즈는 모로코 북쪽에 위치하고 있어 서쪽에 있는 마라케시까지 돌아가기 보다는 중간 지점인 리싸니에서 버스를 타고 가는 편이 빠르다.

딸과 나, 그리고 우리처럼 페즈로 간다는 일본인 두 명이 차에서 내렸다. 우리가 내릴 채비를 하자 차에 남은 일행들은 잠깐 모두 내려 잘 가라며 포옹을 해준다. 우리 네 명만 덩그러니 남으니 어딘지 허전한 느낌이다. 달리는 차 뒤꽁무니를 한동안 바라보았다. 2박3일이라는 짧은 기간에도 정이 들었는지 가슴이 뭉클하다.

페즈로 향하는 험난한 여정

리싸니 버스 터미널 매표소와 좌판을 놓고 장사하는 사람
▲ 리싸니 버스 터미널 리싸니 버스 터미널 매표소와 좌판을 놓고 장사하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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택시를 타고 페즈까지 가려면 1500디르함이란다. 마라케시에서 1200디르함 정도일 거라고 들었는데 택시기사는 흥정을 할 생각이 없다. 오래 걸리긴 하겠지만 훨씬 저렴한 버스를 타기로 했다. 10시간 동안 이동해야 해서 편한 자리를 잡으려 했으나 잠시나마 정이 들었던 일본인들 옆 자리에 앉았다.

먹거리를 나눠 주면서 잘 안되는 영어로 이야기를 나누어 보려고 했는데 짧은 대답만 할 뿐 말하기 싫은 눈치다. 일본인들은 조용해서 그런가 했더니 10시간 내내 쉬지 않고 자기들끼리 대화를 한다. 버스에 탄 승객들 모두 조용한데 일본인들 때문에 잠도 제대로 못 잤다.

다양한 풍경이 펼쳐져 지루할 틈이 없다.
▲ 리싸니에서 페즈로 향하는 길 다양한 풍경이 펼쳐져 지루할 틈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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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싸니에서 페즈로 가는 동안 꽤 많은 산을 넘었다. 굽이굽이 산길을 돌 때마다 눈 쌓인 풍경과 침엽수가 점점 보였다. 기온도 낮아지는 게 북쪽으로 가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그동안 봤던 붉은 흙집은 사라지고 유럽풍의 집들이 나타났다.

새로운 풍경을 신기해 하는 것도 잠시, 10시간 이상 좁은 의자에 앉아 있었더니 지치고 피곤하다. 밤이 돼서야 페즈에 도착했다. 어서 숙소를 찾아 들어가고 싶은데 세비야에서 알아 본 숙소는 아무리 찾아도 없다. 숙소가 있다는 거리 이름을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물었지만 다들 호객행위를 하느라 급급하다.

친절하게 도와주려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우리의 영어는 그들이 알아 듣지 못했고, 그들의 프랑스어는 우리가 알아들을 수 없었다. 밤이 깊어지자 딸은 거의 울상이 되었다. 블루 게이트 근처에 있다고 해서 블루 게이트가 어딨냐고 아무리 물어도 답을 얻을 수 없었다. 딸의 말대로 100번 넘게 메디나 입구만 왔다 갔다 했다.

한 시간 반을 넘도록 헤매다 밤 10시가 넘어서 결국 다른 숙소에 가기로 결정, 괜찮아 보이는 호텔로 들어갔다. 시설이나 청결 수준이 나쁘지 않아 가격을 물었더니 180유로나 달란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에서도 20유로 이상을 주고 묵은 적이 없건만 물가가 더 저렴한 모로코에서 180유로라니.

리싸니에서 페즈로 향하는 길 위의 풍경. 길에 앉아 있는 사람들과 길가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의 모습
▲ 모로코 거리 풍경 리싸니에서 페즈로 향하는 길 위의 풍경. 길에 앉아 있는 사람들과 길가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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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이 빠진 채로 나와서 그냥 호객 행위를 하는 사람을 따라갔다. 계속해서 지나쳤던 조금 허름해 보이는 숙소로 데려다 준다. 더블룸이고 샤워실까지 있으니 나름 양호하다. 210디르함을 부르는 걸 깎아서 180디르함에 묵기로 했다. 침대에 앉자 피곤이 몰려와 짐도 풀지 않은 채 쓰러져 잤다.

아침에 눈을 뜨니 비가 내린다. 제길. 또 비야? 페즈의 메디나는 중세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 유네스코에 등재된 곳이다. 길이 미로같아 가이드 없인 여행객 혼자서 절대 다닐 수 없기로 유명하단다. 이런 곳을 비오는 날 다녀야 한다니 마음도 덩달아 처진다. 모로코에서 사막투어만 하려다가 여유가 생겨 페즈에 들른거라 정보를 찾기 위해 열심히 인터넷을 검색하고 있는데 와이파이까지 끊긴다. 왠지 페즈, 감이 좋지 않다.

페즈에서 노새는 친환경 택시

큰 기대 없이 테너리 하나만 보자며 마음을 비웠다. 테너리를 보러 나가기 위해 짐을 맡기려는데 20디르함을 내란다. 여태까지 짐을 맡아 주면서 돈을 받은 숙소는 하나도 없었는데. 어제 너무 무리한 탓인지 따질 기운도 없다. 숙박료를 깎았으니 그게 그거다 생각하고 돈을 주고 나왔다.

다행히 빗줄기가 가늘어져 있었다. 인도에서 다닌 것처럼 용감하게 우리끼리 다녀볼까 생각했지만 시간도 체력도 없었기에 가이드를 찾기로 했다. 숙소 앞에 있는 카페에 들러 테너리를 보려면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물었더니 주인장이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곧이어 인상 좋아 보이는 중년의 남자가 들어온다. 자신은 가이드 자격증도 가지고 있고 오랫동안 이 일을 해 왔다며 증명서까지 내보인다. 메디나 투어 종류를 쭉 설명하기에 우리는 테너리만 보면 된다고 했더니 200디르함을 내란다. 혹시나 먹힐까 하여 우리 둘 다 학생이라고 했더니 2시간 투어에 100디르함으로 해 주겠다고해서 승낙 했다.

그는 바로 안내에 들어갔다. 페즈에서 봐야 할 목록으로 물을 운반하는 수도와 가죽을 생산하는 테너리 그리고 빵 굽는 공장이 있다며 구불구불한 골목길로 들어선다. 다시 빗방울이 굵어지자 그는 어느 가게 안으로 들어가더니 우산을 들고 나온다. 친구네 집에서 빌렸다며 우산을 쓰고 앞장을 서는데 길이 너무 좁아 우산을 접어야 했다. 한 사람이 간신히 지나갈 만큼 좁은 길이지만 신발, 액세서리, 옷, 가방 등을 파는 가게가 즐비했다. 맞은 편에서 노새가 다가오길래 길 옆으로 피했더니 가이드는 친환경 택시라며 웃는다.

페즈의 메디나는 복잡한 미로로 되어 있다. 비좁은 골목은 우산 하나 펴기 어려울 정도이며 건물이 무너지는 방지하기 위해 버팀목을 대어 놓았다. 이 좁은 골목길에도 짐을 실은 당나귀가 다닌다.
▲ 페즈 메디나 페즈의 메디나는 복잡한 미로로 되어 있다. 비좁은 골목은 우산 하나 펴기 어려울 정도이며 건물이 무너지는 방지하기 위해 버팀목을 대어 놓았다. 이 좁은 골목길에도 짐을 실은 당나귀가 다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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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이드는 좁고 복잡한 길을 잘도 찾아 간다. 우리가 어디서 출발해서 어떻게 왔는지 기억하려고 노력했으나 도저히 기억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딸과 둘이서만 왔으면 정말 길을 잃을 뻔했다. 가이드는 미로 같은 골목을 지나 가죽 제품이 진열된 상점으로 들어가더니 우리 보고 2층으로 올라가란다.

가게 주인이 우리에게 민트잎을 한 줄기 쥐어주더니 코에 대고 있으라고 했다. 페즈의 테너리에서는 가죽을 가공하기 위해 비둘기똥을 사용한다고 한다. 그 악취가 심하게 나기 때문에 민트향을 맡는 것이란다. 주인을 따라 옥상으로 올라가니 테너리가 한 눈에 보였다. 생각보다 작은 규모의 테너리에 실망해서 가이드에게 더 큰 곳은 없냐고 물었더니 멀리 있긴 하지만 데려다 주겠단다.

천 년의 염색전통을 지키는 테너리

가는 길에 가이드는 계속 가게들로 안내한다. 아까의 테너리에서는 가죽 제품을 구경하라고 하더니 수를 놓아 파는 상점에서는 모로코의 전통 자수라며 구매하기를 은근히 권유한다. 우린 그 무엇도 사지 않으려 했지만 아르간 오일 가게에서 마음을 바꿨다. 요즘 한국에서 아르간 오일이 뜨고 있고, 모로코 현지에서 사면 가격도 저렴할 테니 여행 선물로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가게 여주인은 화장품을 하나하나 설명하더니 딸의 눈에 아이라인까지 그려준다. 우린 아르간 오일에 관심이 있다고 하니 다양한 제품을 꺼내놓는다. 아무 것도 첨가되지 않은 오일이 제일 나을 것 같아 가격을 물어봤다. 주인은 가격은 말하지 않고 몇 개나 살 것인지 묻는다. 한 두 개만 산다고 했더니 100디르함이란다. 많이 사면 깎아주는 것인지 10개를 사면 얼마냐고 물었다.

이때 가이드가 웃으며 이 사람들 학생이라 돈이 없으니 싸게 주라고 한마디 거든다. 딸은 10개라는 말에 놀라서 내 팔을 잡는다. 환전한 디르함이 얼마 없어서 10개는 못 살 것 같단다. 개수는 줄었지만 열심히 흥정한 끝에 하나에 30디르함씩 4개를 구매했다. 사막에서 만난 일행들도 30디르함에 샀다고 들었으니 저렴하게 정말 잘 산 것 같다.

가이드는 웃으면서 자기가 도와줘서 물건을 싸게 샀으니 가이드비 100디르함을 더 내라고 한다. '이게 무슨 개 풀 뜯어 먹는 소리야?' 그냥 해보는 소리겠지하고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투어를 계속했다. 한참을 걸어서 테너리에 도착했다. 가이드 말로는 이곳이 가장 큰 테너리란다. 옥상에서 내려다보니 아까의 테너리보다 훨씬 더 크다.

옥상에서 바라본 그곳에는 무채색의 우물 같은 것들이 가득했다. 흰색의 통에서 가죽을 세척한 다음, 각양각색의 염료통에서 가죽을 염색한다고 한다. 비둘기똥과 가죽 냄새가 섞여 고약한 냄새가 났지만 그나마 겨울이라 여름보다 냄새가 덜하단다. 지금도 숨쉬기가 어려운데 여름에는 얼마나 심할지. 건물 곳곳에 걸려 있는 길다란 줄에는 무두질이 끝난 가죽들이 빨래처럼 널려 있다.

가죽을 염색하는 통과 가죽을 말리는 모습, 완성된 가죽 제품들
▲ 테너리 가죽을 염색하는 통과 가죽을 말리는 모습, 완성된 가죽 제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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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죽을 세척하고 염색하는 각양각생의 통
▲ 테너리 가죽을 세척하고 염색하는 각양각생의 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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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오는 날인데도 몇몇 사람은 테너리에 나와 가죽을 건져올리고 있다. 염료통에 발을 담그고 무거운 가죽을 넣었다 뺐다 한다. 평생 허리를 못펴는 그들을 보니 가죽옷을 입는 내가 부끄럽게 느껴졌다. 테너리 앞 개천에는 시커먼 물이 흐른다. 화학약품을 사용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저 물을 식수로 써도 지장은 없을까 염려가 됐다. 중세의 방식을 그대로 고수해 천연의 염료로 가죽을 염색하고 있는 테너리. 천년 전과 다를 바 없는 모습을 보노라니 시간을 거슬러 중세로 시간여행을 한 듯하다.

친절한 첫인상, 그러나 그는 두 얼굴의 가이드

테너리 관람을 끝으로 투어를 마쳤다. 2시간이 다 됐으니 택시를 타고 출발했던 곳으로 가야 한단다. 택시비 10디르함을 우리보고 내라길래 알겠다고 했다. 가이드는 택시를 잡으면서 가이드비 200디르함을 내라고 한다. 아까 그 말은 농담한 것이 아니었나?

"내가 아까 아르간 오일 싸게 살 수 있도록 도와줬으니 가이드비로 200디르함을 줘요."
"처음에는 100디르함이라고 해서 투어를 하기로 한 거였어요."
"처음엔 그랬지만 내 덕분에 돈을 절약했으니 더 내놔요."
"100디르함을 주기로 약속했는데 이건 약속을 어긴 거 아닌가요?"
"당신들 때문에 그 가게는 손해를 봤고 내 입장이 난처해졌어요."

마침 택시가 왔고 이 차를 타지 않으면 미로 같은 메디나에서 미아가 될 것 같았다. 택시를 타기 전에 택시비 10디르함과 혹시 모를 잔돈 20디르함을 꺼내 딸 보고 손에 쥐고 있으라 했다. 택시를 탄 가이드의 얼굴은 점점 험악해진다. 아까 인상 좋던 그 사람 맞아? 게다가 흥정한 건 우린데 자기가 웬 생색이람. 그리고 손해를 볼 정도였다면 주인이 물건을 팔지도 않았을 것이다.

"이건 약속 위반이에요. 그럼 물건을 사지 않았다면 가이드비를 더 안 줘도 되는 건가요?"
"하여튼 200디르함 줘요."

더 이상 말이 통하지 않자 나도 참지 않기로 했다. 영어로 화를 냈을까? 아니, 한국어로 쏴붙였다. 괜히 되지도 않는 영어로 싸우며 머리 아파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가이드는 계속해서 150디르함이라도 내라고 조른다. 택시비는 자기가 해결할 테니 있는 돈 다 내놓으라며 으름장이다. 20디르함을 보여줬더니 다 가져갔고 택시비도 내라며 10디르함을 더 받아 갔다.

그제서야 우리를 블루 게이트 앞에 내려주고는 자신은 내리지도 않고 택시를 탄 채로 가 버린다. '그래, 행패 안 부리고 숙소 근처까지 데려다 준 것만 해도 다행이지'라고 생각하며 숙소로 갔다. 숙소의 직원이 바뀌어 있다. 직원은 짐을 맡겼으니 돈을 내란다. 아까 냈다고 몇 번을 말했더니 그제서야 짐을 내어 준다.

더 이상 페즈에 있고 싶지 않았다. 말도 안 통하고 계속 헤매느라 지쳤다. 어차피 모로코에는 사막투어를 목적으로 온 것이었으니 페즈의 테너리 구경은 덤으로 한 셈 치자. 부족한 버스비만 디르함으로 환전하여 바로 탕헤르행 버스표를 끊었다. 딸과 나는 버스를 타고 페즈를 도망치듯 빠져나왔다.

고생 가득했던 페즈를 뒤로하고 스페인으로

탕헤르까지 5시간 반이나 걸렸다. 늦은 저녁이라 타리파행 배가 있을까 싶었지만 정말 다행히도 8시 반에 마지막 배가 있었다. 스페인으로 가기 위한 입국신고서를 작성하려는데 웬 남자가 난데없이 불쑥 나타나더니 대신 써 주겠단다. 승선 시간을 아끼기 위해 도와주려는 직원인 줄 알고 선선히 맡겼더니 스펠링도 틀리고 영 못 쓴다. 그냥 내놓으라고 했더니 써 준 대가로 돈을 달란다. 어이가 없어서 그가 쓰던 종이를 빼앗아 눈 앞에서 찢어 버렸다. 당황한 그는 도망갔다.

도대체 오늘 왜 이러는 거야? 짐 보관료로 뜯기고, 가이드비로 뜯기고, 선착장에서도 뜯길 뻔하고. 돈 뜯기는 날인가? 페즈에서는 우리에게 운이 안 따라주는지 여기저기서 당해 정신이 없다. 배를 타고 무사히 타리파에 도착했다. 배에서 내리니 알헤시라스행 무료 셔틀버스가 있다. 스페인에 도착하니 무료로 이용할 수 있는 시설이 생기는구나. 타리파보다는 알헤시라스가 좀 더 큰 도시라 하여 숙소를 구하거나 다음 여행지인 그라나다로 가기에 수월할 듯하여 버스를 탔다.

버스에서 검색해 둔 숙소를 찾느라 지나가는 이에게 물었더니 친절하게 알려주고는 못 미더웠던지 다시 되돌아와서 같이 찾아주고는 떠난다. 오늘 처음으로 느낀 친절이다. 밤 12시가 되서야 숙소에 들어왔다. 오늘 하루가 정말 길다. 내일의 여행은 오늘과는 다른 더 즐거운 여행이 되리라고 주문을 걸어 본다.


태그:#페즈, #탄네리, #모로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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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수성과 감동은 늙지 않는다"라는 말을 신조로 삼으며 오늘도 즐겁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익숙함이 주는 편안함에 주저앉지 않고 새로움이 주는 설레임을 추구하고 무디어지지 않으려 노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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