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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수대가 시원한 물을 하늘로 올리며 무더위를 식혀주고 있다.
▲ 나무와 분수 분수대가 시원한 물을 하늘로 올리며 무더위를 식혀주고 있다.
ⓒ 김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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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초임에도 한낮의 더위가 한 여름과 다르지 않은 날이다. 기상이변의 모든 원인들은 인간의 편리함을 위해 만들어진 기계들과 관련이 있음은 물론이다. 결국, 인간은 스스로 헤어나올 수 없는 악순환의 굴레에 빠져 버린 것이다. 이 악순환의 고리를 끊을 수는 없는 것일까?

결국, 자연의 섭리를 따라 살고, 자연에 기대어 살아가는 것 외에는 별다른 방법이 없어보인다. 최첨단 과학이 지금 우리가 당면한 문제들을 해결할 것이라 기대하지만, 최첨단 과학의 시대가 장밋빛 미래를 보장하는 것이 아님은 지금까지의 과학기술이 증명해 보였다.

숲에서 줄넘기를 하고 있는 아이들의 모습이 행복해 보인다.
▲ 줄넘기 숲에서 줄넘기를 하고 있는 아이들의 모습이 행복해 보인다.
ⓒ 김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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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더위를 피해 가족이 숲으로 소풍을 나왔다. 아이들은 나무 그늘 아래서 자기들끼리 신나게 놀고 있다. 숲은 도심의 아스팔트가 뿜어내는 지열도 없고, 나뭇잎이 그늘을 만들어 주어 시원하다.

나무가 어떤 과학적인 장치에 힘입어 그리하는 것이 아니라, 나무의 본성이 그렇게 생겨먹은 것이다. 봄이 오면 이파리를 내고, 여름이면 시원한 숲그늘을 만들어주고, 가을이면 열매를 맺는다.

아주 단순한 삶의 패턴같지만, 인간이 아무리 좋은 약에 최첨단 의료기술을 갖추어 초고령화사회를 산다고 하여도 나무만큼 오래 살지 못한다. 게다가 나무는 오래될 수록 더 멋드러진 모습으로 살아간다.

사람은 아무리 곱게 늙어도 결국에는 추하고, 누군가의 도움없이는 살 수 없고, 그러다가 한 백년도 안 되는 삶, 혹은 그 어간의 삶을 살아갈뿐이다.

숲 그늘에 한참을 앉아있다보니 다람쥐 한마리가 놀자고 한다.
▲ 다람쥐 숲 그늘에 한참을 앉아있다보니 다람쥐 한마리가 놀자고 한다.
ⓒ 김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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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 자연에 기대어 사는 것들은 참으로 많다. 다람쥐는 가을이면 열매들을 모아 땅 속에 보관한다. 그러나 그가 땅 속에 보관한 것들을 겨울양식으로 모두 먹지 않는다. 아니, 아예 모두 다 찾지 못하도록 유전자가 조절을 하고 있다고 보는 것도 틀리진 않을 것 같다.

그래서 땅 속에 남은 열매들이 싹을 내고 나무가 되는 것이다. 자연에서의 먹고 먹힘은 서로를 돕는 일로 결론이 난다. 사람의 세상과 전혀 다른 삶의 스타일인 것이다.

직박구리가 먹이를 물고 있다.
▲ 직박구리 직박구리가 먹이를 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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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람쥐만 그런 것이 아니다. 새들도 작은 열매들을 먹고, 씨앗들을 여기저기에 이동시켜주는 역할을 한다. 그들은 끊임없이 먹이를 찾고 먹지만, 쓰레기를 남기지 않는다.

인간은 유일하게 쓰레기를 만드는 종이다. 쓰레기를 만들 뿐 아니라, 죽어서도 자연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인간의 묘지문화라는 것이 그 한 단면인 것이다.

도시에 사는 비둘기와는 다른 산비둘기지만, 사람과 가까이 살면서 야생성을 많이 잃어버린 듯도 하다.
▲ 산비둘기 도시에 사는 비둘기와는 다른 산비둘기지만, 사람과 가까이 살면서 야생성을 많이 잃어버린 듯도 하다.
ⓒ 김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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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비둘기는 도심 근처에도 살긴하지만 도시의 쓰레기를 뒤져먹고 사는 비둘기와는 다르다. 도심의 비둘기들은 인간이 버리는 쓰레기를 탐하지만, 산비둘기는 자연에서 먹이를 구한다. 그래서 도심의 비둘기들이게는 '닭둘기'라는 별명이 붙어있지만, 이들은 그냥 산비둘기라고 부른다.

그렇게 불려야 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이다. 사람이 이름을 붙여주었을 지언정 그냥 비둘기는 비둘기로, 산비둘기는 산비둘기로 불려지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이다.

우리 사람들 관계에서도 수많은 이름들이 있지만, 변질되면 수많은 다른 이름이 대처를 하게 된다.

목사가 먹사가 되고 기자가 기레기가 되고 기독교가 개독교가 되고 스님이 땡중이 되고 선생이 꼰대가 되고 고관대작들이 오적이 되고...되고 되고....

이런 세상은 좋은 세상이 아니다.

텃새 까치, 그들은 사람도 별로 무서워하지 않는다.
▲ 까치 텃새 까치, 그들은 사람도 별로 무서워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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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책 길, 나무 그늘에 앉아 책을 읽는데 산짐승들과 새들이 경계를 풀고 다가온다. 그들을 보면서, 과연 인간이 그들보다 잘 사는 것인지 돌아본다. 그들은 문명의 이기와 동떨어져 자연에만 깃대어 살지만, 그들이 인간보다 더 못산다고 할 수 없다.

삶의 방식이 다를 뿐이다. 오히려 그들은 행복하고 당당하다.

자연의 법칙이라는 것이 잔인해 보이지만, 양의 탈을 쓴 이리와도 같은 삶이 일상인 사람들의 '사랑' 혹은 '정의' 또는 '평화'라는 이름으로 자행되는 폭력들이 더욱 더 잔인하지 않은가?

버튼 하나만 누르면, 아무런 죄책감 없이도 수없이 많은 이들을 죽일 수 있는 것을 인간의 과학기술이 우리에게 준 것이다. 사랑하는 이들을 순식간에 죽음으로 몰아 넣는 순간에도 패스트푸드를 먹을 수 있는 잔인한 존재가 인간인 것이다.

과연, 누가 더 잘 살고 있는 것인가?

장미축제가 진행중이지만, 무더운 날씨로 대부분의 장미는 시들었다. 장미는 5월이 제철이다.
▲ 장미 장미축제가 진행중이지만, 무더운 날씨로 대부분의 장미는 시들었다. 장미는 5월이 제철이다.
ⓒ 김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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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으로 돌아가라!'는 루소의 말이 아니더라도, 그 의미와는 조금 다르더라도 사람이 사람답게 살려면 오로지 자연에만 기대어 사는 동식물들에게 배워야 한다. 그들에게 배우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자연의 품에 기대에 쉬는 시간들을 가져야 한다.

그 시간을 통해서, 왜 사람들은 자연의 품에 안기면 행복하고 좋은가 체득해야 한다. 그리고 자연이 주는 것들 중에서 최소한 식물은 날것으로 취할 수 있는 훈련도 해야 한다. 여간해서 자연은 순리를 저버리지 않는다.

그러나 이제 그들도 인내심이 바닥인듯, 서서히 인간에게 보복하고 있는 중이다. 그들에게는 자비심이 없다. 그래서 무자비하게 보일 수 있다. 그들에게는 차별도 없다. 부자나 가난한 자에게나 똑같은 방식으로 대한다. 잔인한 것 같지만 자연은 그렇다.

그러나 베풂에 있어서도 그러하다.
자연의 인내심이 남아있을 때, 자연에 기대어사는 훈련을 해야 한다. 그리고, 그들의 자연스러운 삶을 배워야 한다. 자연스럽다는 말, 그것은 단순히 부드럽다거나 순리적이라거나 하는 말과는 다르다.

떨어진 장미꽃, 떨어진 것들만 보면 마음이 아련하다.
▲ 낙화 떨어진 장미꽃, 떨어진 것들만 보면 마음이 아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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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어떤 차원의 문제이건 지금 당면한 인간의 문제는 '자연을 가까이하는 것'이다. 하루 24시간 중에서 온전히 자연에 자신을 맡기는 시간이 얼마나 되는가? 아주 잠깐이라도 근처 공원이라도 가서 나무에 몸을 기대보자.

잠시 귀를 기울여, 도시가 주는 소음이 아닌 자연이 내는 소리를 들어보자. 운 좋게 청아한 새소리라면 더 좋고, 물소리, 파도소리라면 더 좋겠다.

자연은 모든 것을 품고 있으며, 모든 것들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그래서 자연에 기댄 사람에 따라 그에 맞는 다양한 이야기들을 들려준다. 그 이야기를 듣고 보는 이들, 그들은 행복한 삶에 한발자욱 더 나아간 사람들이다.

힘들고 지치는가? 아무 생각말고 일단 자연에 기대는 연습부터 하자. 그러면 행복한 삶의 길이 펼쳐지기 시작할 것이다.


태그:#자연, #다람쥐, #직박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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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소재로 사진담고 글쓰는 일을 좋아한다. 최근작 <들꽃, 나도 너처럼 피어나고 싶다>가 있으며, 사는 이야기에 관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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