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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부터 있었던 피맛골은 서민들의 애환이 담겨 있는 곳이다
▲ 피맛골 조선시대부터 있었던 피맛골은 서민들의 애환이 담겨 있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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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광화문 사거리에서 동대문까지의 대로를 '종로'라 부른다. 이 대로를 따라 좌우 뒤편에는 '골목'이 있는데, 조선시대부터 최근까지 독특한 문화를 형성한 곳이다. 이 골목을 피맛골이라 하는데, '피마(避馬)' 즉 '말을 피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 뜻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조선시대 상황을 잠시 살펴봐야 한다.

조선시대 현재의 종로는 운종가(雲從街)로 불렸다. 흥인문(동대문)부터 돈의문(서대문) 사이에 위치했는데, '사람과 재화가 구름처럼 모였다가 흩어진다'고 해서 그리 불렸다고 한다. 한마디로 조선시대 최고의 번화가였다. 또한 지금의 광화문대로 좌우에는 이조·호조·예조·병조·형조·공조 등 조선시대 관청이 자리해 '육조거리'라 불렸다.

운종가가 궁궐과 관청으로 가는 통로이다 보니, 고관대작의 왕래가 잦았다. 백성들은 높은 분의 행차마다 "쉬이. 물렀거라. ○○ 대감 행차시다"라는 소리에 일하다가 또는 지나가다 말고 부복해야 했다. 생업에 바쁜 서민에게 고관대작의 잦은 행차는 그리 달가울 리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불편함을 피하기 위해 큰길이 아닌 뒷길을 이용하기 시작했다.

피맛골, 조선 골목 문화의 아우라

조선시대 종로는 사람과 재화가 구름처럼 모였다가 흩어진다는 의미로 운종가로 불렸고, 이곳에는 국가 경제를 주물렀던 시전 상인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 조선시대 운종가 조선시대 종로는 사람과 재화가 구름처럼 모였다가 흩어진다는 의미로 운종가로 불렸고, 이곳에는 국가 경제를 주물렀던 시전 상인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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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으로 사람들의 왕래가 많아지다 보니, 주거지로 사용되던 골목에 자연스레 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상점이 만들어졌다. 좁고 긴 널빤지로 만든 상에 탁주를 파는 선술집, 즉 목로(木壚)주점이 들어섰고, 허기를 달래주는 국밥집도 만들어졌다. 해장용으로는 막걸리에 8가지 한약재를 넣고 만든 모주(母酒)가 제격이기 때문에, 어느새 골목에는 모줏집도 들어섰다.

운종가 큰길 양편을 조선시대 경제를 좌지우지하던 시전(市廛)상인들이 점령했다면, 피맛길은 지금과 마찬가지로 서민들의 골목 문화가 형성됐다. 피맛길은 교보문고 뒤편부터 종각역, 이어 YMCA 뒷골목에서 종로3가역을 거쳐 돈화문로까지 이어졌다. 맞은편에도 조선시대 궁궐의 개폐시간을 알려주는 종루(지금의 보신각. '종로'라는 이름은 여기서 기인했다)부터 흥인문(동대문)까지 골목이 길게 이어졌다.

햇살이 따가운 지난 23일 피맛골 탐방에 나섰다. 예전 피카디리 극장 골목에는 군데군데 대로변처럼 귀금속 상가들이 자리잡고 있었지만, 시간이 멈춘 듯, 오래된 풍경이 눈 안에 자리 들어왔다. 빙빙 돌아가는 이발소 간판 사이로 '이발 3500원, 염색 5000'이란 글자가 보인다.

대로변과 달리 오래된 듯 정겨움이 그래도 남아 있다. 다른 피맛길은 공사 중이거나 이미 현대식 건물이 들어선 상황이다.
▲ 종로3가 부근 피맛길 대로변과 달리 오래된 듯 정겨움이 그래도 남아 있다. 다른 피맛길은 공사 중이거나 이미 현대식 건물이 들어선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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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는 서울 변두리에서도 이발소가 사라진 지 오래다. 아무리 싼 미용실도 보통 만 원 넘게 줘야 하는데, 이곳 주변에 유난히 노인이 많은 탓도 있을 듯하다. 늘어선 식당들 사이로 '○○ 철학관' 간판이 눈에 띈다. 그 위로는 '님과 함께'라는 알 듯 모를 듯 한 간판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세월만큼이나 허름한 여관을 스치듯 지나 걸음을 재촉한다.

탑골공원 앞 횡단보도를 건너자 '피맛골 주점촌'이란 간판이 보인다. 스무 살 청년 시절, 저렴한 가격과 푸짐한 양 때문에 참 많이 왔었고, 세상에 대한 고민과 사랑, 우정 등 그 시절 고민을 함께 했던 곳이다. 하지만 20여년이 지난 지금 이 골목에서 영업하는 상점은 거의 없다. '서피맛골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라는 간판이 무색할 정도다.

도시재개발, 사라진 피맛골

골목 곳곳은 현재 공사중이다. 서울의 골목은 이질적인 시공간의 거대한 콜라주(종이, 인쇄물, 사진 등을 붙이거나 가필하여 작품을 만드는 기법) 같다. 골목 문화를 연구한 이는 서울의 뒷골목에는 "전통적인 아우라(Aura)가 숨어있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서울의 뒷골목이 자본주의 순환의 한 국면을 맞아 '도시재생사업' 명목으로 역사의 뒤안길로 점차 사라지는 추세라는 점도 지적한다.

오랫동안 이 자리를 지켜온 듯 한 저 집도 곳 헐리게 될 것이다.
▲ 이문설농탕 오랫동안 이 자리를 지켜온 듯 한 저 집도 곳 헐리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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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맛골 공사 현장을 보면서 '조선시대의 흔적이 나오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한다. 땅만 파기만 하면 유물이 나온다는 천년고도 경주 이야기가 떠올라서다. 서울도 역사가 깊기는 마찬가지다. 한성 백제시대로 따지면 2000년이 넘고, 조선이 세워진 이후만 따져도 600년 역사가 자리한 공간이 서울이다.

더욱이 종로는 그 시절 가장 번화가였고, 그에 따라 다양한 역사와 문화유산의 흔적이 있을 수밖에 없다. 아니나 다를까 예전 제일은행 본점 앞 인도에 펜스가 설치됐는데, 자세히 보니 '종각역개선공사 내 유적발굴 현장'이라 안내돼 있다. 조사면적은 817.3평방미터, 약 250평 정도다. 이 정도 공간에서 매장문화재 조사가 진행될 정도면 인근의 큰 건물에서도 마찬가지 조사가 진행돼야 하지 않았을까?

공사장 바로 뒤쪽의 높은 빌딩 앞에는 '의금부터'(조선시대 관리나 양반의 윤리에 관한 범죄를 담당하던 기간)라는 표식이 있다. 현대식 고층빌딩을 보면서 조선시대 죄인을 잡아들이는 의금부를 떠올린 이가 얼마나 될까 싶다. 이 안내판이 역사적 상징성을 갖기에는 너무나 초라하다.

종로 일대는 문화재 유구 및 유적이 나올 가능성이 높은 곳이다.
▲ 종각역 문화재 조사 종로 일대는 문화재 유구 및 유적이 나올 가능성이 높은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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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부터 재개발이 추진돼 현재 고층건물이 들어선 청진동 지역도 비슷하다. 안내 간판이 없으면 이곳이 그 옛날 운종가였다는 걸 알기란 쉽지 않다. 건물 1층의 일부 공간을 피맛골과 같은 형태로 만들어 놓은 것이 그나마 다행스러웠다. 하지만 이미 조선 백성들의, 해방 이후 서민들의 문화가 넘쳐나던 피맛골의 문화는 찾을 수 없다. 

'​개발과 보존의 경계'를 보여준 육의전 박물관

그런 의미에서 종로 2가 육의전 빌딩 지하 1층에 위치한 '육의전 박물관'은 역사를 되살린 공간이다. 그것도 고차원적으로 회복시켰다. 육의전 박물관은 문화유산을 모아서 전시하는 통상적 박물관과는 개념이 다르다. 그 옛날, 그 공간을 박물관으로 전환한 케이스다. 역사와 문화유산을, 원래 있던 그곳에서 보존한다는 것은 상징성의 회복이며, 역사의 고차원적인 회복을 의미한다.

육의전 박물관은 개발과 보존이라는 실질적 대안을 제시했다.
▲ 육의전 박물관 터의 변화 육의전 박물관은 개발과 보존이라는 실질적 대안을 제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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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 1층 육의전 박물관의 바닥은 투명 강화유리로 되어 있다. 그 위를 걷다보면(들어가기 전에 덧신을 신어야 한다) 공중 위를 걸어 다니는 듯한 아찔함도 느껴진다. 그 아찔함 바로 아래로 조선시대 피맛골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실제 이곳에는 피맛길의 유구(인간 활동에 의해 만들어진 것 중 파괴되지 않고서는 움직일 수 없는 잔존물 –고고학사전)와 15~16세기 육의전 상인들이 거주하던 집과 창고 터가 전시돼 있다.

이렇게 피맛골이 보존되기까지는 9년이란 시간이 소요됐다. 2003년 12월 지하 터파기 공사 과정에서 장대석(섬돌 층계나 축대를 쌓는 돌)이 발견돼 문화재 발굴조사가 들어가면서 공사는 중단됐다. 2008년에는 육의전 시전행랑터 보전 여론이 높은 상황에서 그 어떤 해결 방향도 보이지 않았다. 제대로 보존하려면 국가 또는 서울시에서 이 부지를 매입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왔다

하지만 심각한 문제가 있었다. 300억 원에 이르는 토지 비용을 마련해야 하는 어려움도 있지만, 종로 일대가 거의 대부분 유적이라는 점에서 육의전 빌딩 터만 매입하는 것은 형평성에 맞지 않았다. 이때 해결책으로 제시된 것이 지하에 선사 시대 유적을 보존하면서 아파트를 올린 프랑스 니스의 테라 아마타(Terra Amata) 고인류학 박물관의 사례를 착안한 방식이었다.

투명한 강화유리 아래로 피맛골 유구 및 육의전의 상점, 가옥의 터가 보존돼 있다.
▲ 육의전 발굴관 전시된 유구 투명한 강화유리 아래로 피맛골 유구 및 육의전의 상점, 가옥의 터가 보존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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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에도 이미 비슷한 사례가 있다. 국립경주박물관은 사회교육원을 증축하는 과정에서 확인된 신라시대 유적을 강화유리로 덮어 보존하는 방식을 택했다. 하지만 내부가 거의 보이지 않는 상태였기 때문에 오히려 유적을 핍박한다는 비난도 받았다. 육의전 박물관은 이와는 다르게 내부가 보이는 강화유리를 채택했다.

이러한 제안은 한국문화유산정책연구소 황평우 소장이 주도적으로 했다. 2008년 5월 당시 언론은 육의전 터 보존 소식을 전하며 "구호에 그쳤던 개발과 보존의 조화. 그 실례를 보여줄 만한 일이 서울 도심에서 일어났다(<연합뉴스>, 2008년 5월 21일자)"고 평하기도 했다. "개발과 문화유산 보존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는 묘책"(<경향신문> 2008년 5월 21일자)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개인적 평가도 비슷하다. 육의전 박물관은 역사, 문화적 차원뿐만 아니라 도시 재개발 과정에서 개발과 보존을 모두 이뤘다는 점에서 의미하는 바가 크다. 세상의 변화는 중심부에서 이뤄지기도 하지만, 많은 경우 경계에서 변화의 시발점이 만들어진다

그런 면에서 육의전 박물관은 거대 도시 서울이 이전 개발 위주의 도시성에서 역사성, 상징성, 문화성, 환경성이 가미된 도시로 탈바꿈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2012년 8월 30일 개관한 육의전 박물관은 현재도 계속 운영중이다.

덧붙이는 글 | 개인 블로그(blog.naver.com/ecocinema)에도 올립니다.



태그:#피맛골, #육의전 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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