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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보, 이것 좀 봐봐."

금요일 저녁, 설거지를 하고 있는데 컴퓨터 앞에 앉아있던 남편이 불렀다.

"멋있지 않냐?"

남편이 보고 있던 것은
'이미림 드라이브 연속스윙'이라는 제목의 동영상이었다. 남편은 작년부터 회사 근처 연습장에서 골프를 배우고 있다.

"LPGA에서 활약하는 선순데, 이번 국내대회에 출전한다네. 한번 구경 가자?"
"비싸잖아."

골프 하면 무조건 '비싸다'는 생각이 있어 구경하는데도 돈이 많이 드는 줄 알았다.

"구경할 땐 1인당 1만 원이야. 봐봐, 이 선수가 키만 더 크지 몸매가 당신과 비슷해."

입장료 1만 원과 그렇게 유명한 선수가 내 몸매와 비슷하다는 말에 골프를 좋아하진 않지만, 호기심이 생겼다. 화면 속의 이미림 선수는 조금 통통하고 키가 큰, 보기 좋은 체형이었다. 주말 특별한 일도 없고 해서 남편의 계획대로 아침 일찍 출발했다.

진행요원이 손에 든 푯말을 머리 위로 올리면 모두 움직이지 말고 조용히 해야 한다.
▲ 골프대회 진행요원 진행요원이 손에 든 푯말을 머리 위로 올리면 모두 움직이지 말고 조용히 해야 한다.
ⓒ 이주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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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회가 열린다는 포천일동레이크골프장까지 두 시간 정도 걸려 도착했다. 골프장 입구에서 어떻게 왔느냐는 안내 요원의 질문에 남편은 '갤러리'라고 했다.

"골프 경기 본다면서…. 여기 미술관도 있어?"
"아줌마!!!"

아니 '갤러리'라고 하면 당연히 미술관인 줄 알지…, 어이없으면 꼭
"아줌마" 하고 소리치며 면박을 주는 남편에 기분이 상했다. 골프경기를 보는 사람을 갤러리라고 하는데. 이유인즉 골프경기를 볼 때는 미술관에서 그림을 관람할 때처럼 조용히 해야 한다는 뜻으로 그리 부른다고 했다.

"뭐, 사전에 교육을 시켜주던가. 모를 수도 있지, 당신 혼자 심심하니 데려와 놓고 이러면 곤란해!"

협박이 통했는지 남편에게 잘 가르쳐 주겠다는 답을 받고 한 무리의 사람들을 쫓아가니 장하나 선수가 경기하고 있었다. 남편은 올 초 친구와 골프연습장에 갔다가 장 선수를 만났다. 그때 받은 사인볼을 고이 모셔놓고 있어서 다른 선수는 몰라도 장 선수는 알았다.

대회 두 번째 날이고, 주말이라 그런지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온 가족부터 제법 많은 수의 갤러리들이 있었다. 갤러리라는 말마따나 진행요원이 'STOP, QUIET'이라고 쓴 푯말을 치켜들면 정말 그 자리에 멈추어 서서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다. 초반에 무심코 준비해온 오이를 베어 물었는데, 그 소리에도 모두 나를 쳐다보아 민망했다.

"볼이 구멍에 아슬아슬 비껴가네!"
"아줌마, 구멍이 아니구 홀컵이야 홀컵!"

장하나 선수의 공이 홀컵에서 조금씩 비껴가며 한 번에 들어가질 못했다. 그럴 때마다 갤러리들이 탄식했다.

"구슬치기할 때처럼 똑바로 보고 넣으면 되는 거 아녀?"
"이 아줌마가 어디 골프퍼팅이랑 구슬치기랑 비교를 하냐. 그린에 라이가 있잖아, 라이!"
"아줌마 되는데, 자기가 단단히 보태줘 놓고는 골프 하는 사람이나 알지, 나 같은 사람이 어찌 아는데?"

언성이 높아지려는 찰라, 장하나 선수와 함께 경기하던 허윤경 선수의 캐디가 조용히 하라고 소리쳤다. 허 선수의 볼이 홀컵에 들어갔다. 갤러리들이 "버디"라고 외치며 환호했다. 한 홀에서 규정 타수보다 한 타 줄이면 버디라고 한단다. 18홀의 총 규정 타수는 72타인데 경기가 끝난 후 72타보다 얼마나 타수가 적으냐에 따라 순위가 결정된다고 했다.

조용히 스마트폰을 꺼내 들었다. 와이파이존이 아니면 인터넷에 들어가지 않는데, 남편 입에서 더 이상 "아줌마" 소리가 나오지 않게 하려면 스스로 해결해야 했다. '골프 라이'를 검색해 보니, '그린의 휘어짐'이란다. 잘 이해는 가지 않지만 그린이 거짓말하는 것처럼 보인다나 머라나…. 아무튼 그린이 평평한 것 같은데, 많이 휘어져 있어서 공이 엉뚱한 방향으로 간다고 했다. 그래서 그린의 라이와 퍼팅라인을 읽는 게 중요하다고 한다.

골프장은 예쁘게 꾸며놓은 조경과 초록의 잔디와 어우러져 멋졌고, 선수들이 친 볼이 허공을 가르며 날아갈 땐 '굿샷'이란 소리가 절로 나왔다.

"당신도 골프 칠 때 이런 데서 하는 거야?"
"여긴 회원제라 아무나 못 오지 난 퍼블릭 가지."

다시 휴대폰을 열었다. 퍼블릭 골프장은 회원제가 아닌 아무나 이용할 수 있는 조금 저렴한 대중골프장이라고 했다.

장하나 선수를 따라서 9홀을 돌고 나니, 처음 왔던 장소와 가까웠다. 관심을 두고 있던 이미림 선수는 열두 시쯤에 경기한다고 하여 중간에 쉬기도 할 겸 라운지로 가자고 했다. 그랬더니 '클럽 하우스'라고 해야 한다고 했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고, 뜻이 통하면 되지 꼭 이름이 정확해야 하냐니까 그래야 한단다.

뒤에서 세 번째 분홍 옷 입은 선수가 안신애 선수다. 남성들한테 인기가 매우 많았다.
 뒤에서 세 번째 분홍 옷 입은 선수가 안신애 선수다. 남성들한테 인기가 매우 많았다.
ⓒ 이주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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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럽하우스 앞에선 한 무리의 남자들이 "안신애다!"하며 뛰어갔다. 남편도 덩달아 그들이 가는 쪽으로 달려갔다. "엄청 잘하는 선수인가 보다" 하고 따라갔더니, 탤런트 뺨치게 예쁜 아가씨가 분홍색 골프복을 입고 골프채를 휘두르고 있었다. 게임을 하기 전 몸을 푸는 연습스윙을 하고 있었는데, 많은 선수들 사이에서도 단연 눈에 띄었다. 그 남자들이나 남편이나 넋이 나간 표정으로 휴대폰으로 사진 찍기 바빴다.

남편 옆구리를 깊숙이 찔러주고, 다른 선수들도 자세히 보았다. 안신애 선수 못지않게 예쁘고 늘씬한 선수들이 많았다. 빨간 모자를 쓰고 유난히 얼굴이 작은 선수가 있어 물어보니 양수진 선수라고 했다. 옷들도 예쁘고 개성 있게 입고서 볼을 때리는데, 이런 운동도 있었구나 싶은 게 정말 멋져 보였다. 나를 닮았다는 이미림 선수는 얼마나 더 보기 좋을까 내심 기대도 되었다.

선수들의 성적이 클럽하우스 앞 대형표지판에 표시되어 있었다. 선수 이름 하나하나를 가리키며 남편은 이 선수는 언제 우승했고 뭐했고 말하는데…, 골프 선수 하면 박세리나 최경주밖에 모르던 나에게 여자선수의 이름을 줄줄이 외는 남편이 신기했고 부아도 났다.

"마누라에 대해 그렇게 줄줄 읊어 봐봐!"

김하늘 선수 이름 옆에 'EVEN'이 보인다. 전날 경기 결과가 규정 타수와 같다는 말이다.
 김하늘 선수 이름 옆에 'EVEN'이 보인다. 전날 경기 결과가 규정 타수와 같다는 말이다.
ⓒ 이주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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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심통을 부리려다 이미림 선수의 경기가 시작할 때가 되어 그 정도로 끝냈다. 선수 소개를 하는데 오전에 못 본 이름표가 보였다. 김하늘 선수 옆에 영어로
'EVEN'이라고 쓰여 있어 물어보니, 전날 선수가 친 공이 규정 타수와 같을 때 'EVEN'이라고 한다고 했다. 0이라고 해도 될 거 같은데, 굳이 영어로 표기해야 하나 싶어 말하려다 또 아줌마 소리 들을까 봐 참았다.

전날 이미림 선수가 2위를 해서 1위를 한 김세영 선수와 함께 갤러리들이 유독 많았다. 같은 색의 옷이나 모자를 쓰고 응원하는 펜클럽 아저씨들도 있었다. 아이돌 오빠부대만 있는 줄 알았는데 중년의 아저씨 부대는 골프장에 있었다.

"여보, 정말 내가 이미림 선수 닮은 거 맞어?"

이미림 선수가 드라이버를 치는 모습을 보고 난 심각하게 물었다. 내가 질문한 의도를 간파한 남편이 나의 따가운 눈초리를 피하며 말했다.

"미국 가서 햄버거를 많이 먹었나 봐, LPGA 진출하면 초반에 엄청 고생한다잖아."
"내가 아무리 허벅지가 두꺼워도 그렇지…."

이미림 선수의 허벅지는 안수진 선수와 같은 가늘고 늘씬한 그런 허벅지가 아니었다. 참말로 꿀벅지였다. 그래서 그런가, 볼을 칠 때 다른 선수보다 더 힘이 있어 보였다.

끝까지 경기를 함께하지는 못했지만, 골프장을 떠나며 골프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나무 아래서 도시락을 먹던 가족들의 모습, 선수가 버디를 하면 함께 환호하고 놓치지 않고 함께 안타까워하는 갤러리들의 모습에서 골프장에 골프만 하러 오는 것이 아니란 걸 알게 되었다. 골프를 하지 않더라도 집 가까운 골프장에서 골프대회를 한다면 꼭 한번 가보라고 말하고 싶다. 용어나 규정을 몰라 조금은 당황스러울 수는 있겠으나 1만 원의 입장료가 전혀 아깝지는 않은 새로운 경험을 할 수 있을 것이다.

3라운드까지 마친 우리투자증권 레이디스 챔피언십 최종 우승자는 김세영 선수가 되었다. 그 조그만 체격에서 어찌 그리 파워가 나오는지….

'김세영 선수, 다음에도 응원합니다. 꿀벅지 이미림 선수도 화이팅!!!'


태그:#KLPGA, #이미림, #겔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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