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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비역이라면 들어봤을지 모른다. 국방부가 전시에 보호해야 할 중요 자원을 순위대로 매겨놨는데 1위가 항공기, 10위권 언저리가 군견, 보병은 20위권 어딘가에 있다는 이야기.

이게 사실인지는 알 길이 없지만, 춘계 진지공사와 제설작전을 몇 번 겪어보고, 다른 부대의 사고사례를 브리핑 시간에 매주 접하다 보면 어느새 그 말이 정말일지도 모른다는 나름의 확신이 생긴다. 군인은 국방부의 20위쯤 되는 재산이니까. 죽으면 죽었지 항공기가 파괴되고 군견이 죽는 사태가 오면 안 되는 것이다.

'노동'이란 이미 임계점을 넘어선 그 어딘가에 있다

죽으면 죽었지 항공기가 파괴되고 군견이 죽는 사태가 오면 안 되는 것이다. 사진은 영화 <용서받지 못한 자> 스틸컷
 죽으면 죽었지 항공기가 파괴되고 군견이 죽는 사태가 오면 안 되는 것이다. 사진은 영화 <용서받지 못한 자> 스틸컷
ⓒ 영화사청어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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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에서는 아이들에게 가르친다. 대한민국은 땅이 좁고 천연자원은 빈약하다. 따라서 사람이 곧 자원이다. 군대는 그 정수다. 제설부터 건설, 대민지원까지 인력으로 모든 것을 해결한다. 몇 천원의 생명수당과 약간의 부식이면 모든 일을 군말 없이 해낸다.

사회는 다를까. 한국의 주요 수출품은 자동차, 반도체, 철강, 핸드폰이다. 모두 노동집약형 산업이다. 부가가치보다 노동인력과 임금 경쟁력에 승부를 거는 분야다. 인건비와 물품 단가 모두 낮아야 시장점유율을 담보할 수 있다.

영세한 기업일수록 인건비에 더 의존한다. 생산 시스템에 투자할 여력이 없어서다. 이익을 내기 위해 자연히 노동시간은 길어진다.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회원국의 2012년 연간 근로시간 평균은 1709시간이다. 한국은 이보다 383시간을 더 일한다. 회원국 중 두 번째로 긴 노동시간이다.

1위는 2317시간의 멕시코, 3위는 2013시간의 칠레다. 자영업 시장은 상황이 더 열악하다. 싼 가격으로 서비스를 제공하려면 업주는 자기 인건비를 깎아먹으며 일해야 한다. 그렇게 오래 일해도 노동생산성은 작년 기준으로 OECD 국가 중 23위다.

이건 단지 효율의 문제가 아니다. 한국에서 노동이란 이미 임계점을 넘어선 그 어딘가에 있다. 2013년 고용노동부에서 발표한 '산업재해 현황분석' 자료에 따르면 2012년 국내에서 산업재해로 숨진 근로자는 1929명이다. 매일 다섯 명 이상의 근로자가 현장에서 목숨을 잃는다. 부동의 OECD 1위다. 비정규직 비율 역시 1위다.

반면 근로자 근속연수는 평균 5.1년으로 OECD회원국 평균(10년)의 절반 수준이다. 쉽게 말해 한국의 근로자들은 OECD 회원국들 중 가장 오래, 가장 위험하게, 가장 불안정하게, 가장 비생산적으로 일한다. 

그렇게 여러 부담을 한꺼번에 안고 일해도 30대 초반 직장인이 스스로의 힘으로 꾸릴 수 있는 최상의 주거 모델은 서울 부도심에 있는 원룸 정도다. 서울의 가구소득 대비 주택 가격비율(PIR)은 전세가 5.7, 자가가 9~17이다.

아무리 못해도 9년치 월급을 숨도 쉬지 않고 모아야 한다. 그나마 이것도 어느 정도 번듯한 직장일 때에나 가능한 얘기다. 가까스로 내 집을 마련하면, 대출이자 상환과 자녀 등록금, 그보다 갑절이 넘는 결혼비용, 빈약한 국민연금, 마지막으로 48.6%에 이르는 노인 빈곤율이 기다리고 있다.

여기서 얼마나 더 전투적으로 살 수 있을까

<피로사회> 서문에서 한병철은 "한국인이면 누구나 자기를 착취한다는 것이 무슨 말인지 즉각 이해할 것"이라 했다. 여기서 얼마나 더 전투적으로 살 수 있을까. 그 전투적 삶이 전 사회에 걸쳐 당연시됐다는 데 근원적인 공포가 있다. 평범하게 살기 위해선 비범하게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 내 건강과 나라의 법이 정해준 한도를 뛰어 넘어야 생존을 장담할 수 있다. 환경이 열악해질수록 삶의 전투성은 더 배가된다. 과적을 하고, 과속을 하고, 과로를 한다. 때로는 기업이 그것을 강요한다. 그러다 일이 터진다.

대개의 경우 국가와 기업은 책임지지 않는다. 2010부터 2012년까지 산업안전보건법을 위반한 기업들의 형사 입건 수는 2045건이다. 사업주가 징역형을 받은 경우는 62건(0.03%)뿐이다. 64%는 벌금형, 32%는 무혐의 처분으로 끝났다. 벌금이라 해봐야 원청업체는 1000만 원, 하도급 업체와 현장소장은 500만 원 이하다. 기업은 사고 수습이 끝나면 새 사람을 데려와 쓴다. 과적과 과속과 과로가 반복된다. 사고는 다시 터진다. 이번에도 책임지는 이는 없을 것이다. 비극은 그렇게 예고돼 있었다.

한국은 사람만이 자원인 나라다. 하지만 모든 직군을 통틀어 귀하게 쓰인 적은 없었다. 사람은 언제나 싸고, 만만하고, 흔했다. 국가는 사람이 간절하지 않았다. 국가는 배가 뒤집히는 순간에도 업체와의 이해관계, 내각 수장들의 의전에 신경을 썼다. 국가가 사람에게 간절해지는 순간은 고용률과 출산율 증감 추이가 나올 때다. 어쩌면, 국가에게 국민이란 군대에 가고, 핸드폰을 사주고, 취업을 하고, 노동으로 돈을 벌고, 대출받아 집을 사서 국력 증대에 이바지하는 기초 자원, 딱 거기까지였는지도 모를 일이다.

얼마 전, 교육부 산하 한국교육개발원이 '2013년 교육기본통계'를 발표했다. 내용에 따르면 2013년 전국의 초등학생 수는 모두 278만4000명으로 전년대비 5.7% 감소했다. 2006년 대비 123만9000여 명이 줄었다. 1980년대 평균치의 절반 수준이다. 생산가능 인구 역시 2013년을 정점으로 서서히 감소중이다. 추세대로면 30년 내로 사람이 귀해지는 시대가 온다. 사람을 물처럼 쓰던 시대는 종말을 고할 것이다. 그땐 뭔가 달라져 있을까. 비싼 육아 비용, 높은 집값, 육아시설의 부족. 어쩌면 그 어떤 것도 저출산의 본질이 아닐지 모른다. 

작년 11월, 오바마 미 대통령은 배트맨을 꿈꾸는 백혈병 어린이 마일스에게 직접 영상 메시지를 보냈다.

"훌륭하다 마일스, 고담시티를 지켜라."

어린이가 배트맨과 함께 은행을 터는 리들러를 체포하는 이벤트에 참여하는 동안 샌프란시스코 경찰은 시내 중심부의 차량을 전면 통제해 아이의 안전을 확보했다. 캘리포니아 주 검찰청은 체포된 리들러와 펭귄맨을 재판에 넘기겠다며 검사의 사인이 담긴 기소장을 작성했다. 샌프란시스코 시장과 경찰서장은 "우리 도시를 구해줘서 고맙다"며 마일스에게 표창장을 수여했다.

그것은 일종의 자기 과시였다. '우리 국가는 그게 누구든 단 한 명이라도 소홀히 않는다'는 자랑. 물론 이벤트와 진실은 다르다. 허나 그것이 일회성 퍼포먼스일 뿐이고 실제로 국가에 의해 모두가 구제 받을 순 없을지라도, 그 의지를 표명할 줄 아는 사회의 잠재력은 질적으로 다를 수밖에 없다. 적어도 그런 이벤트조차 할 수 없는 국가보다는, 사람을 경제적 가치로만 판단하는 국가보다는, 국민을 더 간절히 여길 테니까.


태그:#자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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