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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유정의 히말라야 환상방황> 책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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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딱딱한 사회과학서나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모르겠는 난해한 문학책보다는 공감가는 에세이를 선호하는 편입니다. 그 중에서도 최고를 꼽자면 여행 에세이입니다. 경험해보지 못한 다른 세상의 이야기를 전해주고 글쓴이의 내면 모습이 여행 중에 겪는 각종 시행착오 속에서 드러나는 점도 재미있기 때문이죠.

때문에 유명인들의 여행 에세이에 관심이 가지만 글쓴이가 소설가나 시인이라면 일종의 편견이 생깁니다. 여행에는 집중하지 않고 여행지의 풍경만 자신의 문학적 감성을 뽐내고자 묘사한다거나, 보통 여행이라면 꼭 생기기 마련인 시행착오는 쏙 빼고 멋지고 우아한 여행만 그릴 것 같다는 생각이 먼저 들기 때문이죠.

<7년의 밤>이나 <28>을 워낙 인상 깊게 읽은 터라 정유정 작가의 첫 에세이가 나온다고 했을 때는 기대를 많이 했지만 저의 편견 때문에 걱정을 한 것도 사실입니다. 특히 생애 첫 해외여행을 히말라야의 안나푸르나로 택했다니 너무 감성만 충만한 책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하지만 프롤로그를 읽는 순간 저의 편견을 반성했습니다. 정유정 작가의 유쾌한 여행 에세이 <히말라야 환상방황>을 소개합니다.

다소 엉뚱한 히말라야 여행기

정유정 작가는 <28>을 내놓은 뒤에 심한 슬럼프에 시달린 모양입니다.

"욕망이라는 엔진이 꺼져버렸다. 이야기 속 세계, 나의 세상, 생의 목적지로 돌진하던 싸움꾼이 사라진 것이었다. 상상도 해본 적 없는 일이었다. 그에 대한 대비가 있을 리 만무했다. 그저 혼란스러웠다. 책상 위에 쌓아둔 다음 소설 자료와 책, 새 노트가 신기루처럼 비현실적이었다. 덮쳐오는 허망함에 당혹을 넘어 공포를 느꼈다. 누군가 내 상태를 알아차릴까 봐. 다시는 글을 쓰지 못하게 될까 봐. 고작 소설 몇 편 쓰고 무너지는구나, 싶어서. 나는 강아지처럼 낑낑대다가 끝내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 프롤로그 中

그런 그녀에게 주어진 처방은 여행, 그리고 그 장소를 그녀의 소설 <내 심장을 쏴라>의 주인공 승민이 동경하던 히말라야로 정합니다. 어떻게 보면 숙명적으로 떠나게 된 여행이지만 그녀의 여행에 낭만이 낄 틈은 없었나 봅니다.

생애 첫 해외여행을 히말라야로 가겠다는 그녀의 선언에 여행을 떠나기 전까지 주변 지인들의 걱정이 끊이질 않고 남편은 회유가 먹히지 않자 고산병 관련 산더미 같은 자료를 안겨주기도 합니다.

겨우 준비를 마치고 김혜나 작가와 함께 히말라야로 떠나서는 향신료 마살라가 들어간 음식에 적응 못하고, 변비 때문에 고생하고, 쏘롱라패스가 가까워지자 고산병으로도 힘들어 합니다.

작가로서, 그리고 여성으로서 지키고 싶을 이미지가 있을 법도 한데 정유정 작가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엉뚱하면서 뭔가 부족한 자기 자신을 그대로 드러냅니다.

작가 특유의 문장력까지 가미되어서 작가가 그저 흘리는 이야기라고 생각되는 짧은 문장들도 작품의 후반부에 복선(?)으로 작동하기도 하니, 한 편의 소설을 읽는 기분으로도 읽을 수 있는 독특한 에세이가 만들어졌습니다.

또한 작품의 완성도를 높이는 편집상의 배려도 돋보입니다. 매 챕터마다 여행일정을 해발고도까지 표시된 간략한 그림으로 묘사하여 하루하루 정유정 작가 일행이 얼마나 이동했는지, 얼마나 힘들했을지 그림으로 바로 알 수 있어 에세이에 더 몰입할 수 있었습니다.

읽어보고 싶은 다른 작품들

여행기 속에 등장하는 다양한 문학 작품들은 기록을 남길 당시 작가의 마음과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기에 이 에세이를 읽고 나면 찾아 읽어보고 싶은 충동이 듭니다. 특히 소설가가 쓴 여행기라서 그런지 더욱 절묘한 부분에 인용되는 작품 구절들이 참 매력적입니다.

작가가 히말라야까지 가져간 유일한 책인 조용호의 소설집 <떠다니네>로 시작해서, 여행 중 잠못 이루는 밤에 떠올린, 잠을 잘 수 있는 사람과 잘 수 없는 사람들 사이의 거대한 심연을 묘사한 아이리스 머독의 <수녀와 병사>, 정유정 작가가 신으로 모시는 스티븐 킹이 쓴 섬뜩한 이야기인 <생존자>, 그리고 전설의 소설이라 불리는 W. E. 보우만의 <럼두들 등반기>까지...

무엇보다도 정유정 작가의 재등단작인 <내 심장을 쏴라>는 작가가 안나푸르나를 첫 해외여행 장소로 선택하게 된 결정적 작품이기도 하니 꼭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에세이를 통해서 정유정 작가의 매력에 빠지셨다면 작가의 작품세계를 살펴보시는 것도 괜찮은 선택이 될 것 같습니다.

아참, '네팔병'이라는 병이 있다고 합니다. 누구나 한 번 히말라야에 다녀오고 나면 다시 히말라야에 가게되고 만다는 불치병. 이미 그 병에 걸린 것 같은 정유정 작가의 환상방황기를 읽고나면 이 병에 전염될 수도 있으니 고산지대 여행에 적합치 않은 호흡기 질환을 앓고 계시거나, 한 달 이상 여유로운 휴가를 낼 수 없는 직장에 근무하시는 분들은 독서에 특히 주의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