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영화 <변호인>의 한 장면.
 영화 <변호인>의 한 장면.
ⓒ 위더스필름

관련사진보기


올해 초 천만 관객 돌풍을 일으킨 영화 <변호인>. 송우석 변호사의 통쾌한 변론의 배경에는 국가가 민간인에게 자행한 폭력을 다룬 '부독련 사건'이 있었다. 국밥집 아들 진우는 가난한 여공들을 가르치는 야학 교사를 하다가 난데없이 모처로 끌려가 처참한 고문을 당한다. 하지도 않은 짓을 자백하라는 억지 협박과 동료를 배반해야 한다는 양심의 가책에 시달리며. 자식의 시신이라도 찾으려고 영도다리 밑으로, 동래산성으로 헤매고 다닌 어머니는 60일 만에 온몸에 피멍이 든 채 부들부들 떠는 넋 나간 아들을 만나고 오열한다.

알려진 것처럼 영화는 '부림사건'이라는 실제 사건을 배경으로 한 것이다. 부림 사건은 1981년 부산의 '양서판매이용협동조합'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지식인, 교사, 대학생 22명을 구속한 부산 최대의 공안 사건이었다. 광주 항쟁의 피비린내 위에 집권한 전두환은 정권의 정당성이 문제가 되자, 여론의 관심을 돌리고 정권도 안정 시키려는 의도로 억지 사건을 꾸며내 사회운동 세력을 탄압한 것이다.

지난 15일, 사건의 실제 인물인 설동일 전 진실화해를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 사무처장을 부산에 있는 '노무현재단 부산지역위원회' 사무실에서 만났다.

"제가 1956년생이고 75학번이니까 그 일 일어났을 때 나이가 스물 여섯이었어요. 대학 졸업하고 취직한 지 얼마 안 됐을 때고. 그때 얘기를 하려면 대학 시절 얘기부터 안 할 수가 없네요."

호리호리한 체구에 맑은 선비 같은 인상의 그는 서울서 내려온 필자에게 커피와 사탕을 권하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경남 밀양에서 태어나 일곱 살 때부터 부산에서 살아온 그는 경남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75년에 서울대 농대에 입학했다.

교수 꿈꾸며 입학했지만... 한 달 만에 김상진 열사 자결

입학할 때 꿈은 교수가 되는 것이었는데, 이것이 한가한 신선놀음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는 데는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설동일 전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사무처장
 설동일 전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사무처장
ⓒ 성장훈

관련사진보기


"입학한 지 한 달이 조금 지나서, 김상진 열사가 박정희 유신체제에 항거해 할복 자결하는 사건이 일어났지요. 바로 '긴급조치 9호'가 선포되고 휴교령이 떨어졌어요. 할복은 직접 보지 못했고, 그날 철야 집회를 했다는 것만 전해 들었어요. 한두 달 부산에서 놀다 와보니 학교 분위기가 완전히 바뀌었더군요."

학생회를 하던 선배들이 모두 강제 징집을 당했기 때문에, 선배라고 해봐야 복학한 2, 3학년들이 최고참이었다. 서클 활동을 금지하고 서클룸도 없애버린 뒤라, 자취방에 모여 선배들과 술 마시면서 이야기하는 것이 전부였다.

그래도 여름 농촌활동은 갔다. 공개적으로 사람을 모집할 수 없어 많아야 20명을 넘지 못했다. 긴급조치 9호에 반하는 것은 무엇이든 1년에서 3년 이상의 실형을 각오해야 하던 때이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긴급조치 9호 이후 만 2년간 감히 아무도 데모를 하지 못했어요. 김상진 할복 이듬해인 1976년 5월에 관악 캠퍼스에서 벌어진 김상진 장례식 집회 말고는. 그런데 1977년 6월에 관악에서 다시 시위가 벌어졌고, 농대에서도 저와 같은 학번 친구 셋이 시위를 벌였지요."

4학년이 되던 1978년. 농업 관련 비밀 서클 활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던 그는 이 시위에 끼지 못했다. 그해 초에 강제 휴학을 당해서 부산에 내려와 있었기 때문이다. 미리 분위기를 감지한 학교 당국이 일부 학생을 강제 휴학 시켰는데, 누군지는 모르니까 설 전 처장을 찍은 것이다. 그동안 농활 가는 문제 등으로 학교랑 많이 싸워왔던 그는 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지목대상 1호였다.

마침 부산에서는 김광일 변호사 등이 관여한 '양서판매이용협동조합'(아래 양서협동조합)이 발기하는 시기였다. 당시 협동조합에 상근하던 소진열 선생 덕분에 양서협동조합 조합원들을 비롯한 많은 부산지역 민주인사들을 만날 수 있었다. 전화위복이라고 해야 할까. 어떻게 보면 더 많은 인연과 배움을 얻은 고마운 시기였다. 그러나 이 인연이 훗날 그의 발목을 잡아맬 잔인한 족쇄가 될 줄은 그때는 미처 몰랐다.

"9월에 2학기 복학을 했는데, 마침 지난 6월 구속자들 재판이 있었어요. 후배들이 방청을 많이 갔지요. 남문에 있는 법원에서 학교까지 다 같이 노래 부르면서 걸어왔어요. 와서 보니까 어머니가 와 계시는 거예요. 함께 (부산) 내려가자고 울며 하소연하면서. 학과에서 집으로 연락을 했겠죠. 그래서 결국은 또 내려왔어요. 두 번씩이나 내려오니 얼마나 쪽팔려요. 그래서 그때는 양서협동조합을 안 가고 혼자서 도서관만 다녔어요. 내가 가진 문제의식의 답을 책에서 찾아보자 싶어서."

그러던 중 운명적인 인연이 찾아왔다. 1학기 휴학 당시 양서협동조합에서 만난 친구 하나가 부산대 학생들의 교육을 맡아달라고 한 것이다. 서울서 했던 모델 그대로 부산 학생들에게 한 달간 학습을 시켰다. 학생들 중 하나가 야학 선생이어서 그 교실을 빌렸다. 그가 77학번을 가르쳤고, 그들은 다시 78, 79 후배들을 조직해 훗날 부마항쟁 등에서 부산대 학생운동의 주요 세력으로 역할을 하게 된다. 그는 이듬해인 1979년에 4학년으로 복학했고, 순조롭게 졸업을 했다.

"졸업 후 농민운동과 농사일을 배우기 위해 충남 예산에 자리 잡고 있던 선배 댁에 내려갔어요. 그런데 그 무렵에 남민전 사건이 터졌습니다. 저는 그 사건과 아무 관련이 없었지만 시절이 시절인지라 본의 아니게 그곳에 피해를 입힐 수도 있다는 생각에 그 지역에 가는 것을 포기하게 되었어요.

계획이 틀어지니 한동안 막막해졌죠. 1981년에 농협중앙회에 입사한 것은 그래도 언저리에서나마 농민운동을 배울 수 있는 곳을 선택하고 싶어서였어요. 첫 발령지는 당시 울주군에 있던 농협중앙회 언양 지소였는데, 6개월 수습을 막 끝낸 7월 30일에 형사들이 들이닥쳤지요."

영장도 없이 근무 중에 끌려가... 40일간 지옥 같은 고문

부림 사건은 알려진 대로 서울의 학림 사건에 부산의 운동 조직을 엮어 '부림'이라는 이름을 꿰어 맞춘 것이다. 후에 청와대 시민사회수석을 지냈고 당시 도서출판 광민사 대표였던 이태복 등이 부산의 학생운동 조직을 만났는데, 얼마 후 공교롭게도 서울에서 학림 사건이 터졌다.

공안당국은 그들과 접촉한 부산의 조직원 중 한 명을 6월에 연행했다. 영화 <변호인>에서는 국밥집 아들로 나오는 인물이다. 이후 7월 30일을 전후해 서울의 학림 사건에서 이름이 나왔던 7명을 1차로, 곧이어 부마항쟁 시기에 조사한 민주인사와 자발적 학습소모임 학생들 7명을 추가로 불법 연행한 뒤, 소위 '통닭구이'를 포함한 끔찍한 고문과 협박을 통해 '용공 사건'을 만들어낸 것이 부림 사건이다.

"근무 중에 연행을 당했지요. 세 명이 와서 '가자'고 하면서 대뜸 눈을 가리더군요. 택시를 타고 어딘가로 끌려가서 눈을 떠보니까 벽이 온통 붉은색이고, 독방에 책상 하나만 있어요. 주변에는 고문 받는 친구들의 비명 소리가 진동하고. 일 주일 내내 두들겨 맞았어요.

때리는 게 간단해요. 군복으로 갈아입힌 다음 혼자 가만히 놔둬요. 그리고는 '임마, 빨리 불어!' 하지요. '북한 갔다 온 거 빨리 불어라. 간첩 만난 거 알고 있다. 다 불어라.' '예? 그런 거 없는데요.' '이 새끼 봐라, 여기가 어딘지 알고?' 그리고 7, 8명이 몰려와서 때립니다. 혼자 때리면 나중에 찍히니까. 그러고 나서 종이 한 장 주고 '적어라', 해요. 뭘 적어야 할 지 모르죠. 난 한 게 없는데.

부산하고의 인연은 1978년 휴학 때 맺었던 인연뿐이에요. 이태복하고는 만난 적도 없고. 출판사 사장이라서 이름은 들어봤지요. 그러면 '이 새끼 봐라' 하고 또 두들겨 패는 거지요. '임마 여기 다 끌려왔어! 누구누구도 다 들어왔어! 너 공산주의 하려고 했잖아! 다 적어!'

뭘 적어야 할지 모른 채로 맞는 게 한 일 주일이에요. 시커멓게 멍이 들고 나면 맞아도 안 아픈데, 그러면 다른 곳을 골라서 또 때려요. 우리는 전기고문은 없었는데 뒤늦게 서울에서 잡힌 이호철이는 전기고문을 받았다고 하더군요. 40일 후에 검사를 처음 만났어요. 어느 날 의사가 와서 약을 발라주더니 다음 날 검사가 현장에 나타났지요. 그게 한나라당에서 16, 17, 18대 국회의원을 지낸 최병국이에요."

'무뢰한'들에게 속수무책으로 맞으면서 그는 검사를 만나기만을 오매불망 기다렸다.

'그 사람은 그래도 지식인이고, 최소한 사실 그대로 내 이야기를 들어줄 것이다. 이들과는 다른 사람일 것이다.'

하지만 마침내 검사의 얼굴을 마주했을 때, 그는 그것이 순진한 착각에 지나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처음엔 3일만 있으면 나갈 거라고 생각했어요. '내가 뭘 한 게 없는데, 뭔가 착오가 있었을 것이다. 검사만 만나면 내보내 주겠지.' 천지 사방에 진동하는 비명 소리, 그 지옥 속에서 그 생각 하나로 버텼지요. 하지만 막상 만난 검사는 나를 때린 놈들보다 더 독종이었어요. '사실은 그게 아니고요.' 하소연하자마자 '니가 다 쓰고 지장까지 찍었는데 무슨 소리냐.' 천연덕스런 답변이 돌아왔지요. 고문한 놈들은 만약 제가 진술을 번복하면 풀려 나가더라도 다시 잡아오겠다고 협박했고요. 그러니 제가 뭘 할 수 있었겠어요."

지옥 같은 고통 속에서 만난 새로운 인연, 노 변호사

구속영장도 없이 한 달이 넘게 고문과 가혹수사를 받은 뒤, 9월 초가 되어서야 영장이 나왔다. 유치장에서도 구치소에서도 접견 금지 명령 때문에 아무도 만날 수 없었다. 고문관이 아닌 외부인을 처음 만난 것은 11월이 되어서였다. 구치소에 가니까 더 이상 맞지는 않겠다는 생각에 차라리 행복했단다.

혹시나 법정에서 진실이 밝혀지지 않을까 했던 실낱 같은 마지막 기대는 7년이라는 검사의 구형량 앞에서 깨끗이 무너졌다. 1심에서 3년 6월, 2심에서 2년 6월을 선고받았다. 1983년 8월에 광복절 특사로 사면되어 나왔으니 실제로는 2년 정도를 감옥에서 지낸 셈이다.

지옥 같은 고통 속에서 만난 새로운 인연도 있었다. 당시 부림 사건의 변호인이었던 노무현 변호사가 그다. 부림 사건의 담당 변호사는 총 네 명이었는데, 노 변호사는 설 전 사무처장의 담당 변호사는 아니었다. 하지만 법정에서 본 그의 당당한 모습은 33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또렷이 남아있다.

"우리는 완전히 주눅이 들어서 지금 생각하면 말도 안 되는 재판을 받고 있었죠. 맞아도 엔간히 두들겨 맞아야 정신을 차리죠. 근데 그 분이 들어오더니 막 따지기 시작하는 거예요. 우리는 다 포기한 것을, 따져봤자 소용없다고 생각한 것을. 영화에 나온 장면들이 거의 다 사실이에요. 그것에 힘을 얻어서 2심 때는 우리도 정신 차리고 따지기 시작했지요. 영화에도 그 대목이 나오지만, 노 대통령이 압수된 목록에 나오는 책들을 다 찾아 봤다고 하더군요. 그게 그분이 스스로 깨우치게 된 계기겠지요."

부림 사건은 세무 전문 변호사였던 노무현 전 대통령이 사회 문제에 눈떠 인권 변호사의 길을 걷게 된 계기로 잘 알려져 있다. 노 대통령은 정계 입문 후 스스로 종종 이 이야기를 하고 다니곤 했다. 

"그 청년들이 변호사인 저를 처음에는 믿지 않았어요. 공포에 질린 그 눈빛, 이 사람이 참 억울하게 당했구나, 도와주어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마주 쳐다보기 싫은 눈빛 있죠. 그 비굴하고 의심에 찬 눈빛, 섬뜩하게 느껴질 만큼. 멀쩡한 사람을 데려다 고문을 해서 그렇게 만들어 놓은 겁니다. 제가 그 후 인권운동에 빠져들게 된 것은 그런 경험 때문이었습니다." (노무현 인터뷰, 2002년 2월 15일) 

영화 <변호인>의 실제사건인 '부림사건'이 지난 2월 13일 부산지방법원에서 열린 재심에서 33년만에 무죄 선고를 받았다. 판결 직후 고호석씨를 비롯한 재심 청구인들이 악수를 나누고 있다.  오른쪽부터 최준영,이진걸,노재열,설동일,고호석.
 영화 <변호인>의 실제사건인 '부림사건'이 지난 2월 13일 부산지방법원에서 열린 재심에서 33년만에 무죄 선고를 받았다. 판결 직후 고호석씨를 비롯한 재심 청구인들이 악수를 나누고 있다. 오른쪽부터 최준영,이진걸,노재열,설동일,고호석.
ⓒ 정민규

관련사진보기


그로부터 33년이 지난 올해 2월, 설 전 처장을 포함한 부림 사건 재심 청구인 다섯 명이 법원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다. 영화 <변호인>이 흥행한 덕분이라고 오해하는 사람들도 있으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부림 사건 관련자들은 그동안 꾸준히 재심 청구를 해왔고, 일부 승소 판결을 받아냈다.

참여정부 이전부터 부림 사건의 재심을 강력히 권유했던 것은 문재인 변호사였는데, 당시 일부 관련자들이 재심을 청구하여 이명박 정부 시절에 보안법 부분을 제외하고 무죄 판결을 받은 바 있다.

참여정부 시절 부림 사건의 발단인 서울의 학림 사건은 물론이고, 부림 사건과 유사한 오송회 사건, 아람회 사건 등은 모두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의 진실규명을 거쳐 무죄 확정 판결을 받았다. 그러나 부림 사건 관련자들은 당시 변호인이었던 노 대통령에게 부담을 끼치지 않으려고 과거사정리위원회에 진실규명 신청을 하지 않았다. 진실 규명이 되더라도 대통령이 압력을 행사했다는 불필요한 오해를 일으킬 소지가 있기 때문이었다. 과거사위원회에 신청을 했다면 별 어려움이 없이 진실이 밝혀졌을 텐데 그러지 않아 어렵게 재심 재판을 하고 있는 것이다.

33년 만에 받은 무죄 판결... 그러나 즉각 상고한 검찰

"판결 일 주일 후 부산지검이 바로 대법원에 상고를 한 것은 어떻게 보세요?"
"우리나라에서 가장 완고한 조직이 검찰이죠. 참여정부 시절 진실화해위원회와는 별도로국방부, 경찰청, 국정원 등에서 과거사위원회를 만들었는데, 검찰만 안 만들고 버텼어요. 상식적으로 명백히 무죄인데도 즉각 상고하잖아요. 한참 바뀌어야 되는 조직이에요. 고문 현장에 와서 보고도 고문 흔적이 없다고 하는 사람들이니 말 다했죠."

감옥에서 나온 이후, 그는 본격적으로 사회 운동가의 길을 걸었다. 어떤 것이 맞는 길일까, 젊은 날 한때의 고민들은 감옥살이를 통해 깨끗이 정리가 됐다. 국가의 폭력이 어떤 것인지, 세상이 어찌 돌아가는지를 이미 본 그에게 더 이상의 고민은 필요 없었다. 그리고 그 것은 곧 노무현 변호사와의 인연이기도 했다.

"같이 감방살이 한 친구, 후배들도 있고, 부산에서 시민사회운동이나 학생운동을 하는 선·후배, 양심적 지식인, 종교인, 법조인, 의료인의 도움도 있어 분위기가 좋았죠. 이런 분들과 함께 부산공해추방시민운동협의회를 만들었어요. 1985년에는 부산민주시민협의회가 만들어졌는데, 노무현 변호사가 상임위원장과 노동분과를 맡으셨고요.

노 변호사는 사무실에 '노동법률상담소'를 만들어서 노동자 권익 옹호와 함께 부림 사건 관련자들의 활동 공간도 열어 주셨어요. 영화 <변호인>에서 국밥집 아들로 나온 그 친구가 사무장으로 일했지요. 이런 일들이 쭉 쌓여서 1987년 6월 항쟁으로 터졌어요."

1987년 노동자 대투쟁 당시 노무현 변호사는 국민운동부산본부 상임집행위원장이었다. 1987년 6월 여름, 부산의 거리 집회는 늘 변호사나 신부님들이 맨 앞에 섰다. 노무현 변호사는 전경과 맞서 물러서는 법이 없었다.

"노 변호사님은 부산민주시민협의회 창립식 때 길거리에 눕다시피 하면서 전경에게 끌려가고 그랬어요. 얼마나 고마웠는지요."

6월 항쟁 이듬해 노무현 변호사는 부산 서면에 '노동문제연구소'를 설립했다. 연구소의 활동 중 주목할 만한 것은 '노조 고문변호사 제도'다. 기업들은 다 고문변호사가 있는데 노동조합도 고문변호사가 있어야 한다며, 10여 명의 변호사단을 꾸리고 노조들과 계약을 체결해 법률 상담을 해주도록 했다. 작지만 고문 비용도 받았다. 부산, 울산, 경남에 있는 노동조합 중에 노동 법률이나 노조 활동, 소송 문제에서 노동문제연구소의 도움을 받지 않은 곳이 거의 없었다고 설 전 처장은 말했다.

'국가 폭력' 목도 후 택한 운동가의 길

"1988년 8월에 저는 신평공단에 노동자복지연구소라는 단체를 만들었어요. 사상공단은 노동자 상담소가 있었는데 거기는 없었으니까. 1989년 4월에는 부산 지역의 16개 노동단체가 모여 부산 노동단체협의회를 만들었고, 제가 사무국장을 맡았죠. 노동문제연구소가 없어지면서 그 사업을 노동단체협의회가 맡고 노조 고문변호사 계약도 승계했어요. 거기서 노동문제연구소의 자료를 받아보니까 70개 노조가 고문변호사 제도를 맺고 있는데 실제 활동은 열 몇 군데만 하더군요. 제가 맡은 이후로 그 숫자를 200곳까지 올렸어요. 자연히 우리 단체도 월 200만원의 수입이 들어왔고요."

노무현 변호사는 1988년에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국회의원이 되고 나서도 노조 파업 현장에 다니는 등 노동운동에 대한 애정은 여전했다. 국회의원이 되고 제일 먼저 한 일이 노동3권 개정안을 만들어 국회에서 통과시킨 것이다. 노무현 자신이 1987년 이 법으로 구속 수감되었기 때문이다(3자 개입 금지 조항). 하지만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없을 만큼 잘 만들었다고 칭찬받았던 이 개정안은 노태우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로 결국 무산되고 말았다.

"청와대 계실 때 사저에 가서 몇 번 뵌 적이 있지요. 가식이 없고 진실한 분이에요. 초선 의원 시절 3당 합당을 거부하는 등 '튀는' 행동을 하니까 <조선일보>에서 찍어서 악의적인 기사를 썼어요. 요트를 소유한 재산가라는 둥. 그게 유명한 <조선일보> 소송 사건의 발단이었지요. 주변에서는 정치인이 조선을 상대로 소송하는 건 무덤 파는 짓이라고 모두 말렸지만, 그분은 끝까지 하셨고 결국 소송에서 이겼어요. 하지만 그때부터 <조선일보>와는 완전히 각이 서고 말았지요."

부림 사건 수감자들이 출감하자 100명에 달하는 사건 관련자 전부를 크라운 호텔로 초청해서 술을 사고 2차까지 낼 만큼 배포도 있는 사람이 노 전 대통령이었다. 엄혹한 전두환 정권 시절이었지만 그는 권력의 눈치를 보는 사람이 아니었다. 1995년 부산시장 선거 출마 당시 설 전 사무처장은 기획단장을 맡아 캠프에서 뛰었다.

한 번은 잘 알던 신부님이 노 후보를 본인 축일 행사에 초청한 일이 있었다. 신부님의 본뜻은 신자들이 많이 모이니 와서 선거 운동을 하라는 것이었는데, 노 후보는 한쪽에 가만히 서 있다가 신부님한테만 인사를 하고 바로 나오더란다. 1분 1초를 아껴야 할 중차대한 시기였지만, 그 자리를 선거운동에 활용하는 것은 신부님에 대한 도리가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가까이서 본 모습이 어땠느냐고요? 그냥 무뚝뚝한 경상도 남자예요. 겉으로는 그리 따뜻하거나 자상하신 성격은 아니에요. 하지만 옆에서 함께 한 세월로 느끼는 거죠, 그분이 어떤 사람인지. 선거 운동할 때는 시장에 다니면서 악수하는 것을 정말 싫어하셨어요. 표에 도움이 되냐 안 되냐가 아니라, 내가 가고자 하는 길에 적합한 행동이냐 아니냐를 늘 생각하셨으니까요. '농부가 밭을 탓하겠느냐'고, 2000년 총선에서 부산에 출마했다가 떨어지고 나서 하신 말씀은 유명하지요."

옆에서 본 노무현은 '가식 없이 진실한 사람'

인터뷰 당일 부산에 있는 노무현 재단 사무실에서 찍은 사진. 가운데가 설 전 사무처장.
 인터뷰 당일 부산에 있는 노무현 재단 사무실에서 찍은 사진. 가운데가 설 전 사무처장.
ⓒ 성장훈

관련사진보기


설 전 처장은 1994년에 부산 지역 노동상담소들의 성과를 통합한 '노동자를 위한 연대'를 만들어 사무처장으로 일했다. 2001년에는 부마항쟁 20주년을 기념해 건립한 '민주공원' 관장으로 부임했다가, 노 대통령 재직 시절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가 만들어지면서 사무처장으로 임명되어 일을 했다.

쉴 틈 없이 달려온 삶. 왜 그렇게 바쁘게 사셨냐고 했더니 "누군가는 해야 될 일인데 할 사람이 없어서" 이 일 저 일 맡다보니 그렇게 되었다는 대답이다. 과거사위원회 일을 그만두고 내려와서는 노무현재단 부산지역위원회 운영위원장을 맡았다가, 그 후 '혁신과 통합'에 관여하게 돼 민주당 부산시당 공동위원장을 하기도 했다.

그는 얼마 전 부산 시내에서 차로 40여 분 떨어진 양산에 집을 구해서 자리를 잡았다. 지난 1985년에 교사인 부인과 결혼해 아들 하나를 두고 있다. 앞으로 무엇을 하고 싶으시냐고 물었더니 "이제는 놀고 싶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이제는 그간 바빴던 생활을 접고 노년을 잘 정리하고 싶네요. 마당 있는 집에서 개 키우고 텃밭도 가꾸고요. 박근혜 정부가 좀 잘해 주었으면 좋겠는데 그럴 가능성이 보이지 않아 이런 생활이 부담스럽기도 합니다. 그렇다고 제가 해결할 수 있는 일도 아니고요. 후배들이 더 열심히 잘 해주시길 기대해야죠."

삶은 자신의 선택이라고 누가 그랬던가. 뜻한 바가 있었지만 시대가 허락하지 않아 포기할 수밖에 없는 삶도 있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는 누구나 크든 작든 그런 삶을 선택한 분들에게 빚을 진 수혜자이다. 육십 평생을 '멸사봉공(滅私奉公)'의 자세로 살아온 그가, 이제 비로소 모든 사회적 의무와 짐을 내려놓고 말 그대로 개인적인 삶과 휴식을 누리길 진심으로 바라며 인터뷰를 마쳤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허핑턴포스트코리아'에도 송고했습니다.



태그:#설동일, #부림 사건, #변호인
댓글7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대다수 사람들을 무의식적인 소비의 노예로 만드는 산업화된 시스템에 휩쓸리지 않는 깨어있는 삶을 꿈꿉니다. 민중의소리, 월간 말 기자, 농정신문 객원기자, 국제슬로푸드한국위원회 국제팀장으로 일했고 현재 계간지 선구자(김상진기념사업회 발행) 편집장, 식량닷컴 객원기자로 일하며 글을 쓰고 있습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