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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에 다녀온 3월의 첫째주 금요일과는 달리, 계획대로 하루일을 마무리하며 상경을 준비하던 중에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어머니, 여기 XX초등학교병설유치원이에요. 대기순서가 되시는데 입학하시겠어요?"

그 말로만 듣던 병설유치원? 그곳의 입학은 '로또'라 불리기도 하고, 어떤 엄마는 아이가 병설에 당첨되는 순간 덩실덩실 춤을 추고 싶다고 말하는 그곳?

"아, 네~ 물론이죠. 가야죠."

앞뒤 안 가리고 "오케이"라고 대답부터 했다.

1월 초 인사발령이 나고 정신없이 이사할 집을 구해 이사한 것이 2월말. 그러는 중에 초등학교야 어찌된다고 해도 어린이집이나 유치원은 빈 자리가 거의 없었다. 집에서 아무도 봐줄 사람이 없는 맞벌이 부부의 딸로 태어난 둘째는 특별한 이유없이 단지, 엄마의 인사 이동이란 사유로 초등학교 조기입학 직전까지 갔었다. "넌 7살이지만 초등학교 입학하면 무조건 8살이 되는 거야"라고 교육까지 받으면서 말이다.

그러던 때에 생각도 못했던 유치원 대기입학 통보. 월요일 휴가까지 내면서 병설에 입학시켰다. 물론 간단한 행정처리를 위해서 전에는 반차로 해결되던 때가 있었다. 하지만, 광주 지방발령 이후 4시간 이상 걸리는 거리는 반차로 해결이 안 되고, 맞벌이 엄마에게 돈보다 더 소중한 휴가를 온전히 하루 다 냈다. 더구나 한주의 시작인 월요일에.

월요일 휴가는 역시 부담이었다. 화요일이 지나 수요일. 오전부터 밀린 일을 정리하느라 정신 못차리다가, 오후에는 미리 계획되어 있던 직원들 워크숍을 진행하였다. 오후 2시부터 시작되는 워크숍, 발표가 있어 자료를 보던 중 핸드폰 진동소리를 못 들었는지 옆에 있는 직원이 전화기를 건네주었다.

"이거 누구지? 천안 엄마, 천안 엄마인데요. 전화 함 받아보세요."

천안 엄마! 우리 시어머니시다. 일하는 며느리 보신 죄로 올해부터 큰아들 내외와 마찬가지로 주말부부 시작하신, 뵐 때마다 죄송한 우리 어머니. 고개를 숙이고 소리 죽여 "여보세요?" 전화를 받으니 유치원 뭐라뭐라 하신다. 지금 전화 못 받는다고 급히 말하고 끊는 순간 휴대폰이 온 몸을 부르부르 마구마구 떨어댄다.

"네, 어머니~ OO가 유치원에서 친구들이랑 잘 놀았어요. 화장실도 다녀오고..."
"아니, 저 지금 통화가 어려워서..."

그 사이 직원들은 워크숍을 위해 마련된 자리를 채워 앉았고, 시작을 기다리는 간절한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하지만, 예상 외로 적응을 잘하는 대기입학자의 생활을 설명하고 싶으신 유치원 선생님의 말씀은 계속되었다.

"근데, 변비 있어요? OO 응가가 토끼똥처럼 퐁퐁... 변보고 조금 힘들어하네요."
"아니, 그게... 제가 지금 전화를..."

어쩔 수 없이 그냥 끊었다.

어른에게도 마찬가지이지만 아이를 키우는 엄마에게 아이가 태어나서 얼마간, 그리고 커가는 동안 건강 상태는 대변의 모양과 색으로  쉽게 알 수 있다. 그래서 유치원 선생님과 마찬가지로 엄마들에게는 정말 중요한 관심사다. 그 중요한 정보를 친절하게 설명하려는 유치원 선생님의 호의를 그냥 끊어 버리고 시작한 워크숍 발표. 침착하고 부드럽게 잘 진행했다. 그런데, 발표의 1/3을 넘어가고 있는 순간 노트북이 멈췄다.

"아이구, 바쁘신 분들 모신 좋은 자리라 컴퓨터도 조금 긴장했나 봅니다."

웃음을 유발하며 침착하게 위기를 모면하고 발표를 이어가 끝을 보려는 순간, 노트북이 또 다시 멈췄다. 아니 이번에는 아예 전원이 나가 버렸다. 그 순간 맨 앞자리에 앉아계신던 본부 최고봉의 얼굴이 울그락 불그락해지시고, 오른쪽 다리로 꼬던 자세를 다시 왼쪽으로 바꿔가며 꿈틀꿈틀 불편한 심기를 그대로 나타내셨다. 프리젠테이션 발표 중에 두 번이나 컴퓨터가 뻑나다니... 워크숍 시작 전 사전에 모두 체크하고 리허설까지 해봤는데 아무 이상 없던 컴퓨터, 왜 그러니?

수요일이라 야근을 줄이고 일찍 퇴근해 가족과 시간을 즐기라는 가정의날, 가족과 떨어져 지방근무 중인 엄마는 '두번 뻑난 컴퓨터' 때문에 아이들 표현대로 '엄마는 마시면 토'라는 소주 한 잔 할까 하다가 참고 들어왔다. 하루 종일, 아니 매일매일 열심히 움직여도 늘 부족하고 아쉬운 엄마. 잔뜩 꼬여 버린 머릿속엔 두 번 꺼진 컴퓨터와 토끼똥 생각만 가득하다. 그래서  휴~ 크게 한 숨 한번 내쉬지만, 속상한 맘은 이내 눈물을 보이고야 말았다. 아이고... 어쩔 수 없이 수첩 속 고이 숨겨놓은 명약을 꺼낸다.

엄마가 보면 힘이 날 거라는 운동회때 찍은 슈퍼맨 사진
▲ 슈퍼맨 엄마가 보면 힘이 날 거라는 운동회때 찍은 슈퍼맨 사진
ⓒ dong3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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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만 봐도 힘날 거라는 슈퍼맨 사진! 엄마는 가정의날 홀로 숙소로 돌아와 이 사진을 보며 슈퍼맨에게 말을 겁니다.

"아마, 진짜 슈퍼맨 엄마였더라도 오늘 같은 날은 울었을 거야. 그지?"

라고 말입니다. 이래 저래 복잡했던 오늘, 이렇게 조금씩 머릿속 청소를 시작합니다.


태그:#병설유치원, #맞벌이, #슈퍼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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