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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흘1리의 마을 상징 찾기는 마을의 미래를 여는 열쇄를 주민 스스로 찾는 흥겨운 잔치였다.
 선흘1리의 마을 상징 찾기는 마을의 미래를 여는 열쇄를 주민 스스로 찾는 흥겨운 잔치였다.
ⓒ 전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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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2월 15일 토요일. 일주일째 주룩 주룩 비 오고 바람 불더니 우는 아이 울음 뚝 그치듯 거짓말처럼 하늘이 열리고 모처럼 봄날 같은 아침이 밝았다.

이장님은 날씨가 좋아 밭에 일 하러 나가고 안 오실까 오히려 걱정이었지만, 두 시쯤부터 마을 어귀가 북적이더니 세 시가 가까워지자 마련한 의자가 모자랄 정도로 체육관이 후끈 달아올랐다. 아침부터 체육관을 쓸고 안내문 쓰기를 거들던 어린이 주민들부터 시내로 출퇴근 하느라 자주 얼굴 볼 수 없었던 청년회, 함께 나눠 먹을 도토리 칼국수 끓이고 돼지고기 삶느라 바쁜 부녀회, 느린 걸음으로 아픈 무릎 쥐고 나오신 어르신들까지 선흘1리 주민들이 한자리에 둘러앉은 것이다.

이제 곧 우리 마을의 상징을 함께 찾는 '리민 큰마당'이 열릴 참이다.

람사르마을 선흘1리

선흘1리는 조선 중엽 때부터 이미 규모가 컸던 제주도의 유서 깊은 중산간 마을이다. 지금은 300호 정도 되는 집들이 한라산 기슭에 소복이 모여 귤농사를 지으며 살아가고 있다. 이런 중산간에 자연스레 마을이 생긴 까닭은 바로 물이 있기 때문이었을 텐데, 마을의 젖줄이 되어준 선흘곶 동백동산 숲과 여러 습지들은 지금도 아름답게 지켜지고 있다.

습지를 품은 곶자왈숲 동백동산의 생태적 가치는 일찍부터 인정을 받아 1971년 문화재보호구역으로 지정되었고, 2010년에는 환경부 습지보호지역, 2011년에는 람사르습지, 2013년에는 국가지질공원의 지질명소로 지정되기에 이르렀다. 특히, 이렇게 생태적으로 풍요로운 자연이 훼손되지 않고 마을과 더불어 지켜져온 것에 대해 높이 평가받아 2013년에는 선흘1리가 '람사르 시범마을'에 이어 '환경부 생태관광지'로 지정되기도 했다.

2011년부터는 마을주민과 전문가들, 공무원들이 함께 '선흘1리 생태관광 협의체'를 구성해 주민 스스로 습지 생태교육 프로그램과 여행 프로그램을 개발 운영하는 일을 지원하고 있다. 오늘(15일) 잔치도 선흘1리와 생태관광 협의체가 함께 팔을 걷어 부치고 준비한 자리다.

체육관을 쓸고 닦고, 예쁘게 장식하고, 맛난 떡과 사탕도 준비 완료!
 체육관을 쓸고 닦고, 예쁘게 장식하고, 맛난 떡과 사탕도 준비 완료!
ⓒ 이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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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지 토론은 성공할 수 있을까?

체육관 안에는 "삼춘~! 우리 마을 자랑이 머우꽈?" 하고 커다란 현수막이 걸렸고, 이벤트회사도 울고 갈 멋진 풍선 장식이 기둥을 수놓았다. 벽에는 주민이 하나하나 찍은 마을 사진이 촘촘히 전시되어 어르신들이 그 앞에서 한참을 들여다보고 계신다. 시원스레 둥그런 원탁 여덟 개가 쭉 펼쳐졌는데, 잔치에 빠질 수 없는 떡과 사탕, 마음껏 쓰고 그리며 토론하시라고 큰 마을 달력과 색색깔 예쁜 싸인펜, 메모지가 원탁마다 놓여졌다.

마을 주민 90여 명에 응원하러 와주신 이웃 마을분들, 지역 예술가들, 환경 전문가들, 공무원들까지 100명이 훌쩍 넘는 인원이 설렘과 기대로 뿜어내는 열기가 넘실댄다. 사회를 맡은 청년회장의 개회사로 드디어 역사적인 마을 상징 찾기가 시작되었다.

마을 상징은 왜 필요한지, 다른 마을의 상징은 어떤 것이 있는지, 서로 존중하며 누구도 소외되지 않고 토론하기 위해 필요한 태도 등에 대한 발표와 안내가 끝난 뒤에 본격 토론으로 들어갔다. 1차 토론은 원탁별로 우리 마을 상징을 뭘로 하면 좋을지 저마다 생각을 말하고 의견을 나누는 시간이다.

사실, 여기가 오늘 잔치의 큰 갈림길이다. 과연, 어르신들께서 저마다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해 주실 것인가! 어느 마을이나 그렇듯이 그동안 이장님이나 반장님이 안건을 가지고 나오면 그것이 좋다, 싫다는 의견을 말하는 데는 익숙하지만 아예 백지에서부터 각자의 생각을 내놓고 그것을 투표해 모아나가는 상향식 토론을 제대로 경험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런 시도를 마을에서 했지만 잘 안됐다는 얘기는 많아도 잘했다는 성공 사례는 찾기가 어려웠다. 마을 노인들이 토론을 제대로 할 수 있겠냐고, 몇 가지 안을 미리 제시하자는 의견도 있었지만, 그래도 한 번 해보기로 했다. 도화지에 아무 것도 없어야 진짜 자신의 그림을 그릴 수 있는 거니까. 그리고 믿었다. 누구나 그리고 싶은 마음속의 그림이 있다는 걸.

기분 좋은 웃음으로 모두 손을 흔들며 역사적인 마을 상징 찾기 주민 큰마당이 시작되었다. 백지 토론은 과연 성공할 수 있을까?
 기분 좋은 웃음으로 모두 손을 흔들며 역사적인 마을 상징 찾기 주민 큰마당이 시작되었다. 백지 토론은 과연 성공할 수 있을까?
ⓒ 전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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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장이 아니라 대화가 시작되다

처음엔 그랬다. 여자삼춘들은 머뭇머뭇 말을 꺼내지 못하고, 남자삼춘 한두 사람이 의견을 주도하기도 했다. 하지만 곧 봇물은 터졌다. 원탁마다 섞여 앉은 청년들이 "삼춘, 어릴 때 뭐하고 놀아수꽈?" "제일로 자랑할 만한 게 뭐 마씸?" 제안이 아니라 질문을 던지자 대화가 시작됐고, 대화 안에 마을의 소중한 장소들이, 마을의 오랜 먹을거리가, 마을의 귀한 동식물이, 켜켜이 쌓인 마을의 역사가 살아나왔다. 원탁마다 피어올라 체육관을 가득 채운 이야기 소리, 한두 사람의 목소리가 아니라 저마다 모두 주고받는 대화로 어우러진 그 소리와 광경은 참으로 가슴 뭉클한 장면이었다.

40분 동안의 원탁 토론으로 나온 의견을 모두 모아보니 24개나 되는 상징이 모아졌다. 주민들의 마음속에서 나온 마을 상징 후보들을 한 번 읊어보자.

동백동산, 먼물깍, 동굴, 도토리, 제주고사리삼, 반못, 선흘분교, 마을공공시설, 마을담, 4.3성터, 가시나무 도토리, 밤오름, 양하, 밧덴물, 곤물통, 백서향, 오소리, 멍석, 유채꿀, 댕유지, 고사리, 말·소, 엉덩물·새로판물, 혹통·돗썩은물, 신낭알·불칸낭까지 그 면면이 다양하고 재미있다. 제주어에다가 지역의 역사가 담긴 것들이라 죄다 해설이 필요한데, 일이 커지므로 안타깝지만 생략하도록 하자.

이 후보들을 모두 벽에 써넣으며 자신이 낸 의견에 대한 이유와 지지를 호소하는 발표가 이어졌고, 이번에는 한 사람당 다섯 표씩 던질 수 있는 투표에 들어갔다. 어느새 흥이 오른 마을 주민들이 스티커를 다섯 장씩 받아 쥐고는 벽에 우르르 모여들어 여기에 붙여라, 저기에 붙일 거다, 내가 낸 건 어디 있냐, 시끌벅적한 가운데 마음에 둔 후보를 찾아 혹시 떨어질까 스티커를 야무지게 붙이는 모습은 장관을 이루었다.

"어릴 때 뭐하고 놀아수꽈?" 질문을 던지자 머뭇거리던 삼춘들, 말문이 열렸다.
 "어릴 때 뭐하고 놀아수꽈?" 질문을 던지자 머뭇거리던 삼춘들, 말문이 열렸다.
ⓒ 이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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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탁마다 대화의 봇물이 터지자 체육관의 공기가 바뀌기 시작했다.
 원탁마다 대화의 봇물이 터지자 체육관의 공기가 바뀌기 시작했다.
ⓒ 이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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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에 대한 애정과 자부심 가득한 삼춘들의 이야기가 종이 위에 가득하다.
 마을에 대한 애정과 자부심 가득한 삼춘들의 이야기가 종이 위에 가득하다.
ⓒ 이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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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탁에서 나온 의견을 발표하고 모두 모으니 마을 상징 후보가 무려 24개!
 원탁에서 나온 의견을 발표하고 모두 모으니 마을 상징 후보가 무려 24개!
ⓒ 전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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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커를 받아 쥔 주민들은 신나게 붙였다. 자신이 바라는 마을 상징에.
 스티커를 받아 쥔 주민들은 신나게 붙였다. 자신이 바라는 마을 상징에.
ⓒ 전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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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의 미래는 누구의 손에서 시작되는가

그리하여 영광의 여섯 후보가 가려지고, 이 가운데 하나를 굳이 뽑지 않고 모두를 마을의 중요한 상징으로 삼게 되었다. 동백동산, 선흘 자연습지, 가시나무 도토리, 제주고사리삼, 4.3성터, 동굴, 이 여섯이 그것이다. 마을의 젖줄이 되어준 습지들, 전세계에서 오직 동백동산에만 사는 귀한 식물인 제주고사리삼, 예로부터 마을의 대표 음식 재료가 되어준 가시나무(종가시나무) 도토리, 이 모두를 품고 있는 동백동산, 제주에 드물게 남아있는 4.3 유적인 성터, 곶자왈숲 곳곳에 형성되어 있는 용암 동굴들. 주민들이 가진 마을에 대한 사랑과 자부심으로 뽑힌 상징들이었다. 놀랍게도 마을의 역사와 문화, 자연이 두루 포함되었다.

그동안 대부분의 마을에서 마을의 중요한 결정이 마을지도자들과 외부 전문가들에 의해 좌우되곤 했다. 그러다보니 주민들은 그저 형식적으로 동원되어 박수치고 끝나기 일쑤였다. 주민들 스스로 마을 상징을 찾는다는 것은 마을의 정체성을 함께 고민하고 토론하고 하나로 모아간다는 것이다. 이 결정이 누구의 손에 있느냐는 앞으로 마을의 미래가 누구의 손에서 시작되느냐 하는 정말 중요한 과정이다.

원탁은 구석진 자리 없이 누구나 평등한 자리다. 어린이도 청년도 장년도 노인도 둥글게 둘러앉은 작은 원탁으로부터 의견이 길어 올려져, 이것을 놓고 서로 지지 발표를 하며 공정히 겨루고, 모두가 인정할 결과를 스스로 이끌어내는 기쁨을 주민들은 경험했다. 잘 될까 하는 걱정을 보란 듯이 뒤집으며 마을에 대한 애정과 자발성을, 마을의 저력을 보여준 것이다.

마지막 결과를 지켜보는 주민들의 얼굴에 가득한 기대
 마지막 결과를 지켜보는 주민들의 얼굴에 가득한 기대
ⓒ 전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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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지에서 시작한 상향식 원탁 토론은 모든 주민을 결정의 주체가 되게 한 뜻깊은 의미를 남겼다.
 백지에서 시작한 상향식 원탁 토론은 모든 주민을 결정의 주체가 되게 한 뜻깊은 의미를 남겼다.
ⓒ 전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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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시간 반에 걸친 전에 없이 재미진 토론이 끝나고 부녀회에서 준비한 음식이 들어왔다. 가시나무 도토리로 만든 칼국수 솥에서 김이 오르고, 돼지수육에 막걸리 한 사발씩 돌아간다. 아무도 소외되지 않고 모두가 주인공인 흥겨운 잔치가 무르익고 있다.

동백동산은 제주도 중산간 지역의 원 식생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곶자왈숲이다.
▲ 마을 상징의 하나로 꼽힌 동백동산 동백동산은 제주도 중산간 지역의 원 식생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곶자왈숲이다.
ⓒ 이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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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물깍은 동백동산이 품은 대표적인 습지다. 동백동산 일대는 2011년 람사르습지로 지정되었다.
▲ 마을 상징의 하나로 꼽힌 먼물깍 습지 먼물깍은 동백동산이 품은 대표적인 습지다. 동백동산 일대는 2011년 람사르습지로 지정되었다.
ⓒ 이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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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고사리삼은 전세계에서 오직 동백동산에만 서식하는 세계적으로 1속 1종인 희귀식물이다.
▲ 마을 상징의 하나로 꼽힌 제주고사리삼 제주고사리삼은 전세계에서 오직 동백동산에만 서식하는 세계적으로 1속 1종인 희귀식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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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선흘리, #마을 상징, #람사르마을, #동백동산, #제주고사리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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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 중산간마을 선흘1리에 살면서 마을출판사를 꾸려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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