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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생태론'은 생태문제가 사회문제에서 비롯됐다는 기본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한다
▲ 머레이 북친의 사회적 생태론과 코뮌주의 '사회적 생태론'은 생태문제가 사회문제에서 비롯됐다는 기본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한다
한국사회 진보운동에서 '생태'라는 화두는 여지껏 주변부 의제였다. 20세기 NL-PD의 이념적 경쟁구도 속에서 '생태주의'는 사회변혁의 정체성을 흐리게 하는 개량주의적 사조로 여겨졌다. 

이른바 생태적 대안운동은 생태공동체, 마을공동체와 같이 비자본주의적 생활양식을 통해 자본주의를 극복하기 위한 노력으로 표현되었다. 생태적 대안운동은 사회운동의 지평을 확장하고 자본과 국가, 산업의 틀을 넘어서고자 했으나, 사회변혁의 구체적인 경로에 합류하지 못한 채 중간층 운동, 은둔형 운동, 탈정치 운동이라는 혐의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이는 생태적 대안운동이 과학적이고 체계화 된 이론에 근거하기보다 자치와 자율, 협력과 연대, 생태와 공생의 원리로 삶을 재구성하기 위한 집합적인 움직임에 그쳤다는 한계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다.

생물종의 대량 멸종과 기후변화, 화석연료의 고갈에 따른 에너지 위기는 단순한 위기 차원을 넘어 인류의 생사존망이 걸린 문명사적 전환을 요구하고 있다. 바야흐로 '풍요의 시대'에 누려왔던 삶의 전면적인 재편 없이는 지구적 위기를 극복할 수 없다는 목소리가 높다.

담론 수준에 머무르는 생태적 대안운동이 주류 사회운동을 대체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사회운동이 '생태'라는 화두를 적극적으로 끌어안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다. 진보의 재구성은 마땅히 진보적 사상 이념의 재구성이라는 치열한 자기 성찰을 동반해야 한다. 시대를 반영하지 못하는 사상은 공감을 얻기 힘들고, 반대로 올바른 사상만이 난세를 개척하는 힘을 발휘할 수 있다. 시대와 사상의 변증법적인 관계다.

'사회적 생태론'에 주목하는 이유

미국의 생태-코뮌주의 운동가 머레이 북친(Murray Bookchin, 1921~2006)은 '사회적 생태론'의 창시자로 불리운다. <사회적 생태론과 코뮌주의>는 인류가 직면한 두 가지의 위기인 '사회적 위기'와 '생태 위기' 해결을 위한 북친의 정치적 대안이자 새로운 사회에 대한 비전을 소개하는 책이다. 총 네 편의 소논문으로 구성된 이 책은 짧은 분량에도 북친의 '사회적 생태론'에 쉽게 접근하고 이해하는데 손색이 없다.

"21세기가 과연 혁명의 시대가 될 것인가 아니면 가장 반동적인 시대, 우울한 일상의 회색 시대로 전락할 것인가는 전적으로 사회 혁명가들이 지난 두 세기의 혁명 경험에서 축적된 이론, 조직, 정치적 자산으로부터 어떤 사회운동, 강령을 만들어내는가에 달려있다." (113쪽)

20세기 사상가인 북친은 "새롭고 포괄적인 혁명적 전망이 필요하다"며 "이 전망은 끊임없이 변하고 있는 자본주의 체제 내에서 대부분의 사회가 겪게 될 보편적 문제들을 체계적으로 다룰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

협동조합운동마저도 가차없이 개량이라고 할 정도로 북친의 사상은 급진적이다. 현대 자본주의는 구조적으로 비도덕적이다. 도무지 도덕적인 호소가 먹히지 않는 이 체제를 그대로 두고서는 광범위한 모순을 극복할 수 없다는 것이 그의 입장이다. 그가 보기에 자연을 지배의 대상으로 간주하는 '자연지배'의 관념은 계급과 위계구조가 없는 사회가 도래해야만 비로소 극복될 수 있다.

북친의 '사회적 생태론'은 생태문제가 사회문제에서 비롯됐다는 기본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한다. 생태문제를 사회문제로부터 분리하거나 둘 사이의 관계를 경시하는 것은 환경위기의 근본적인 원인을 오도하는 결과를 낳는다. 자연을 지배와 정복의 대상, 혹은 생명을 도구화하는 현상은 자본주의 위계적인 문화와 계급관계에서 비롯된 것이다. 따라서 생태적 가치와 태도는 실질적인 제도의 변혁과 확립으로 뒷받침되지 않으면 헛된 외침으로 그칠 공산이 크다.

북친이 개인적 삶과 의식을 개혁하고 일상에서 영성을 추구하는 '근본 생태주의'를 비판하는 이유다. 그는 "도덕적 호소에 몰두하는 운동은 마치 생태사회가 개인의 태도를 바꾸고 정신적으로 새로워지면 달성된다는 식의 환상을 심어줌으로써 현실의 권력관계를 흐리게 만든다"고 날을 세운다.

"국가가 국가 '이상의' 역할을 하느냐 그 '이하의' 역할을 하느냐 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국가의 힘에 맞서는 가운데 국가 체제를 대체할 이중권력 수립운동의 역량, 즉 지역운동, 연방운동, 공동체 운동의 역량에 달려있다." (89쪽)

북친은 사회문제와 생태문제 해결의 중심지를 지역과 마을의 공동체로 본다. 이 점에서는 기존의 생태적 대안운동과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그는 지역자치운동에서 연방에 이르지 못하는 운동을 경계했다. 즉, 일정 지역 내에서 공동체들이 상호 책무의 네트워크를 형성하는데로 나아가지 못하고 연방을 강제할 수 없다면 지역 자치운동은 그 어떤 의미에서도 진정한 정치운동이라고 할 수 없다. 북친은 연방을 구성하는 공동체들이 책임을 공유하고, 연방에 파견된 대표들이 공동체의 요구에 무한 책임을 지며, 연방에 파견된 대표를 공동체가 소환할 권리를 갖는 구조의 확립을 '코뮌주의'라고 했다.

'생태'와 '탈 성장' 화두, 어떻게 끌어안을까

'사회적 생태론'의 반자본주의 노선은 '생태'라는 화두로 기존의 사회운동과 북친의 사상이 적극적으로 조우할 수 있는 충분한 가능성을 열어준다. 시장과 국가를 넘어서는 21세기 대안 운동의 기획에 북친의 사상은 마땅히 실현가능한 대안의 하나로써 적극 검토되어야 할 것이다.

'생태'라는 화두를 어떻게 끌어안을 것인가와 더불어 진보가 고민해야 할 지점은 '성장'에 대한 입장을 정리하는 것이다. 오랫동안 '진보는 경제성장에 관심없고 무능력하다'는 보수진영의 정치적 공격을 받아왔다. '성장이냐 분배냐'의 낡은 프레임을 넘어 복지국가 담론이 대중성을 획득하기 시작한 것도 불과 얼마 되지 않았다.

상황은 진일보했지만 진보는 여전히 '성장주의'에 관해 방어적 태도를 취하고 있다. 양극화 시대, 공정한 분배를 통한 복지의 확대가 성장에 기여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라는 논리는 단기적으로는 유의미할지 몰라도 기존의 패러다임을 근본적으로 바꾸지는 못한다. 자본주의 하에서 복지제도는 결국 지속적인 성장을 통한 분배라는 틀 속에서 유지될 수 있기 때문이다.

북친이 주장하는 생태적 방향의 사회적 재구성이란 필연적으로 '성장주의'와의 단절을 의미한다. 그는 '생산력의 고도화'를 전제로 한 성장 담론을 기반으로 하는 기존 사회주의 노선에 비판적 태도를 취한다. 석유정점과 화석연료의 고갈은 성장위주의 자본주의 산업문명의 재편을 요구한다. 지속가능한 미래를 위한 '탈 성장' 진보의 다른 상상력이 절실히 필요하다. 진보가 생각했던 것과는 다르게 세상이 매우 빠르게 변하고 있다는 북친의 경고에 진지하게 귀를 기울여야 하지 않을까.

"세상 사람, 즉 대중도 과거의 진보적 사회주의자들이 생각했던 것과는 너무도 다르게 변하고 있으며 향후 수십 년간은 더욱 그럴 것이다. 자본주의가 초래하고 있는 변화들, 그리고 그것이 야기하는 새롭고 광범위한 모순들에 대해 주의해야 한다. 그러지 못할 경우, 우리는 지난 두 세기 동안 거의 모든 혁명운동을 실패로 이끈 치명적 오류를 반복하게 될 것이다." (127쪽)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제 블로그 http://blog.yes24.com/xfile340 에도 게재했습니다.



머레이 북친의 사회적 생태론과 코뮌주의

머레이 북친 지음, 서유석 옮김, 메이데이(2012)


태그:#머레이 북친, #생태주의, #사회적 생태론, #자본주의, #코뮌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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