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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장 탈출

無爲刀
▲ 무위도 無爲刀
ⓒ 황인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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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공터로 나오는 데 발소리가 들렸다. 건너편 통로에서 짧은 도를 양 허리에 찬 사내와 건장한 사내가 복도에서 뛰어 오더니 황급히 계단으로 올라갔다. 양도(兩刀)를 찬 사내는 비영문에서 본 자이고 그 뒤를 따르는 자는 젊은 녀석으로 창(槍)을 꼬나쥐었다. 창은 간(杆: 창의 몸통)이 일곱 자 정도이고 창날에 안쪽을 향해 구(鉤)를 붙인 구겸창(鉤鎌槍)이다. 그들이 밖에 나가더니 일촌도 안 돼 양도를 찬 사내가 급히 내려와 등잔불이 희미한 왼편 복도로 갔다.

아마 그쪽 통로에 서생이 감금돼 있는 것 같았다. 무영객은 숨을 죽이고 다음 공격을 구상했다. 그때 통로 쪽에서 다시 발걸음이 들리며 이번에는 다른 사내가 양도보다 한 걸음 앞서 나왔다. 그자는 보통 체격에 회색 장포를 입고 허리에는 장검을 찼다. 송충이 같은 눈썹을 잔뜩 찌푸리고는 화가 난 표정으로 계단을 올라갔다.

무영객은 일단 계단과 공터의 등잔불을 껐다. 어둠이다. 어둠은 그에게 친구이자 천군만마와 같은 우군이다. 다섯 보마다 있는 등을 끄며 오른쪽 복도로 향했다. 앞서 나온 자들의 발걸음 소리를 추정해 보면 삼십 보에서 삼십오 보 정도의 길이가 되는 것 같았다. 그 중간에 몇 명의 인원이 있을지 모른다. 그는 한 발 한 발 소리 죽이며 고양이 보법으로 전진했다.

예진충은 소주칠검 제갈진의 사체를 살펴보았다.

"제갈진은 상대의 초식에 당한 게 아냐?"
"네?"

척숭이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잘 봐, 제갈진의 상처는 베어진 게 아니라 박힌 거야. 상처의 깊이로 보면 상대가 찌른 게 아니라 자신의 몸으로 칼끝을 향해 꽂힌 것으로 볼 수 있어."

예진충이 상흔을 요모조모 살피며 담담하게 말했다.

"하지만 상대가 찌른 상처로 볼 수도 있지 않습니까."
"그렇지 않아 상처의 각도를 봐. 밑에서 위로 찔린 것이야. 상대가 찌른다면 키가 작은 편인 제갈진의 상처가 수평이나 위에서 밑으로 나야 해. 또 늑골이 부서지지 않고 심장을 꿰뚫은 걸로 봐서 칼날을 옆으로 뉘였어. 늑골의 사이로 칼날이 들어갈 수 있게 한 거지. 이는 상대의 동작을 정확히 예측하지 않으면 성공하기 힘들지. 이 자는 극강의 고수이군."

"그렇다면 이 자는 먼저 제갈진의 하체를 공격해 제갈진이 뛰어오르는 걸 유도하고는 다음 동작을 정확히 예측해 심장에 일격을 가한 것이군요."
"맞아, 정확히 얘기하면 일격이 아니라 기다린 거지."

"또 하나 주목할 건 이 자가 칼을 뽑은 솜씨야. 제갈진의 심장이 경련을 일으키기 전에 재빨리 칼을 뽑았어. 그런데 그 뽑은 경로가 칼끝이 들어왔던 각도 그대로 나갔어. 빠르기도 빠르지만 조금도 흐트러짐이 없다는 거지. 이 정도 검을 다룰 줄 아는 자가 과연 강호에 몇이나 될까. 예사 검객이 아니군."

예진충의 얼굴은 분노의 표정이라기보다 감탄의 표정이 되었다. 

"아, 이럴 때가 아냐!"
갑자기 예진충이 불에 덴 것처럼 펄쩍 일어났다.

"지하 석실에 가봐. 그 자는 틀림없이 관가 놈을 데리러 왔을 거야."
"사동화가 있지 않습니까."

척숭이 말했다.

"사동화가 감당할 수 있을까."

예진충이 허리춤에서 장검을 뽑으며 대답했다. 척숭도 양쪽의 도를 뽑아 지하 석실로 달려 갔다. 그 뒤를 제갈진의 사체를 지켜보고 있던 젊은 사내가 긴 창을 손에 쥐고는 뒤를 따랐다.

관조운은 '규정대로' 당하기 싫었다.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혼란의 와중을 이용해 빠져나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무슨 수로 사방이 막힌 이 지하 석실을 빠져나간단 말인가. 문밖에는 강호에 곤륜흑우로 이름난 사동화가 지키고 있다. 자신의 무공으로는 열이 덤벼도 사동화를 대적하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고 이렇게 마냥 기다릴 수만은 없다. 결론은 뻔하다. 그 뻔한 결론에 자신을 내던질 순 없다. 관조운은 생각을 모았다.

이윽고 그는 품에서 새총을 꺼냈다. 고무줄을 팽팽히 당겼다 놓았다. 피융, 소리가 나며 고무줄이 튕겨 나갔다. 그는 몇 번 연습을 한 다음 고무줄로 쏠만한 것을 찾았다. 다행히 석실이라 구석 바닥에 돌부스러기가 있다. 그는 손가락 마디 반만한 돌을 몇 개 주운 다음 불을 껐다. 그리고 문을 향해 쏘았다. 탁, 탁, 타닥. 문짝에서 소리가 울렸다. 

사동화는 문에 기대고 있다가 갑자기 소리가 나서 돌아보았다. 문은 닫혀 있는데 안에서 이상한 소리가 났다. 무엇인가가 문짝에 부딪치는 소린데 무엇 때문에 나는 소린지는 알 수가 없었다.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석실에선 문을 통과하지 않고는 탈출은 불가능하다.

설사 문을 열었다 한들 그깟 서생쯤은 한 칼이 아니라 한 주먹이면 제압할 수 있다. 사동화는 웬일인가 싶어서 열어보려다, 바깥 일이 궁금해 참았다. 혹시나 문을 열고 그 서생 놈을 살펴보다가 침입자가 들어올지도 모른다. 그는 지하 통로 입구를 노려보았다. 그런데 다시 문에서 타닥, 타닥, 소리가 났다. 이번에는 아까와 달리 몇 개가 문짝에 부딪치는 소리다. 신경이 쓰였다. 그런데 갑자기 안에서 신음 소리가 났다.  

"으윽, ……으, 으, 으으윽. 크으윽."
서생에게 무슨 변고가 생겼나 싶었다. 사동화는 어깨에 멘 검을 풀어서 손에 쥐고 문을 열었다.

이때다.
밖에서 지키는 자가 안을 살피느라 문을 열고 고개를 들이밀 때 기회는 그때 밖에 없다. 단 한 번의 새총질로 그 자의 눈을 맞춰야 한다. 문을 열면 복도는 환하고 석실을 어둡다. 이곳은 노출되지 않는다.

사동화가 문을 열자 안이 캄캄했다. 그는 오른손에 검집을 쥐고 왼손으로 문을 더 열고는 한 발짝 내딛었다. 그때 눈앞에 번개가 번쩍했다. 무슨 영문인지 생각할 틈도 없이 그는 한 손으로 눈을 감쌌다. 다음 순간 그의 낭심에 묵직한 충격이 왔다. 윽, 그는 허리를 꺾었다. 순간 방심했구나, 라는 생각이 스쳤다. 비록 서생차림이라곤 하지만 이 자는 한때 비영문의 제자였다. 즉 무공을 수련했던 것이다. 아무리 방심 끝에 당했다지만 그래도 강호에서 닳고 닳은 자신 아닌가. 순간적인 고통쯤은 무시해야 한다. 사동화는 문에서 물러서지 않고 검집에서 검을 뽑았다.

관조운은 당황했다. 새총을 쏘아 눈을 맞추면 그자는 분명 눈을 감쌀 것이고 그러면 하체가 빌 것이다. 그때 급소를 공격하면 분명 주저앉거나 물러나게 돼 있다. 그때 문밖으로 뛰쳐나가려 했던 것인데 이자는 곤륜흑우라는 별칭답게 소저럼 우직하게 문을 지켰다. 그이 손에 검이 들려 있어 손은 석실에선 절대적으로 불리하다.

크흐흐흐, 사동화가 괴성을 지르며 한 발짝 석실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검을 곧추세우고 공격 자세를 취했다.

그때 통로의 불이 꺼지며 사방이 캄캄해졌다. 침입자가 드디어 이곳까지 왔군. 사동화는 긴장했다. 이제 이 서생 나부랑이가 문제가 아니다. 침입자를 어떡하든 제압해야 한다. 사위는 캄캄해 한치 앞도 안 보였다. 상대는 아무런 기척이 없다. 분명 통로 쪽에서 들어올 터인데 아무런 소리가 없다. 들리는 건 석실 안 서생의 숨소리와 자신의 숨소리만 들릴 뿐이다. 침입자는 움직이지 않는 것인가.

잠깐의 침묵 후에 사동화가 검을 쭉 뻗었다가 좌우로 베었다. 쉬익, 쉭 허공을 베는 소리가 통로에 울릴 뿐 아무런 반응이 없다. 침입자가 들어온 게 아닌가. 혹시 불이 그냥 꺼졌나? 의아하게 생각하는 순간 검을 쥔 오른손목이 시큰했다. 아차, 싶었다. 그는 손목에서 떨어지는 검을 왼손으로 급히 잡고는 동시에 앞으로 쑥 뻗었다.

제발 이 일격이 성공하기를. 사동화의 간절한 마음이었다. 그러나 검날에는 아무 것도 걸리지 않았다. 그는 검을 양손으로 쥐기 위해 오른손을 손잡이 뒤쪽 검경(劍莖)을 잡았다. 그런데 쥐어지지가 않았다. 오른손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 것이다.

오, 이런. 그는 손목의 힘줄이 끊어졌다는 것을 알았다. 한발 물러나 수비자세로 바꾸는 순간 아랫배가 화끈했다. 당했다! 그는 자신이 당했다는 사실보다, 상대가 어찌 자신의 검과 단 한 번의 부딪침도 없이 어둠 속에서 자신의 빈틈을 정확히 벨 수 있는지 그것이 궁금했다. 그리곤 쓰러졌다.

덧붙이는 글 | # 미리 보는 다음회

얼마나 있었을까.
크악!
팽팽한 긴장을 무너뜨리는 단발마가 어둠 속에서 터져나왔다.
그것은 사람의 소리가 아니라 야생의 늑대가 한순간에 절명하는 소리 같았다.

-월, 수, 금, 주3회 연재합니다.



태그:#무위도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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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디고』, 『마지막 항해』, 『책사냥』, 『사라진 그림자』(장편소설), 르포 『신발산업의 젊은사자들』 등 출간. 2019년 해양문학상 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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