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無爲刀
▲ 무위도 無爲刀
ⓒ 황인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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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장 심문

"관 소협의 포박을 풀어드리게."
예진충이 말하자,

"저어, 규정 상 혈도 제압이나 포박을……."
예진충의 뒤에 있던 섬서괴도 척숭이 말끝을 흐리며 예진충에게 반문을 했다.

"괜찮소, 관 소협은 무림인이 아니니."
그 말은 곧 관조운이 무림인이 아니므로 그다지 위협이 될 것이 없다는 의미였다. 뒤에 서 있던 사동화가 다가와 관조운의 손목 결박을 풀었다. 관조운을 관절을 돌리며 손목을 풀었다.

"내가 지금 죄인이오?"
관조운이 낮은 목소리로 항의하듯 물었다.

"당신은 추포된 게 아니오. 그렇게 생각한다면 송구하오."
예진충이 담담하면서도 단호하게 말했다. 그러나 말과는 달리 전혀 송구한 기색이 없다. 

"죄인이 아니라면서 귀하들은 나를 죄인 다루듯 두건을 씌우고 포박을 하였소. 우리 가문이 비록 보잘 것 없는 향리에 불과하다지만 이곳 금릉에선 그래도 무시하지 못할 벼슬의 전력이 있는 가문이오."

관조운은 가문의 위세를 빌어서라도 자신이 주눅들지 않았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이곳에서, 그저 죽여주십쇼, 하고 머리만 조아린다면 상황은 더욱 좋지 않게 된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거기에 대해선 내가 해명하겠소. 이곳은 우리가 비밀 은가(隱家)라고 부르는 곳이오. 그래서 외부인을 데려올 때는 지켜야 할 절차로서 눈을 가리게 돼 있소. 이곳이 노출되면 안 되기 때문이오."

"내가 죄가 있어 잡혀온 게 아니라면 귀하들은 좀 더 예를 갖춰 주기 바랍니다."

관조운이 단호하게 말하자 예진충은 오히려 입가에 보일 듯 말 듯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는 상체를 앞으로 기울이더니 관조운의 눈을 응시하며 나직이 말했다. 

"예의는 지금 우리가 갖추고 있는 거요. 관가장의 자제라고 하니 이 정도로 예우하는 것이니, 너무 많은 건 기대하지 마시오."

예진충은 천천히 상체를 의자 등받이 기대었다.

"소협의 조부께선 황궁의 벼슬까지 지내셨더구만. 그런데 불미스럽게 역모에 연루되었다가 낙향했고, 부친 대에선 아예 관직을 경외 시까지 했다니 그 또한 황제 폐하의 은혜를 저버리는 것이 아니겠소. 이제라도 폐하의 황송한 은덕을 기리고 관가장을 일으켜 세워야 하지 않겠소. 공자."

호칭이 소협에서 공자로 바뀌었다.

관조운은 뜨악했다. 이 자들이 언제 우리 가문의 내력까지 조사했을까. 석실에서 한 시진 이상 갇혀 있는 동안 탐지를 한 모양이었다. 물론 금릉부 부청(府廳)이나 각 지역의 감찰을 담당하는 제형안찰사(提刑按察使)를 통하면 향리의 소식 정도는 그 시간 안에 충분히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가문의 깊은 상처인 역모 연루 건을 언급하는 건 관조운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그들은 가문의 약점을 들추어내며 그들이 원하는 것에 협력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아니 이건 협박이나 마찬가지다. 군자의 도에 어긋나도 한참 어긋나는 것이다. 강호의 무뢰배들에게나 통할 짓을 서생인 자신에게도 들이미는 것이다.

관조운의 4대 조부는 한림원(翰林院)의 시강학사(侍講學士)로 국정에 참여했다. 3대 조부는 흠천감(欽天監)의 학자로 임명되어 학식의 드높음을 추구하던 중 동창이 조사한 역모 사건에 연루되어 자칫 멸문의 위기에 처할 뻔 했다. 그 후 누명임에 밝혀졌고 뒤늦게 옥사에서 풀려났으나 이미 관직에 머무를 수는 없었다.

조부는 식솔을 이끌고 선대의 고향 금릉으로 왔다. 그는 자식 대에는 관의 진출을 자제하고 손자 대에서나마 진출을 모색하라고 했다. 그리고는 청량산에 청량서원(淸凉書院)을 세워 주자학을 연구에 매진하고 후학을 양성하였다. 이런 집안 졸가리가 있는 만큼 관조운이 악명 높은 동창과 그중에서도 더욱 은밀한 은화사에 대해 좋은 감정을 가질 리는 만무했다.

"가문의 일은 저희 가문에서 정할 일입니다."
관조운이 말했다.

"아무래도 우리의 주목을 받는다면 가문의 앞날에 영향이 없진 않겠지요."
관조운은 뒷조사를 미리 해놓고 상대의 약점을 파고드는 것이 이들의 특기이구나 싶었다.

"원하는 게 뭐요?"
관조운이 핵심을 파고들었다.

"소협이 일운상인의 외(外)제자라는 걸 이제야 알았소, 우리가 몇 가지 궁금한 게 있으니 답변을 해주셨으면 좋겠소."

예진충의 말투가 다소 부드러워졌다. 그가 품에서 문서 한 장을 꺼냈다. 낡은 한지로 된 종이에서는 초서체로 쓰인 글씨가 언뜻 보였다.

"개진연형(開眞煉形) 형숙귀무(形熟歸無) 이 요결을 알고 있나?"
예진충이 문서를 보며 관조운에게 물었다. 말투는 어느새 하대조로 바뀌었다. 

"무슨 말이오. 아는 건 둘째 치고 들어본 적도 없소."
관조운이 짧게 답하자, 예진충이 지긋이 노려보았다. 관조운의 태도에서 진위를 탐색하는 것 같았다.

"태허진인이 누군가는 알고 있겠지?"
"알고 있소. 나에겐 태사부 뻘이오."
"태허진인이 무학서를 집필했다는 건 알고 있겠지?"
"소문으로만 들었지. 직접 본 적은 없소이다."
"일운상인으로부터도 들은 바가 없단 말인가."
"스승님은 무학서에 관해선 일언반구도 없었소. 다만 저희 태사부 어른이 걸어오신 무도의 길만 강조할 뿐이었소. 스승님은 비급이니 절학이니 하는 것에 현혹하지 말라고 제자들에게 누차 당부하셨소."

예진충은 관조운을 향해 몸을 구부리고는 탁자 위에 팔꿈치를 놓았다. 그는 표정이 약간 굳은 채 관조운을 응시했다.

"생각보다 소협은 일운상인의 신임을 받지 못한 모양이구먼. 우리가 탐지한 바에 의하면 일운상인이 비영문의 장문인 직을 놓은 후 유일하게 자네만 가르쳤다고 하던데."

"스승님이 은거하신 이후 저와 배움을 나눈 것은 무공이 아니라 유학이었소. 강호의 길이 아니라 선비의 길을 추구했고, 힘(力)이 아니라 예(禮)를 논했단 말이오."

예진충은 눈을 내려 깔고 고개를 약간 끄덕이며 낡은 종이를 쳐다보았다. 그가 입을 꾹 다물자 입술이 여덟팔자처럼 아래로 처졌다.

"자, 그럼 다시 시작해 볼까. 자네는 일운상인이 금의위에 협조한 사실을 알고 있는가?"

금의위라면 황궁을 보호하고 황제 폐하를 가장 가까운 곳에서 보위하는 근위대 아닌가. 관조운은 금의위의 무력이 막강하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일반 백성들의 생활과는 무관하고 그나마 황궁 내에서의 무력 도발이라는 것이 전무하다시피 하니 강호에서는 그저 그런 군대가 있는 모양이구나 하고, 먼 산의 불구경처럼 그저 불이 나면 재미있는 구경거리로 생각할 정도였다. 그런데 스승님께서 금의위와 관계가 있었다니 관조운에게는 금시초문이었다.

평소 스승님의 지론이 관(官)과는 '불가근 불가원(不可近 不可遠)'이라고 하셨다. 관과는 너무 가깝지도 너무 멀리도 하지 말라는 취지였다. 가까이 하다보면 화(禍)가 미치고 멀리 하다보면 욕(辱)을 당하게 되는 게 관과의 관계라고 하셨다. 그 말씀처럼 당신 또한 평생 관과는 거리를 두신 걸로 알고 있다. 그런데 언제 금의위에 협조를 했단 말인가. 게다가 이곳 금릉에서 금의위가 있는 북경까지는 천리 길. 어쩌면 관조운이 스승님과 만나기 이전인 수십 년 전에 이루어졌던 관계인지도 모른다.

"모르오. 제가 알던 그리고 제가 모시던 이후의 스승님은 금의위는 물론이거니와 하다못해 이곳 금릉의 관과도 인연이 없었던 것으로 아오."

"모르는 것이 당연하지. 일운상인이 금의위에 협조한 사실은 도찰원에서도 까맣게 몰랐다가 얼마 전에 우리가 겨우 탐지할 정도로 기밀 속에 이루어졌으니까."

예진충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덧붙이는 글 | # 미리 보는 다음회

“예 총관님, 침입자의 무공이 상당한 것 같습니다.
저희 요원 셋이 일 초(抄)에 당했습니다.”
“뭐야, 일격에? 제갈진(諸葛珍)은? 제갈진도 일격에 당했단 말이야?”
“네, 가슴에 한 칼을 맞았는데 절명했습니다.”
척숭이 짧게 답했다.

- 월, 수, 금, 주3회 연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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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디고』, 『마지막 항해』, 『책사냥』, 『사라진 그림자』(장편소설), 르포 『신발산업의 젊은사자들』 등 출간. 2019년 해양문학상 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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