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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느리로 살아온 이십여 년. 50차례에 가까운 명절 중 이번 설은 마음 고생이나 몸 고생하지 않고 여유있게 보낸 것 같습니다. 설날 차례를 지내고 일찌감치 집으로 돌아와 오후 내내 잠만 잤습니다. 그리고 설 연휴 3일째인 1일엔 종일 책을 읽었고, 밤에는 딸과 <겨울왕국>을 보고 왔으니 꽤 여유있는 명절 연휴를 보낸 것 맞죠?

몇 년 전부터 명절 연휴에는 이처럼 영화도 보고, 아이들과 평소에 못 간 곳에 가거나 전시회, 공연 등을 보면서 보내고 있습니다. 명절이 지겨운, 명절 증후군을 앓는 분들에게는 많이 부러운 이야기가 되겠지요. 1일 오후에 한 고향친구와 설 안부 전화를 주고받았습니다.  설 다음날인 어제 집안 어른들이 많이 오셔서 종일 밥상, 다과상을 차리고 있다는 이야기가 얼마나 아리게 와 닿는지 모르겠습니다.

전 자칭 '불량며느리'입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설이 가깝긴 가까운데 코앞에 와 있다는 걸 연휴 이틀 전에야 실감했으니까요. 그런데 이번 설만 그런 것이 아니고 몇 년 째 이러고 있습니다. 대략 언제쯤 명절이다 날짜는 봐두는데 절실하게 와닿진 않네요. 그래서 항상 명절 이삼일 전에야 실감을 하곤 합니다. 이러니 스스로 불량며느리란 소리가 나올 수밖에요.

하지만 언제나 그렇지도 않습니다. 지난 추석처럼 연휴 전에 좀 덜 바쁠 때는 어머니 댁에 수시로 드나들며 명절에 필요한 것들을 함께 챙기기도 합니다. 이것 때문인지, 바쁘면 바쁜 대로 늦게 달려가고 좀 여유 있으면 먼저 달려가기도 한다는 것을 아시기 때문인지, 시어머니는 불량며느리란 생각은 거의 하지 않는 눈치입니다.

초주검이 되곤 했던 명절 준비... 작은 데서 시작된 변화

아마도 여기까지 읽는 동안, '아 이 집은 차례를 지내지 않는구나! 그러니 그렇게 여유있는 거겠지!'라고 생각하실 분도 있겠네요.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그간 어머니로부터 시시때때로, 셀 수 없이 많이 들었던 말 중 하나는, 지금도 여전히 듣곤 하는 말은 "사람은 예의와 범절이 있어야…"입니다. 이 예의와 범절을 앞세워 차례상도 아주 극진히 차리지요. 당연히 갖춰야 할 것도 많고요.

어느 정도냐면, 10년 전까지만 해도 "어른들 생신은 꼭 아침에 먹어야 한다!"고 주장하시는 것은 물론, 대보름날에도 꼭 모여 오곡밥이며 나물을 준비해 나눠 먹어야 함을 강조하곤 했었습니다. 동짓날이나 칠월 칠석에도 모여 먹길 바라곤 했고요. 이 정도면 차례상이나 제삿상을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시는지 이해가 되겠지요. 여하간 10년 전까지는 그랬습니다.

집에서 놀기만 하는 사람이 아니다보니 대부분 명절 연휴 첫날 이른 아침에 어머니 댁에 가곤 했습니다. 그러나 아이들이 지금보다 어렸을 때는 연휴가 시작되는 전날에 시댁으로 가 이틀 밤을 꼬박 잔 후 명절날 늦은 밤에나 명절 다음날 점심 무렵에나 오곤 했습니다. 아이들이 어리다보니 명절 후 잠자리가 바뀌거나 물을 바꾼 데서 오는 설사나 감기 등으로 고생하기 일쑤였고요. 그럼에도 이렇게 모이는 것을 언제나 원하시더라고요.

어머니는 흔히 하는 말로 손이 무척 큰 편이랍니다. 얼마나 크시냐면 명절에 먹을 물김치를 어른들 허리까지 오는 커다란 통에 가득하도록 담그곤 하시더군요. 송편 한말은 기본이었고요. 녹두전을 부치려면 녹두를 미리 물에 불려 방앗간에서 갈아 와야 하잖아요. 녹두전 집을 차리시려나 싶을 정도로 김치 10포기는 담글 수 있을 정도로 커다란 통 가득 준비하곤 했습니다. 녹두전 그거 부치기 얼마나 까다로운지 잘 아시죠. 그런데 녹두전만 하나요. 기본으로 준비하는 전은 5가지. 나머지 양도 짐작되지요.

여하간 이렇다보니 10여 년 전까지만 해도 명절 한 달 앞두고 슬슬 걱정되고 짜증이 나곤 했습니다. 그리고 그땐 우리 집 남자들이 차례상 차리는 것 외엔 거의 일을 하지 않았고 식구들이 모인 날부터 밥상 외에 술상까지 차려 노는 분위기라, 설거지 마치고 좀 앉아 쉴만하면 해야 할 일이 대기하고 있어 초주검 직전까지 가곤 했습니다. 그러니 명절이 두려울 수밖에요.

남자들과 우리 딸이 부친 이번 설의 전. 필자는 동그랑땡 반죽만 해줬음^^ 예전보다 가짓수 2가지 줄고, 양도 절반으로 줄었음.
 남자들과 우리 딸이 부친 이번 설의 전. 필자는 동그랑땡 반죽만 해줬음^^ 예전보다 가짓수 2가지 줄고, 양도 절반으로 줄었음.
ⓒ 김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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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아들 셋있는 집, 큰 며느리입니다. 동서들이 일 때문에 바빠 늦게 오다보니 제 일이 상대적으로 늘고 말더군요. 그리하여 제가 생각한 것은 남자들을 일로 끌어들이는 것이었습니다. 오랫동안 해온 방식을 고수하시는 어머니를 상대로 해봤자, 그동안 어머니와 부대끼며 얻은 것들을 종합해 볼 때 먹혀들지도 않을 뿐더러 고부 갈등만 커질 것 같더군요. 그래서 명절이나 어머니 생신 등처럼 식구들이 많이 모이는 날에 남편부터 설거지로 끌어 들였습니다. 그때 몸도 좀 아프고 팔이 좀 많이 아파 남편에게 미리 협조를 구했었거든요.

남편은 평소 집안일을 잘 거들어 주는 편입니다. 때문에 그간 시댁에서 간단한 설거지도 예사로 했고요. 그럼에도 가족들이 모두 모인 상태에서 남편이 시댁에서 설거지라는 것을 처음 하던 날, 우리 어머니는 얼굴이 하얗게 바뀌며 펄쩍 뛰시더군요.

"남자가 무슨 주방에 와 설거지를 하냐? 여자가 몇인데 남자가 설거지를 해? 비켜라! 엄마가 할란다!"

이렇게 말씀하시며 말이지요. 그런데 지금 생각해도 정말 고마운 것은, 이때 제 남편이 끝까지 고집을 굽히지 않았다는 것, 끝까지 자기가 설거지를 하겠노라며 어머닐 밀어냈다는 것입니다. 아들의 이 강한 태도에 어머니께서 결국 물러나시며 오히려 "그럼 이것도 좀 씻어라!" 냄비며 프라이팬까지 가져다 디밀면서 한 술 더 뜨시더군요. 지금도 그때의 정황과 풍경이 잊히지 않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소한 행동 하나가 엄청난 변화를 일으키기도 하죠. 어느 해 어머니 생신날 남편이 한 설거지는 다음에 돌아오는 명절로 이어지더군요. 자연스럽게 설거지를 하게 되고, 그러다보니 어머니도 당연하게 생각하더군요. 남편으로부터 시작된 설거지는 시동생들에게 이어졌고요. 그리고 오랫동안 쭈그려 앉아 부쳐야 하는 전까지 부치는 등으로 이어지더군요.

남자들도 손 걷어붙이고 나선 '명절 준비'

예전보다 간단하게 준비한 꼬치에 밀가루 바르는 것도 아주 차분 차분, 조신하게 잘해요~!
 예전보다 간단하게 준비한 꼬치에 밀가루 바르는 것도 아주 차분 차분, 조신하게 잘해요~!
ⓒ 김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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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이젠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여자들 전담이었던 '전(부침개)'은 남자들끼리 부칠 때도 많습니다. 물론 어머니나 제가 손을 아주 털 순 없지요. 치자물도 미리 내려놓고, 동그랑땡 반죽 등도 해주는 등 부치기 직전까지 준비는 해주곤 합니다. 그리고 정말 까다로운 것은 어머니나 제가 하고요. 그러고 보니 지난해 설과 추석에는 남자들이 전을 모두 부쳤네요.

물론 이렇게 되기까진 저도 나름대로 성심을 다해 적어도 꾀는 부리지 않음을, 시댁 일을 귀찮아하거나 피하지 않는 것을 보여주고자 노력했습니다. 평소에 절 필요로 하면 적극적으로 나서주고. 시간이 닿는 한 최대한 빨리 달려가고. 이런 진심도 어느 정도는 통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와중에 우리 아이들도, 조카들도 모두 커버렸습니다. 할머니 댁으로 오기 전에 명절 음식을 어떻게 장만하는가? 걱정하고 궁금해 하는 안부를 물을 정도로 명절 음식을 같이 준비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아이들로 자란 것 같습니다. 이렇다보니 차례상 차리는 데 손 털고 앉아 있지 않고 제각기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하는 아이들이 되었고요. 그러고 보니 이번 떡국은 남자 조카가 씻었네요. 달라붙은 것 일일이 떼어 가면서 말이지요. 

여하간 한 달째 목이 아파 치료중인 저는 명절 연휴 첫날 오후 두시에 가 전 부치는 것 좀 봐주고 저녁을 준비해 함께 먹은 후 집으로 와 편안한 잠을 잤습니다. 그리고 이른 아침에 시댁으로 가 차례를 지낸 후 1시쯤 집으로 돌아와 명절날 오후 내내 낮잠을 즐겼습니다. 해마다 친정에 가지 못하는 것이 아쉬웠는데, 1월 초에 우리 집서 친정 식구 모두 모여 친정어머니 생신상도 차려드리고, 친정에 간 형제들이 동영상을 찍어 밴드에 올려서 봤기 때문인지 올해는 전혀 섭섭하지도 않네요.

그러고 보니 이번 명절에 제가 시댁에서 한 일이라곤 전 부치는 것 조금 봐준 것과 저녁밥 해 먹인 것. 그리고 고사리 삶고 시금치 데친 것. 가족들이 먹을 꽃게 무친 것과 설거지 한 것 밖엔 없네요. 옛날엔 몸이 좀 아파도 참고 해야 했는데 말이에요.

여하간 이번 명절엔 결혼 후 지낸 명절 중, 일도 가장 적게 하고 가장 큰 휴식을 가진 것 같습니다. 명절에 일을 적게 했다는 것을 자랑하고 싶어서가 아니고, 아마도 남자들이 적극적으로 거들지 않았다면 전 지금 초주검 직전까지 가 앓아누웠을지도 모른단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거랍니다. 좀 더 자세히 말하면, 여자들을 명절 증후군으로부터 해방시켜 줄 수 있는 가장 큰 열쇠는 제 경험상 함께 사는 남자들에게 있다는 것, 남자들이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일을 분담하는 데 있음을 말하고 싶은 거랍니다.

전 믿고 있습니다. 남자들이 전도 부치고, 나물도 무치고 설거지도 도맡아 하는 것을 보며 자라다 보니 우리 아이들도 자연스럽게 함께 하게 된 것이고, 우리 아이들이 꾸릴 가정에는 명절 증후군이 없을 것이란 것을요. 여하간 각자의 사정이나 정황에 따라 명절증후군으로부터 가급 멀리 떨어질 수 있는 방법을 최대한 연구해 보시길요. 무조건 피하지 마시고요. 갑오년 새해, 모두 건강하세요!


태그:#명절증후군, #시댁, #설, #갑오년, #며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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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제게 닿아있는 '끈' 덕분에 건강하고 행복할 수 있었습니다. '책동네' 기사를 주로 쓰고 있습니다. 여러 분야의 책을 읽지만, '동·식물 및 자연, 역사' 관련 책들은 특히 더 좋아합니다. 책과 함께 할 수 있는 오늘,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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