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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2년(고종 19) 조선 후기 신식군대 '별기군(別技軍)'에 대항하여 일어난 구식 군인들의 반란인 '임오군란(壬午軍亂)'으로 인해 조선 정부는 이듬해인 1883년(고종 20)에 일본에 막대한 배상금을 지불하고 '제물포조약'을 체결하여 인천항을 개항하게 된다.

인천개항장 근대건축전시관 앞에서 촬영
▲ 개항 이후 인천의 거리 인천개항장 근대건축전시관 앞에서 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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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 직후 인천에는 일본, 중국(청나라) 등이 앞 다투어 자신들의 영역을 형성하였고 그 흔적은 100여년이 훨씬 지난 지금까지도 인천에 남아있다. 그 흔적을 느낄 수 있는 곳이 바로 경인선(京仁線) 철도의 시발역이자 종착역인 '차이나타운'이다.

인천역에서 차이나타운으로 들어서는 제1패루
▲ 차이나타운 제1패루 '중화가(中華街)' 인천역에서 차이나타운으로 들어서는 제1패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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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이나타운 제1패루로 들어서면 나오는 차이나타운 입구
▲ 차이나타운 입구 차이나타운 제1패루로 들어서면 나오는 차이나타운 입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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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차이나타운은 개항 직후 한반도에 정착하여 살게 된 중국인(화교)들의 터전이다. 지금도 차이나타운 일대에서 정체성을 잃지 않고 고유의 문화와 전통을 이어가며 살아가고 있다.

차이나타운 내 옛 청국영사관 자리에는 1934년 한국에서 최초로 세워진 화교학교 '중산학교(中山學校)'가 근 100년의 역사를 자랑하며 아직도 화교 3세의 교육을 담당하고 있다. 비록 몸은 한국에 있지만, 그들의 고유한 정신과 문화를 잃지 않기 위한 그들의 노력은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옛 청국영사관 자리에 세워진 인천화교중산학교
▲ 인천화교중산학교 옛 청국영사관 자리에 세워진 인천화교중산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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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무협영화의 한 장면이 한국에서 펼쳐지다

차이나타운의 제1패루인 '중화가(中華街)'가 들어서면, 제각각 서로 '원조'라 주장하는 짜장면집들이 골목마다 즐비하다. 복잡한 골목을 지나 중턱에 오르면 좌측 골목으로 허름한 건물이 하나 있다. 화려한 볼거리에 가려져 관광객들의 이목을 받지 못하는, 이 건물의 이름은 '의선당(義善堂)'.

중국의 조상신들을 모신 사당이자, 중국 무술가들이 팔괘장을 연마했던 무술수련장
▲ 의선당 중국의 조상신들을 모신 사당이자, 중국 무술가들이 팔괘장을 연마했던 무술수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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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 직후 정착한 화교들에 의해 세워진 이 건물은 중국의 조상신(神)들을 모시고 있는 중국식 사당으로, 한국에 정착한 화교들의 정신적 위안처이자 구심점이 되어준 곳이다. 게다가 이곳은 사당의 기능을 수행할 뿐 아니라 7, 80년대까지는 중국 화교들이 무술을 수련하는 수련장이기도 했다.

이들은 의선당 가운데에 위치한 탑을 중심으로 중국 전통무술 중 하나인 '팔괘장(八卦掌)'을 연마하곤 했다고 한다. 팔괘장은 주권(走圏)이라 하여 그들만의 독특한 비법으로 원 둘레를 만들어 돌면서 내공을 쌓고, 공방(功防)을 전개하는 무술이다. 의선당 내의 탑은 주권을 돌기에 가장 적합하면서도, 외진 곳에 위치해 남의 이목을 끌 우려도 없어 최적의 수련터였던 것.

의선당의 탑 앞에서 중국무술의 일종인 홍권(洪拳)의 초식을 선보이는 필자
▲ 의선당에서 쿵후를 선보이는 필자 의선당의 탑 앞에서 중국무술의 일종인 홍권(洪拳)의 초식을 선보이는 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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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인천에 정착한 화교들은 대부분 중국의 전통무술인 쿵후(功夫)를 연마하는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본래 한국인들에게는 무술을 전수하지 않았다고 한다. 1931년 일제의 술책으로 빚어진 한국-중국 농민 간의 유혈사태인 '만보산 사건' 등으로 인해 한국인들과 중국인들의 감정이 격화되자, 화교들은 한국인들에게 무술을 전수하면, 도리어 자신들에게 배운 무술로 한국인들이 자신들을 공격할까 두려워했기 때문이란다. 대신 이들은 화교들끼리 서로 뭉쳐 무술을 연마하며 자신들의 신변을 스스로 지켰다고 한다.

그러던 것이 시대가 바뀌면서 서로에 대한 오해를 풀게 되고 그때부터 화교들도 비로소 한국인들에게 쿵후를 전수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한국쿵후의 발원지를 인천 차이나타운이라고 하는 것이다.

옛 영광은 어디가고, 이젠 추억만 남았네

7, 80년대에는 특히 이소룡, 성룡과 같은 뛰어난 쿵후스타들의 출현으로 한반도 내에서도 엄청난 쿵후 열풍이 불어 닥쳤고, 한국 쿵후의 발원지라고 할 수 있는 인천에선 무관들이 매우 번성했다고 한다. 그러던 것이 홍콩무협영화가 쇠락하면서 하나 둘 문을 닫고 쇠락의 길을 걷게 되었고, 결국 지금은 인천이 한국쿵후의 총본산이라는 말이 유명무실할 정도가 되고 말았다.

현재 인천 차이나타운 근처에는 <정무문 쿵후 총본관>이라는 무관이 유일하게 남아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이 무관을 지키는 사람은 화교 2세인 필서신(畢庶信) 관장(57). 어린 시절 인천에서 나고 자라며 전통 쿵후를 연마했던 필 관장은 인천 쿵후의 흥망사를 꿰뚫고 있는 산 증인이다.

필자와 한국쿵후의 역사에 대해 이야기하는 <정무문 쿵후 총본관>의 필서신 관장
▲ <정무문 쿵후 총본관>의 필서신 관장 필자와 한국쿵후의 역사에 대해 이야기하는 <정무문 쿵후 총본관>의 필서신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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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화교인 무당파 팔괘장의 고수 故 유순화(劉順華) 노사(老師)로부터 팔괘장을 전수 받았던 필 관장은 70년대 말 대만에서 홍가권(洪家拳)의 고수인 장극치(張克治)를 만나 전통 홍가권을 전수 받는다.

홍가권은 중국인들의 영웅인 황비홍(黃飛鴻)이 실제로 연마했던 권법으로 유명하다. 무술에 대한 열정이 남달랐던 필 관장은 홍가권 뿐만 아니라 이소룡이 연마했다는 영춘권(詠春拳), 강력한 발경과 진각이 인상적인 팔극권(八極拳), 사마귀의 모습을 본따 만들어졌다는 당랑권(螳螂拳) 등을 연마하여 무림의 고수가 되었다.

그는 제2의 고향인 한국에서 무관을 운영하며 많은 제자들을 양성하였고 쿵후 뿐만이 아닌 중국 전통문화의 일종인 사자춤과 용춤 등을 전수하며 한국에서의 중국 전통문화 발전에 열을 올렸다. 한 때 도장을 3개까지 넓힐 정도로 그의 도장은 번창하였지만 쿵후 열풍이 쇠락하면서 그의 도장도 운영하기가 힘들어졌고 지금은 인천에서 작은 도장 하나를 운영하고 있는 실정이다.

인천 차이나타운 부근에 유일하다시피 남은 한국쿵후도장
▲ 정무문 쿵후 총본관 실내전경 인천 차이나타운 부근에 유일하다시피 남은 한국쿵후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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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멀리서도 그의 명성을 듣고 찾아와 쿵후를 배우려는 한국인 문하생들이 늘고 있다는 점이다. 비록 고된 수련을 견디지 못하고 며칠 만에 관두는 수련생들이 더 많은 실정이지만, 그는 과거 이소룡 시대에 그랬던 것처럼 인천 쿵후가 다시 부활할 날만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

한국 속의 중국, 그들의 문화를 배워보는 것은 어떨까?

대한제국 말기, 일제의 핍박과 수탈을 이기지 못한 수많은 한국인들이 해외로 망명하여 척박한 땅에 뿌리를 내리고 살면서 지금까지도 그 후손들이 한민족의 정체성을 버리지 않고 우리의 고유한 문화와 전통을 유지하며 살고 있다. 그들이 타민족에게 동화되지 않고 살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의 강인한 정체성도 원인이었겠지만, 분명 타민족의 배려도 한 몫 했으리라 본다.

실제로 중국 길림성 연변의 조선족자치구에서는 '간판에 반드시 한글을 넣을 것'을 간판법으로 정하고 있어, 한글을 넣지 않을 경우 법에 따라 처벌 받는다고 한다. 중국 정부가 법적으로 한글문화 보존을 장려해주고 있는 것이다.

우리 역시 '한국 속의 중국'에 사는 화교들을 이민족이라 하여 배척하거나, 무관심 속에 방치할 것이 아니라, 그들의 고유한 문화를 인정하고 배려하면서 한 번쯤 그들의 문화를 배워보는 것은 어떨까?


태그:#인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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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대 사학과 박사과정 (한국사 전공) / 독립로드 대표 / 서울강서구궁도협회 공항정 홍보이사 / <어느 대학생의 일본 내 독립운동사적지 탐방기>, <다시 걷는 임정로드>, <무강 문일민 평전>, <활 배웁니다> 등 연재 / 기사 제보는 heigun@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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