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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특징 하나가 때때로 그 사람을 기억나게 한다. 도시나 마을도 마찬가지. 어처구니없는 기억 한 조각이나 사소한 풍경 하나가 그때를 불러낸다. 때론 부분이 전체보다 힘이 세다. 그런 조각들로 도시를 여행하려 한다. - 기자 말

중·고등학교 시절 찾아온 향수병, 유년시절 동네 그리워하다

초등학교 1학년 때까지 살았던 동네인 부산 서구 서대신동. 2014년 1월 촬영.
 초등학교 1학년 때까지 살았던 동네인 부산 서구 서대신동. 2014년 1월 촬영.
ⓒ 김대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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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수성이 예민하던 중·고등학교 시절 어느 순간 향수병이 찾아왔다. 모두가 잠든 깊은 밤이 되면 감당하기 힘든 그리움이 몰려왔다. 어느 가을엔 저금통을 움켜쥐고 택시를 잡아타러 큰 도로까지 달린 적도 있었다. 해가 뜨면 등교와 함께 파묻혔지만, 혼자가 되면 향수병은 어김없이 '스물스물' 기어 나왔다.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첫 도시에 대한 그리움이었다. 그곳은 부산이었으며, 부산 가운데서도 서구 서대신동이었다. 서대신동에서 처음 무리 친구를 사귀었고, 여러 가지 놀이를 배웠다. 골목 안에 사는 모든 또래 아이가 친구였으며, 눈에 보이는 모든 게 놀이도구였다. 거친 벽엔 스티로폼을 그으며 눈을 만들었고, 도랑에선 건너뛰기를 하며 담력훈련을 했고, 담벼락엔 오르고 뛰어내리며 군인이 된 것처럼 함성을 질렀다. 그 시기는 초등학교 1학년 때까지였다. 아버지 근무지가 바뀌면서 1학년을 마치고, 부산을 떠났기 때문이다.

왜 중·고등학교 시절 향수병이 생겼는지 모르겠다. 감수성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공부가 짓누르던 스트레스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때마침 그 시절 큰집이 옛집과 가까운 곳으로 옮겼기 때문인지 정확히는 알 수 없다. 어쨌든 명절이면 제사를 지내러 큰집에 갔고, 조상을 모신 뒤엔 혼자서 빠져나와 대략 30분 정도를 걸어 옛집이 있는 동네에 갔다. 가서 뭐할지 아무 계획도 없었다. 단지 옛집 근처를 한참 동안 서성이다 돌아오는 정도였다.

그런 행동은 3년째 되던 날 발각이 났다. 그 날도 제사를 지내고 슬며시 집을 나서던 나를 사촌 누나가 불러 세웠다. "장난감을 사러 간다"며 둘러댔겠지만, 그 날만은 그런 변명이 통하지 않았다. 누나는 왕복 1시간이 걸리는 거리를 아이 혼자서 다녀왔다는 이야기를 듣고 깜짝 놀랐다.

남아 있는 오랜 기억 속에서 열여섯 살짜리 아이는 사촌 누나와 함께 옛 동네를 찾았다. 똑같이 집 앞에서 머뭇거리다 돌아서는 내 손을 사촌 누나가 잡아끌었다. 어릴 때부터 만날 때면 재미있는 이야기를 꼭 한 가지 이상씩 꺼내놓던 누나였다. 스케치북을 펴놓고 같이 그린 그림도 꽤 많았다. 오랜만에 찾아온 사촌 동생을 재미있게 해주기 위해 무척 애썼던 모습으로 사촌 누나는 기억 속에 남아 있다. 그 때 옛집을 얼마나 그리워했는지 아마 누나는 알아차렸던 것 같다. 집 내부는 그대로였고, 그 집엔 그 시절 친구가 살고 있었다. 기억나는 대화는 딱 이 정도다.

"올해 몇 학년이니?"(친구 어머니)
"중학교 3학년입니다."(나)
"어, 나는 중학교 2학년인데. 그럼 나보다 한 살 많았네."(친구)

사촌누나 덕분에 옛집이 변함없이 그 자리에 있었고, 그 집에 친구가 산다는 것을 확인했다. 친구 어머니는 다음날 떡국을 먹으러 오라 했지만, 가지 않았다. 그날 충분히 만족했고 행복했기 때문이다. 그 덕에 그렇게 심하던 향수병이 사그라졌고, 큰 탈 없이 10대를 넘겼다. 그렇게 긴 세월이 흘렀다.

골목을 좋아하는 취향은 어디서 비롯됐을까

2014년 1월 우연히 옛 동네를 온라인 지도로 보다 깜짝 놀랐다. 온 동네가 재개발지역으로 표시돼 있었기 때문이다.(네이버지도 캡처)
 2014년 1월 우연히 옛 동네를 온라인 지도로 보다 깜짝 놀랐다. 온 동네가 재개발지역으로 표시돼 있었기 때문이다.(네이버지도 캡처)

나이가 든 뒤 열심히 골목을 누볐다. 골목에 들어서면 기분이 좋아졌다. 근래 들어 골목을 유난히 좋아하는 취향은 도대체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더듬기 시작했다. 결론은 기억 속 첫 도시였다. 유년기 시절 기억이 평생을 지배한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시골에서 태어나 자란 사람은 시골 감수성을, 대도시에서 태어나 자란 사람은 대도시 감수성을 드러낸다. 내 감수성을 만든 곳은 유년기 시절 그 동네였다.

동네는 골목과 골목으로 이어진 곳이었다. 집 옆에는 도랑이 흘렀다. 산자락에 들어선 동네는 산을 따라 꼬불꼬불 길이 흘렀고, 갑자기 '휙' 휘어졌다 나타났다. 없는 듯 길이 나타났고, 있는 듯 막다른 길이었다. 집은 단층 아니면 이 층이었다.

내 20대와 그 이후 감수성을 지배한 건 유년기와 짧은 아동기를 보낸 서대신동이었다. 마침 설이 다가오고 있었다. 인터넷 지도 서비스를 통해 살펴보니 어릴 적 동네와 주변 일대는 모두 '주택재건축' '주거환경개선지구'와 같은 이름이 붙어 있었다. 도랑은 이미 복개돼 도로로 변한 뒤였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어쩌면 살던 집, 살던 동네가 모두 사라질지 몰랐다.

설을 며칠 앞둔 1월 말 서대신동을 찾았다. 두근거리는 마음이었다. 어릴 적 아버지에게 용돈을 받으면 가장 먼저 찾던 떡볶이 포장마차는 그대로 있을까. 어머니가 심부름을 시키곤 했던 동네에 단 하나뿐인 가게는 여전할까. 동네 친구들이랑 술래잡기했던 목욕탕 계단은 사라지지 않았을까. 비 오는 날 마루에 앉아 바라보던, 좁지만 아늑했던 마당이 있던 옛 집은 아직 남아 있을까.

옆 동네에서부터 걸어 들어갔다. 어릴 적 호빵을 먹을 때 팥 부분을 아끼기 위해 흰 빵부터 파먹어 들어갔던 것처럼 가장 보고 싶은 곳을 아끼고 싶은 마음이 컸다. 소풍 가기 전날 밤이 즐거운 것처럼 좀 더 즐기면서 동네를 들어가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재개발을 앞두고 주인이 떠난 집들이 많았다.
 재개발을 앞두고 주인이 떠난 집들이 많았다.
ⓒ 김대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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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엔 재개발 반대 플래카드가 무척 많이 걸려 있었다.
 동네엔 재개발 반대 플래카드가 무척 많이 걸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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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내 마음과 달리 옛 동네에서 가장 먼저 본 풍경은 빈집들과 '재개발 반대' 플래카드였다. 동네는 재개발을 앞두고 일촉즉발 위기상황 같은 모습이었다. 사정을 멀리서 들을 것도 없었다.

사진을 찍고 있는 나에게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쳐다보던 어르신이 먼저 말을 건넸다. 왜 사진을 찍느냐고. 재개발 동네에 가면 흔하게 겪는 눈빛과 질문이었다.

대체로 오래 산 사람들과 나이 드신 분들은 재개발을 반대한다는 의견이었다. 보상금으로는 부산 시내 어디 가서 전세도 얻지 못한다는 게 이유였다. 재개발을 너무 서두른다는 것도 불만이었다. 올해 안으론 착공하기 힘들다는 게 어르신 진단이었다.

실제 동네에선 '재개발 반대' 플래카드를 내건 집이 무척 많았다. 지금껏 본 재개발 동네 가운데 가장 많지 않나 싶었다. 그만큼 반대하는 사람이 많다는 증거일 터다. 속으로 '휴' 한숨을 내쉬었다. 당장 동네가 사라지는 건 아니구나 싶었다. 어르신은 "요즘 상황도 그렇고, 쉽게 재개발 들어가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말을 남기며 사라졌다.

도랑이 비록 사라졌지만, 꽤 많은 게 그대로였다. TV 만화영화 <짱가>를 함께 보던 친구네 집이 슬레이트 지붕을 얹은 상태로 남아 있었고, 술래잡기하던 목욕탕 계단이 본 건물과 함께 그대로였다. 바닥에 블록을 깔긴 했지만, 어머니와 손잡고 함께 다닌 시장도 그 자리에 남아 있었다. 무엇보다 길이 그대로였다. 길을 거닐면서 간간이 그 시절 추억에 빠져들었다.

마냥 행복한 건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당혹스러웠다. 길과 주변 풍경은 그대로인데, 그 시절 나는 없고, 친구들도 없었다. 내 존재를 받아들이지 않는 동네에 물에 뜬 기름처럼 '둥둥' 떠다니는 기분이었다. 옛사람이 사라진 옛 풍경은 쓸쓸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옛집을 찾았다. 낮은 담이 있던 옛집은 이층집으로 변해 있었다. 길에 접한 곳이 곧 벽인 이층집에선 그 시절 흔적을 전혀 느낄 수 없었다. 너무나 많은 곳이 남아 있었지만 아끼는 것들은 모두 사라졌다. 옛집, 떡볶이 포장마차, 구멍가게.

앞에 보이는 길이 자동차가 다니는 나름대로 넓은 대로(?). 그 때는 참 넓어 보이는데, 지금은 어찌 그리 좁아 보이는지.
 앞에 보이는 길이 자동차가 다니는 나름대로 넓은 대로(?). 그 때는 참 넓어 보이는데, 지금은 어찌 그리 좁아 보이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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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 반찬집. 지금 주인보다 더 이전에 하던 주인이 쓴 글자를 지우지도 않고 그대로 달고 있었다.
 동네 반찬집. 지금 주인보다 더 이전에 하던 주인이 쓴 글자를 지우지도 않고 그대로 달고 있었다.
ⓒ 김대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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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무리였다. 그 동네를 떠난 지 30년이 넘었다. 요즘 같은 세상에 이 정도로 바뀌지 않은 곳도 드물다. 자동차가 다니는 도로조차 너무 좁았다. 아이에겐 아늑하기만 했던 도로 폭이 30년 넘는 세월 동안 전혀 바뀌지 않았다는 뜻이다. 동네에 들어서면서 '길이 너무 좁구나'라고 느낀 건 그만큼 내가 많이 컸고 변했다는 증거다.

꽤 오래전 열여섯 아이 옆에는 사촌 누나가 있었지만, 마흔을 넘긴 철부지 어른 옆엔 사촌 누나가 없었다. 마술은 일어나지 않았다. 옛집에서부터 동네를 빠져나오기 시작했다. 천천히, 되도록 천천히 걸었다. 언제 또 올지 몰랐다.

집과 길을 기억 속에 담으며 걷다 한 곳에 발길이 멈췄다. 간판이 없는 문방구 앞에서였다. 오래된 곳처럼 보였다. 할아버지 한 분이 물건을 정리하는 중이었다. 할아버지에게 말을 붙였다. 문방구 나이를 알고 싶었다. 33년 전에 문을 열었단다. 할아버지 기억이 맞는다면 부산을 떠나기 전 문을 연 곳이었다. 할아버지는 놀라운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내가 지난해 겨울 일본에 갔어. 혼자서. 부산에서 시모노세키(下關) 가는 배를 탔어. 야마구치(山口)에 가려고(* 시모노세키와 야마구치는 두 곳 다 야마구치 현에 있다) 초등학교를 그곳에서 나왔거든. 국민학교 6학년 때 전쟁이 났어. 미군이 핵을 떨어트렸다고 난리가 났거든. 졸업이고 뭐고 당장 짐을 싸서 한국으로 나왔지. 다 죽게 생겼는데 어쩔 수가 없었지. 그래서 내가 일본말을 잘해. 그런데 그 난리통에 졸업장을 못 받은 거야. 지난해 졸업장 받으러 간 거야."

여행 이야기를 들려주는 할아버지 눈은 들떠 있었다. 7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른 뒤에 찾은 옛 동네였다. 할아버지는 그 동네가 그대로 있을지 궁금했단다. 가장 보고 싶은 건 초등학교였다고. 차에서 내리자마자 모든 걸 제쳐놓고 초등학교부터 찾았단다. 다 변하고 스모를 배우던 체육관 한 곳만 그대로였다는 말을 할 땐 진한 아쉬움이 묻어났다. 그때도 남학생들은 한겨울에 반바지를 입었는데, 지금도 여전히 그러하다는 말에선 반가움이 드러났다.

학교를 확인하곤 교장을 찾았단다. 졸업장을 달라면서. 20년에 한 번씩 학생기록을 파기하기 때문에 재학기록을 찾을 수 없다는 답을 들었단다. 할아버지는 일본 총리인 아베가 동문인데, 찾아가서 따져야겠다고 했다며 '껄껄' 웃었다.

할아버지는 문방구만 찍으라 하셨다. 나이든 사람 찍어서 뭐 하느냐면서.
 할아버지는 문방구만 찍으라 하셨다. 나이든 사람 찍어서 뭐 하느냐면서.
ⓒ 김대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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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여 년을 거슬러 고향을 찾아간 사내는 70여 년을 거슬러 고향으로 간 사내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기막힌 인연이었다. 일본어에 능통한 할아버지는 영어도 잘한다고 했다. 한국전쟁 때 같이 싸운 미군들 덕분이란다. 할아버지는 돈만 있다면 미국에 가서 그때 그 전우들 보고 싶다는 말을 했다. 지금 살아있을지 모르겠다는 말에선 아련함이 묻어 나왔다.

유년시절을 그리워하고, 그때 친구들을 보고 싶은 건 어쩌면 사람의 당연한 본성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념사진을 찍고 싶다고 했지만, 할아버지는 손을 내저었다. 늙은 사람 흉한데 찍어서 뭐 하느냐면서. 아쉽게 돌아서려는데, 할아버지는 선물과 같은 한 마디를 내뱉었다.

"또 놀러 와. 고향이 좋아. 그러라고 이 이야기 해준 거야."


태그:#부산, #서대신동, #고향, #재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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