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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1999년부터 국내외에 숨겨진 근현대사의 역사 현장에서 묻힌 역사의 진실을 찾고자 이제까지 발품을 팔고 있다. 그로부터 15년의 세월이 지났다. 중국대륙과 미주, 일본, 러시아 등 국외와 국내 항일의병지 특히 호남의병지 구석구석을 취재노트와 카메라를 들고 누빈 바 있다. 그 현장들은 거의 100년 전후의 역사가 있는 곳이라 대부분 원형이나 흔적을 찾기 힘들었다. 여기에 '나만의 특종'이라는 제목으로 그 근현대사 역사 현장 사진에 얽힌 뒷이야기를 남긴다. -기자의 말

‘청산리항일전적지’ 나무 비(1999. 8. 6.). 이 비목은 이제 지상에서 볼 수 없다.
 ‘청산리항일전적지’ 나무 비(1999. 8. 6.). 이 비목은 이제 지상에서 볼 수 없다.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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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8월 6일 중국 길림성 연변조선족 자치주에 있는 백두산 일대 항일유적지 답사에 나섰다. 우리 답사단 일행(일송 김동삼 의사 손자 김중생 선생, 임시정부 국무령 이상룡 증손 이항증 선생, 그리고 필자)은 연길 연변대학 빈관(숙소)에 거점을 차리고 그 일대 항일유적지를 답사하고 있었다. 그날 여정은 매우 긴지라 동포 한용운 기사의 차를 빌려 타고 아침밥도 거른 채 이른 새벽 연변대 빈관을 출발했다.

그날 백두산으로 가는 길에 용정 서전서숙 유적지, 어랑촌, 천수평 전적지를 답사하고 부지런히 청산리 전적지에 이르렀다. 그런데 그 일대는 주민도, 집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나중에 알았지만 일제가 청산리 전투에 패전한 보복으로 그 일대 마을을 불태우고 주민들을 모두 학살했다는데, 그때까지도 집 한 채 없는 썰렁한 산야였다.

이름 없는 충혼들이 잠든 청산리

'부흥향 청산리' 지명 표지석
 '부흥향 청산리' 지명 표지석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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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사기에는 지명 확인과 역사물에 대한 사진을 남기는 게 기본이다. 우리는 한참을 헤맨 끝에 '부흥향 청산리'라는 지명 표지석을 찾았고, 다시 그 일대를 샅샅이 조사한 끝에 '청산리항일전적지'라는 나무 비를 찾았다. 그때의 기쁨이란….

우리 일행은 그 나무 비 앞에 서울에서 준비해 간 소주를 드리고 두 번 절하였다.

"이역의 산하에서 이름 없이 외로이 나라의 충혼이 되신 영령이여! 부디 편히 지내옵소서."

돌아온 뒤 <민족반역이 죄가 되지 않은 나라>라는 졸저에서 초라한 전적지라고 몹시 개탄했다.

그 5년 뒤 2004년 6월에 안동MBC 방송 제작진과 다시 그곳을 찾았더니 '청산리항일전적지' 나무 비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거기서 꽤 떨어진 청산리 마을 뒷산에 '청산리항일대첩기념비'가 우뚝 서있었다.

새로 세운 '청산리항일대첩기념비'
 새로 세운 '청산리항일대첩기념비'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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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세운 기념비는 2001년 8월에 준공하였다는데, 규모는 우람했지만 자세히 둘러보니 날림공사로 여기 저기 부서지고 떨어져 있었다. 게다가 관리를 하지 않아 언저리가 어수선했다. 그때 우리 일행은 그 언저리를 말끔히 청소한 뒤 안동에서 준비해온 '안동소주'를 드리고 돌아서는데, 나는 차라리 초라힌 나무비가 청산리 전적비로 더 어울린다는 그런 이율배반의 느낌을 받았다.

이 '청산리항일전적지'라는 나무 비는 이제는 이 지상에서 사라져 버린 비목으로 이 사진은 나만의 특종 사진이다.


태그:#답사사진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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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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