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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혹한 살수 무영객은 강호의 전설적인 비급 무극진경의 행방을 찾기 위해 은거한 고수 모충연을 암습한다. 모충연은 일격을 당한 후 제자 관조운에게 알듯 모를 듯한 말을 남긴 채 운명한다. 한편 황실의 비밀조직 은화사 역시 무극진경의 강호 출현을 눈치 채고는 관조운을 추격한다. 관조운은 살수와 은화사에게 이중으로 쫓기면서 스승 모충연이 가르쳐준 수수께끼를 풀어나가야 하는데.... - 필자말

無爲刀
▲ 무위도 無爲刀
ⓒ 황인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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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아, 네 덕에 유학을 접하고 나서 비로소 마음의 길을 찾았구나. 사람 사는 도리가 마땅히 그래야 하거늘 나는 왜 그리 몽매에 젖었는지……, 생각해보면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었구나." 

모충연은 고개를 돌려 무연하게 제자를 바라보았다.

관조운이 비영문 제자로 입문한지 삼 년, 장문인으로부터 수계를 받고 사조 태허진인에서부터 내려오는 비천문의 정통 검술과 내공을 정식으로 수련한지 또 삼 년이 지났다. 그러나 무공의 자질에서 크게 두각을 나타내진 못했다. 둔재는 면했지만 범재의 한계를 뛰어넘지도 못했다. 그 과정에서 간간히 내려오던 대사부 모충연의 눈에 띄어, 관조운은 산중 저택에 머물며 대사부 곁에서 보필하였다. 이때 관조운은 대사부에게 유학(儒學)을 소개했고, 모충연은 조운에게 따로 무공을 전수 받는 영광을 누렸다.

그러나 육 년 전, 갑자기 들려온 아버님의 비보는 그렇다치더라도, 그와 동시에 들려온 가형의 비운은 참기가 힘들었다. 가형 관조영은 십육세에 향시(鄕試)에 합격한 후 삼년 후에는 경사(京師)에서 시행하는 회시(會試)에도 합격하여 약관 이십 세에 진사(進士)가 되었다.

이런 추세라면 향후 천자 앞에서 시험을 보는 전시(殿試)에서도 급제할 것은 무난할 거니와 과연 장원을 득할 것인가가 관심사일 뿐이었다. 그런 가형이 돌림병에 걸려 끝내 명을 달리했다는 소식이 전해졌을 때 관조운은 운명의 광포함에 치를 떨었다. 가져가려면 식솔이 딸리지 않고 하찮은 무예 따위에 빠져있는, 아무런 미련이 없는 제 목숨이나 가져갈 일이지. 왜 옛 연인과 그 핏줄을 남긴 채 가형을 데려간단 말인가.

관조운은 비탄에 잠길 여가도 없이 부친의 마지막 유언과 모친의 간절한 부탁으로 하산을 할 수밖에 없었다. 부친은 같이 병마와 싸우던 장자의 위급함을 알고는 차자인 조운에게 문관의 길을 유지로 남긴 것이다. 집으로 돌아와 서생이 된 조운은 서안(書案)을 앞에 두고 글을 읖조리다가도 문득 일어나 후원에서 권과 검을 휘두르는 반문반무(半文半武)의 생활을 하였다.

"운아, 나의 스승님 태허진인께서는 신체의 궁극과 정신의 궁극은 서로 통한다고 했는데, 내 너를 만나 그 이치를 조금이나마 깨닫고 가는구나."

스승은 제자를 바라보며 감회에 젖듯 천천히 말을 이었다.

"내 너를 속가제자로 남겨 둔 것은, 네 무의 자질이 뛰어나서가 아니라 무의 길에도 여러 가지가 있으니 그 중 하나가 무를 문으로 남기는 것이 중요했기 때문이란다. 태허진인께서는 무는 문의 힘을 빌리고 문은 무의 방향을 제시할 때 그때 비로소 무가 온전히 살아남는 다고 하셨단다. 내 그 길을 염두에 두고 너를 거둔 것이란다."

관조운은 스승님이 피습에 관한 얘기는 하지 않고 공허한 말을 늘어놓는 것이 답답했다. 그러나 숨 쉬는 것도 힘들어 하는 노인에게 다그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운아, 태허진인께서 남기신 ……무극진경에 대해 아는 것이 있느냐?"
"강호의 뜬소문은 들은 바가 있으나 자세한 것은 모르옵니다."
"그렇다면 내가 너에게, 무극진경의 뒷일을 부탁하마, 살수가 나를 찾아온 것은 이것 때문이었단다."
"사부님, 저는 무극진경에 그다지 욕심 없습니다. 하오니 사부님께서 진기를 회복하신 후에 천천히 말씀해 주셔도 상관없습니다."

관조운은 스승의 말이 빨라지는 것이 걱정이 되어 안심시키고자 하였다.

"애야, 진경은 너 하나만의 일이 아니란다. ……강호 전체의 일이다. 강호의 안녕이 네 손에 달렸으니, 경거망동 말고……. 결코, ……어떤 일이 있어도 남들에게 발설하지 말거라."
"……"
관조운은 말없이 기다렸다. 갑자기 스승의 얼굴이 창백해지며 숨이 거칠어 졌다. 말을 많이 한 탓인 모양이다. 스승은 물 한잔 마실 시간 동안 가만히 있었다. 제자는 곁에서 조용히 기다렸다. 스승이 제자의 얼굴 앞에 손을 들어올렸다. 제자가 스승의 손위에 자기 손을 올렸다. 스승이 제자의 손을 꽉 잡았다. 그러나 그다지 힘은 없었다. 제자는 스승의 손을 꽉 잡고 편안히 허리 옆으로 가져갔다. 그렇게 다시 뜨거운 물 한 잔 먹을 시간이 흘렀다.

사르르 눈을 감던 스승이 갑자기 눈을 떴다. 그리고 뭐라고 중얼거렸다. 알아들을 수가 없어서 관조운이 스승의 입에 귀를 바싹 댔다.

"운아야, 왕유(王維)의 시(詩)…… 춘계문답(春桂文答)이 듣고 싶구나."
"네?"

갑자기 왕유의 시라니?

"시불(詩佛)이라 일컬어지던 당나라 적 시인 왕유 말씀입니까?"

관조운은 자신이 잘못 들었나 싶어서 다시 한 번 확인했다.

"그렇다. ……한 번 읊어다오."

관조운은 더 이상 묻지 않고 시를 읊조렸다.

"중년에 들어 도를 좋아해 (中歲頗好道), 늙게야 종남산에 별장을 짓고 (晩家南山陲),"

스승이 갑자기 손을 들어 저으며 관조운의 낭송을 저지했다.

"아니, 아니, 운아야. 종남별업이 아니라 춘계문답을 듣고 싶단다."

스승님은 왕유의 시를 좋아했다. 그 중에서도 '종남별업'을 가장 좋아했다. 그래서 그 시를 읊었던 것인데 갑자기 춘계문답이 듣고 싶단다. 관조운은 춘계문답이 얼른 입에 오르지 않아 고개를 숙이고 곰곰 생각했다. 이윽고 시구가 떠올랐다.

"복사꽃 오얏꽃이 한창 향기로와(桃李正芳菲),
가는 곳마다 봄빛이 가득한데(年光隨處滿),
너만은 왜 꽃이 없는가(何事獨無花)."

관조운은 다음 대구(對句)가 시작되기 전에 호흡을 쉬며 스승님을 살폈다. 스승은 눈을 감고는 제자의 낭송을 조그맣게 따라했다. 

"봄의 그 꽃들이 어찌 오래 갈 건가(春花詎幾久),
낙엽이 우수수 가을철 되면(風霜搖落時),
내 홀로 꽃 필 것을 그대는 모르는가(獨秀君不知." ㈜
                                    
시를 읊는 동안 스승은 일부러 호흡을 가라앉히며 정신을 집중하고 있는 것 같았다. 스승의 숨결이 잦아지긴 했으나 한층 가냘퍼졌다. 이윽고 스승이 눈을 뜨더니 관조운을 바라보았다. 그 눈은 관조운에게 잘했어, 라고 말하고 있다.

십이 년 전 사서삼경을 버리고 검을 잡겠다고 찾아온 학동에게 사서삼경과 검이 다르지 않다, 무(武)에도 학(學)의 길이 있으니 책을 손에서 놓지 말라던 스승님. 그 스승님 앞에서 검결을 낭독한 후 초식을 시연하고 나면 꼭 저런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그래, 잘했어. 그때와 다를 바 없는 스승의 눈빛이 관조운 앞에서 살짝 빛이 났다가 서서히 사그라져 가고 있다.

"사부님!"

관조운은 낮고 깊게 그리고 애절함이 담긴 목소리로 스승을 불러보았다. 

스승이 감겨져 가는 눈을 다시 떴다. 관조운을 잠깐 응시하더니 이번에는 천정을 쳐다보았다. 시선이 천정에 고정되더니 이윽고 무엇인가가 눈에서 빠져나가는 것 같이 서서히 풀어졌다. 관조운은 다시 한번 깊게 불러보았다.

"사부님!"

스승은 말이 없을 뿐만 아니라 시선도 흔들리지 않았다. 다만 그때까지 잡고 있던 제자의 손만큼은 여전히 놓지 않았다. 

"사, ……사부니임."

관조운이 스승을 부르는 소리가 흐느낌으로 변하자, 장문인과 의원이 안으로 들어왔다. 의원은 일운상인 모충연의 진맥을 살펴보더니 고개를 천천히 좌우로 저었다. 연 장문인은 침대 옆에 꿇어앉아 고인을 향해 머리를 조아렸다.

-㈜ 김달진 역<당시전서(唐詩全書)>. 민음사. 1990.

덧붙이는 글 | # 다음 회에 나올 장면

“우린 은화사(銀樺司) 소속이올시다.”
“……은, 화, 사, 라면?” 사내들이 내민 패를 들여다 본 장문인은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들이 떠올리는 바로 그 은화사입니다.”
사내들의 태도가 갑자기 거만해지는 것에 비해 다른 사람들의 어깨는 한층 쳐졌다.

월, 수, 금, 주 3회 연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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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디고』, 『마지막 항해』, 『책사냥』, 『사라진 그림자』(장편소설), 르포 『신발산업의 젊은사자들』 등 출간. 2019년 해양문학상 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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