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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혹한 살수 무영객은 강호의 전설적인 비급 무극진경의 행방을 찾기 위해 은거한 고수 모충연을 암습한다. 모충연은 일격을 당한 후 제자 관조운에게 알듯 모를 듯한 말을 남긴 채 운명한다. 한편 황실의 비밀조직 은화사 역시 무극진경의 강호 출현을 눈치 채고는 관조운을 추격한다. 관조운은 살수와 은화사에게 이중으로 쫓기면서 스승 모충연이 가르쳐준 수수께끼를 풀어나가야 하는데.... - 필자말

無爲刀
▲ 무위도 無爲刀
ⓒ 황인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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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영문은 우뚝한 누각도 없이 소박한 장원처럼 낮게 웅크려 있는 모양새다. 그러나 높이 솟은 가옥이 없다뿐이지 그 넓이와 규모는 강호의 뭇 방파(幇派)와 비교해 작다고 할 수 없었다. 비영문 정문엔 좌우 양편에 각 두 명씩의 무사가 도열해 있고, 중앙에는 언제든지 뽑을 수 있도록 장검을 허리에 찬 무사가 드나드는 사람을 통제하고 있다.

관조운이 말에서 내린 다음 신원을 밝히자 빨리 안채에 모시라는 전갈을 하급무사가 입에 거품을 물고 전했다. 정문의 무사가 자기를 알아보지 못하는 것에 세월의 비정을 느낄 겨를도 없이 관조운은 장문인이 거하는 안채에 단숨에 도달했다.

"제자 관조운 문안드립니다."

문 앞에서 호흡을 가다듬고 인사를 드리자,

"사질(師姪), 들게나."

장문인 연발연(延渤演)의 나직한 목소리가 안에서 들려왔다. 연 장문인은 항렬로 볼 때 관조운의 사숙이 된다. 일운상인 모충연이 비영문을 개문(開門)할 적부터 같이 한솥밥을 먹은 연발연은 비록 무공의 뿌리는 다르지만 비영문의 역사 그 자체인 인물이다. 모충연이 은거하면서 연발연에게 장문의 인(印)을 전할 때 아무도 의의를 제기하는 않은 것도 그러한 내력을 모두가 인정하기 때문이었다. 

"장문인께 소인 관조운 인사 올립니다."

관조운이 정중히 인사의 예를 올리자 연 장문인이 손을 홰홰 저었다. 지나친 예로 인한 번거로움을 피하자는 몸짓이다.

"소협, 아니 관 공자. 오랜만이오 동안 별래 무양하셨는지요."

장문인은 강호를 떠난 관조운에게 더 이상 협(俠)이라는 칭호를 붙이지 않고 공자(公子)의 예우를 했다. 항상 조용하고 신중한 연 장문인을 보면, 이 사람은 과연 남을 향해 검이나 휘둘러보았을까 하는 의문이 들 정도 강호의 인물 같지가 않았다.

장문인의 곁에는 의원인 듯한 복장의 노인이 앉아 있고, 그 곁에는 갈건을 쓴 중년인과 무림맹 복장을 한 젊은 검객, 그리고 장문인의 뒤에 자색의 비영문 단복을 입은, 척 보기에도 혈기방장한 젊은 무사가 서 있다. 그는, 그 누구에게라도 여차하면 검을 내지르겠다는 듯 어깨에 잔뜩 힘이 들어가 있다.

"대인께서는 혼절 중이시니 지금 들어갈 필요는 없네. 일단 인사부터 하게. 이분들은 무림맹에서 오신 분들이라네."

장문인이 중년인을 향해 몸을 돌렸다.

"관조운입니다. 예전에 비영문의 제자였지만 지금은 일개 서생에 지나지 않습니다. "

관조운이 먼저 포권의 예를 갖춰 인사를 했다.

"무림맹 금릉부 지두 온철빈(溫喆彬)입니다."
"무림맹 금릉부의 요명(姚明)입니다."

중년인과 젊은 검객이 차례대로 자기를 소개한다.

"온 대협이라면, 쾌자일도(快子一刀)라는 별호로 회자되는……." 
"허허, 강호에 떠도는 허명이 부끄럽소이다."

온철빈은 답은 그렇게 했으나 자신의 별호를 알아주는 것에 은근 기분 좋은 기색이다. 관조운이 옆의 요명을 쳐다보며, "소협의 별호는 어찌되시는지요?" 하고 묻자,

"저는 별호를 얻을 만큼 강호에 뚜렷한 자국을 남기지 못했습니다."

하고 사양을 한다. 그러나 무당파의 표식인 푸른 상투끈을 보란 듯이 질끈 두른 것을 보니 무공의 자부심은 꽤나 있을 것 같다.

관조운이 의원을 쳐다보자,

"금릉부의 이름 없는 의원 원세(袁笹)입니다."

의원이 조용히 앉아서 대답한다. 장문인 뒤에 있는 혈기방장 무사는 "비영문의 제자입니다"하며 자신을 굳이 소개할만한 존재가 아라는 듯 짧게 답한다.

관조운은 이 시점에서 무림맹의 지두가 왜 여기 왔는지, 일운상인의 변고가 그들과 무슨 관계인지 궁금했으나 장문인 앞에서 따져 물을 입장은 아니었다.

"어찌된 일이옵니까, 사숙 어른."

일단 까닭부터나 알고 들어가자 싶어 관조운이 물었다.

"대인께서 자객에게 피습을 당하셨다네."
"네? 피습이라뇨? 초야에 조용히 묻혀 강호의 은원을 떠나신 분인데…….그럴만한 사유가 있으십니까?"
"우리도 그 까닭을 모르겠네. 짐작조차 가지 않고. 대인께서는 입을 다물고 계시면서 관 사질, 자네만 찾으신다네."

장문인도 의아하다는 듯 관조운을 쳐다보았다.

"사부님 상태는 어떠하십니까?"
"글쎄, 여기 계신 의원의 말씀으로는 기맥이 꽉 막히고 내장이 상해서 회복이 어려울 것 같다고 하네. 대인께서 무공을 놓으신 후 연단은 전혀 안 하신 모양이더구먼. 단전의 운기조식만이라도 꾸준히 하셨더라도 한결 차도가 있을 터인데."

연 장문인은 크게 한숨을 내쉬고 말을 이었다.

"대인께서는 혼절을 하셨다가 깨어나시기를 반복하는데, 정신이 돌아오시는 시간이 점점 짧아지고 있네. 어쩌면 최악의 경우를 대비해야 될지도 모르겠네."

"언제 변고를 당하신 겁니까?"

관조운이 다시 물었다.

"오늘 새벽일세. 비영문 장로 선임에 관한 것을 의논코자 먼저 천개를 보냈는데 바로 그 시각에 사단이 났던 모양일세. 때마침 천개가 그 시각에 들르지 않았더라면 대인께선 벌써 운명하셨을 것이네."

이때 내실에서 실처럼 가느다란 소리가 났다. 중얼거리는 것 같기도 하고 신음 같기도 한 소리였다.

"대인께서 깨어나셨는가 봅니다. 제가 먼저 살피겠습니다."

의원이 급히 일어나 내실로 들어갔다. 잠시 후 의원이 나오더니 장문인에게 말했다.

"관 공자께 연락이 닿았냐고 물으십니다."

장문인이 관조운을 쳐다보더니 몸을 돌려 문 쪽으로 갔다. 

"자, 어서."

내실 미닫이문을 직접 열고는 손으로 안내했다. 관조운이 앞서는 결례를 할 수 없어 주춤하자,

"대인께서 자네만 들어오시라고 했네. 나는 여기 있겠네."

장문인이 개의치 말라는 눈빛으로 관조운의 마음을 덜어주었다. 어쩌면 비영문에 관계되는 말은 이미 나눴을 것이고, 지금은 나에게 따로 할 말이 있으신 모양이다, 라고 생각하며 관조운은 침대로 갔다. 

삼 개월 만에 보는 스승님의 존안은 형편없었다. 침대에 눈을 감고 있는 노인은 한때 강호를 풍미했던 대인의 풍모가 아니었다. 말년에 육신보다는 정신의 함양에 더 큰 기쁨을 누리신 스승이었다. 무공이 쇠퇴한 노인은 촌부의 육신처럼 왜소했지만 무를 통해 단련된 강단만큼은 누그러지지 않았던 노인네였다. 그런데 지금 침대에 누워 있는 노인은 동짓달 청솔처럼 꼿꼿했던 강단은 어디가고 그야말로 쪼그라들 대로 쪼그라든 병약한 노인 형색이다.

관조운의 마음에 높바람이 쌩하게 불었다. 상투는 풀어져 쥐면 한 줌도 안 되는 머리카락이 한쪽 어깨 위로 쏠려 있고, 눈은 퀭하게 들어갔다. 얼굴에 상처는 없으나 자세가 굳어 있는 걸로 보아 몸 곳곳에 상처가 있음을 가늠할 수 있었다.  

이윽고 노인이 눈을 뜨더니 천정만 하염없이 쳐다보고 있다. 눈에 초점이 없다.

"사부님, 소인 운아입니다."

관조운이 노인의 귀에 대고 부드럽게 말을 건넸다. 그러자 비로소 노인의 눈에 초점이 맺히며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우, 운아니?"

노인은 힘없이 내뱉었다.

"네, 사부님. 제자 관조운이 왔습니다."

노인 아니 모충연은 가까스로 고개를 들어 관조운을 확인하듯 보았다. 모충연은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내뱉기를 반복하였다. 그러자 조금씩 화색이 돌며 눈동자에도 생기가 맺히기 시작했다.

"운아, 내가 고문을 당해 기력이 영 없구나."

모충연은 하소연 하듯 애제자를 향해 말했다.

"고문이라뇨? 어떤 놈이 스승님께 그런 몹쓸 짓을. 대체 어떤 작자이옵니까?" 

고문이라는 말을 듣는 순간 관조운이 격해져 다급하게 물었다.

"그자가 누군지. 나도 모른다. ……다만 왜 왔는지는 알겠구나."

모충연은 간밤의 장면이 떠오르는지 진저리를 치면서 말을 했다.

"운아, 내 손에서 검을 놓고 유학의 경(經)을 쥔 건 아무리 생각해도 잘한 것 같구나."

뜬금없이 노년의 삶을 이야기하자 관조운은 달리 할 말이 없었다. 그러나 속으로 치미는 화와 궁금증을 억누르기는 힘들었다.

"사부님, 대체 무슨 일이십니까? 불초 제자에게 속 시원히 털어놓아 주십시오. 제발 부탁드립니다."

제자의 애틋한 간청에도 아랑곳 않고 스승은 시선을 천장을 향했다.

덧붙이는 글 | 월, 수, 금, 주3회 연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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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디고』, 『마지막 항해』, 『책사냥』, 『사라진 그림자』(장편소설), 르포 『신발산업의 젊은사자들』 등 출간. 2019년 해양문학상 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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