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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도 더 지난 얘기다. 1988년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영국의 어느 방송사가 한국전쟁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만든 적이 있었다. 제목은 <한국, 알려지지 않은 전쟁(Korea, The Unknown War)>. 한반도 문제에 상당한 전문성이 있는 사람들이 참여해 만든 이 다큐는 당시 미국, 영국, 캐나다 등 전세계 여러 나라에서 방영되었다. 우리나라의 MBC도 이 프로그램을 수입했지만 방송으로 내보낼 수는 없었다. 심의 때문이다.

방송심의기관이었던 당시 방송위원회는 방영불가판정을 하면서 "이 프로그램이 6·25에 관한 우리의 종전 인식과 다르고 편향적 내용이어서 시청자들에게 충격을 줄 수 있다", "전쟁 미체험 세대에게 그릇된 인식을 줄 수 있다"는 이유를 달았다.

MBC는 28군데를 수정·삭제해가면서까지 방송위원회에 재심을 요청했지만, 재차 방영불가판정을 받았다. 그런데 이 프로그램은 얼마 지나지 않아 주한미군 방송인 AFKN에서 토요일마다 방송되었다. "주한미군방송에서조차 방송되는 다큐가 우리나라에서만 금지되는 이유가 뭐냐"며 방송심의가 자의적이고 정치적이라는 비판이 터져 나왔다.

규정 바꾼 방심위, 논란 일자 '민족의 존엄성' 조항 제외

징계의 기준이 무엇인지 도무지 알 수 없다보니, 제작진들은 알아서 자체검열을 하게 되고, 방송사들 역시 징계가 부당해 보여도 그저 묵묵히 받아들인다.
 징계의 기준이 무엇인지 도무지 알 수 없다보니, 제작진들은 알아서 자체검열을 하게 되고, 방송사들 역시 징계가 부당해 보여도 그저 묵묵히 받아들인다.
ⓒ sx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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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세상이 많이 좋아졌고 우리도 이제는 얼마간의 표현의 자유를 누릴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방송심의만큼은 그때에 비해 거의 나아진 것이 없어 보인다. 정권이 불편해 할 만한 내용이 방송되면 방송통신심의위원회(아래 방심위)라는 곳에서 '공정성과 객관성을 잃었다'며 여지없이 징계라는 칼을 휘두른다.

징계의 기준이 무엇인지 도무지 알 수 없다보니, 제작진들은 알아서 자체검열을 하게 되고, 방송사들 역시 징계가 부당해 보여도 그저 묵묵히 받아들인다. 괜히 징계에 대해 다투다가 정권과 불편한 관계가 되는 걸 원치 않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이 반복되면서 방심위는 방송과 인터넷에 관한 한 견제 받지 않는 권력이 되어 버렸다. 지금의 방송심의체계를 대대적으로 개혁하지 않고서는 언론의 자유는 요원하다는 이야기들이 곳곳에서 나온다.

그런 방심위가 최근 방송심의규정을 고쳤다. '헌법의 민주적 기본질서' 등 새로운 조항이 들어간 데 반해, 그간 언론단체들이 문제라고 지적했던 규정들은 대체로 살아남았다. 개정된 심의규정을 보면, 앞으로도 방심위는 그동안 해온 '정치심의'를 계속하겠다고 선언하는 것처럼 보인다. 무슨 내용들이 들어가고 무슨 내용들이 남아 있는 걸까?

애초 방심위가 입안예고한 심의규정 개정안에는 '민족의 존엄성' 조항(25조의 2)이 있었다. 방송을 할 때 '민족의 존엄성'을 해치지 말라는 것이다. 이 규정은 구체적으로 '방송은 일반적으로 인식된 역사적 사실 또는 위인을 객관적 근거 없이 왜곡해서는 안 되며', '조롱 또는 희화화해 폄훼하는 행동을 해서도 안 된다' 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근거 없이', '왜곡'하면 안 된다고 하고 있지만, 근거가 있었는지 없었는지 또는 부족했는지에 대한 판단은 제각기 다를 수밖에 없고, 이미 사실 왜곡 등의 문제를 규율하는 조항들은 충분히 있다. 그런데도 굳이 이런 조항을 심의규정에 넣겠다는 것은 결국 주류적 역사해석에 도전하지 말라는 메시지다.

실제로 지난해 민족문제연구소가 이승만, 박정희 두 전직 대통령을 비판적으로 다룬 <백년전쟁>이라는 다큐멘터리를 제작해 화제가 된 일이 있었다. 이 프로그램을 내보낸 방송사는 방심위로부터 중징계를 받았다. 방심위가 '민족의 존엄성' 조항을 심의규정에 넣으려 한 것은, 이후 <백년전쟁>과 같은 프로그램을 제재하는 수단으로 사용하는 데 주된 목적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다행히 이 규정이 입안예고 되자마자 여론의 비판이 거세게 일었고, 방심위는 일단 이 조항은 개정안에서 제외했다.

2년 전 방송된 프로그램 징계 추진하는 방심위

2012년 1월 15일 방송된 KBS 스페셜 <13억 대륙을 흔들다, 음악가 정율성>의 한 장면.
 2012년 1월 15일 방송된 KBS 스페셜 <13억 대륙을 흔들다, 음악가 정율성>의 한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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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롭게 들어간 조항 중 '헌법의 민주적 기본질서' 규정(제29조 제2항)을 보자. 이 규정은 '방송은 헌법의 민주적 기본질서를 해치는 내용을 방송하여서는 아니된다', '방송은 남북한 간의 평화적 통일과 적법한 교류를 저해하는 내용을 방송하여서는 아니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좋은 말이다.

방송이 헌법의 기본질서를 해치는 내용을 내보내는 것은 당연히 바람직하지 못하다. 그런데 '헌법의 민주적 기본질서가 무엇인지'는 누가 어떻게 판단하는가? 이렇게 추상적이고 모호한 내용이 심의 규정으로 들어가 있으면, 심의가 심의위원들 머릿속에 있는 자의적인 잣대로 이뤄질 가능성이 크다.

이것이 단순한 우려가 아님은 실제 사례로도 확인된다. 지난 2012년 KBS가 한중수교 20주년을 기념해 <13억 대륙을 흔들다, 음악가 정율성>이라는 다큐를 내보냈는데, 방심위가 이 프로그램에 대한 징계를 뒤늦게 추진하고 있다. 논란의 핵심은 정율성이 공산주의자라는 사실이다.

물론 이 프로그램은 정율성이 항일운동가이자 중국에서 위대한 음악가로 추앙받는다는 사실과, 그가 중국공산당에 가입해 한국전쟁 당시 중국인민지원군으로 참전했다는 사실을 모두 다뤘다. 그런데도 방심위원들은 "6·25에 참전한 사람을 왜 다큐로 미화하나"라며 징계를 추진하고 있는 것이다.

공산주의자에 대해 다룬 다큐멘터리는 우리 헌법의 질서를 해치는 것이라는, 이해하지 못할 사고가 심의위원 다수의 머릿속에 있는 것이다. 심의위원들 스스로 '헌법의 민주적 기본질서'라는 것이 얼마나 다양한 방식으로 이해되고 해석될 수 있는지 보여주고 있다고 하겠다. 이런 식이라면, 통합진보당에 대한 정부의 정당해산심판청구를 비판적으로 다루는 것에 대해서도 "우리 헌법의 적(敵)을 편드는 프로그램"이라며 징계할 수 있다.

방송 자유 옥죄는 규정은 그대로 남겨두고...

정작 언론단체들이 그동안 줄기차게 삭제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던 "재판중 사안" 조항은 이번 개정안에서 빠지지 않았다. 이 규정의 내용은 이런 것이다. "방송은 재판이 계속 중인 사건을 다룰 때에는 재판의 결과에 영향을 줄 수 있는 내용을 방송하여서는 아니되며, 이와 관련 심층 취재는 공공의 이익을 해치지 않도록 해야 한다." 프로그램이 진행 중인 재판에 영향을 줄 것 같으면 방송하지 말라는 것이다. 실제로 얼마 전 KBS는 <추적60분>에서 '서울시 공무원 간첩사건 무죄사건의 전말' 편을 방송했다가 이 규정 위반으로 징계를 받았다.

이 규정 역시 현실과 거리가 멀다. 방송에서 관심을 가지고 다루는 사안들 중 다수는 사람들 사이의 갈등에 대한 것이고, 그 갈등은 대개 법원에서 결말을 맞는다. 그런데 재판이 진행중인 사안에 대해 이런 규정을 두는 건, 대부분의 사회적 논란들에 대해 방송으로 다루지 말라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소송이 일단 시작되면 완전히 끝날 때까지 몇 년이 걸린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재판이 끝난 뒤에 사안에 대해 방송하는 것도 사실상 불가능하다. 이 규정은 방송의 자유를 옥죄는 대표적인 규정으로 지적되어 왔지만, 방심위는 이 규정을 그래도 남겨두었다.

사실, 심의규정이 다소 엉망으로 만들어져 있어도 심의위원들이 공정하게 심의를 진행한다면 문제는 그렇게 심각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지금의 심의위원들에게는 공정한 심의를 기대하기 어려워 보인다. 심의위원 개개인의 자질 문제보다 심각한 건, 심의위원 구성 방식이다. 9명의 심의위원 중 6명은 대통령과 여당이 추천한 인사로 채워지고, 나머지 3명이 야당 쪽 추천인사로 구성된다. 여당 쪽 위원들이 수적 우세를 앞세우면 합리적 토론과 설득이 도저히 가능하지 않은 것이다.

그간의 수많은 '정치심의'들 대다수가 다수 위원들이 밀어붙이면 소수 위원들이 반대하다가 결국 머릿수에 밀려 굴복하는 식이었다. 방송심의의 문제를 해결하더라도 방심위 구성방식을 바꾸지 않는 한 공정한 심의를 기대하기 어려운 것이다. 방송심의규정 뿐만 아니라 심의제도 전체를 놓고 대대적인 수술이 필요하다.

덧붙이는 글 | 글을 쓴 정민영 기자는 참여연대 공익법센터에서 일하는 변호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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