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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징은 화북(華北)평원에 위치하고 북쪽으로 내몽고 초원과 가깝다. 그래서 주변에 1박2일 코스로 다녀오기 좋은 초원이 의외로 많다. 주말을 이용해 선배 가족들과 바상초원을 다녀왔다. 베이징에서 직선 거리로 약 200km가 안되지만 버스를 이용하면 5시간 가량 걸린다.

한여름이 더위가 다소 물러난 9월 초, 버스가 징청(京承, 베이징-청더) 고속도로를 빠르게 지나더니 화이러우(懷柔)에서 곧장 국도로 진입한다. G111번 국도는 베이징을 출발해 허베이(河北) 북쪽지역을 지나 네이멍구(內蒙古)를 가로질러 헤이룽장(黑龍江) 서북부에 위치한 자거다치(加格達奇)에 다다르는 약 2000km의 긴 도로이다.

베이징 시내에서 북쪽을 향하면 언제나 높은 산과 마주한다. 구비구비 산을 넘고 넘어 펑닝(豊寧) 만족자치현에 도착한다. 군데군데 만족(滿族)들이 모여 사는 마을이 여전히 많다. 자치를 하는 현(縣)만 해도 전국적으로 11곳에 이른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말갈족, 여진족이다. 16세기 말 여진부족들을 통일한 누르하치는 스스로 만주족이라 불렀다. 지혜의 신으로 일컫는 문수보살의 문수(文殊)의 발음이 변화한 '만주(滿珠)'에서 기원한다. 건륭제 때 명장이던 아계(阿桂)가 찬수(纂修)한<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에 의하면 구슬 '주(珠)'이던 말이 '만주(滿洲)'로 변한 것으로 전해진다.

다탄(大灘)진 마을에 도착한 것은 12시가 넘어서이다. 다시 비포장 골목길로 10여분 달려 작은 농가원(農家院) 앞에 멈춘다. 푸릇푸릇한 초원의 빛이 따뜻하다. 서둘러 말을 타러 가자는 듯 사람들이 서두른다.

여행객들이 온 지 벌써 냄새부터 풍기는 듯. 말을 몰고 현지인들이 말보다 민첩하게 마당에 나타난다. 말 모양이나 색깔 나름대로 하나씩 골라 타고 싶지만 그저 순서대로 올라타는 것이 마음이 편하기도 하다. 백마면 어떻고 흑마면 어떻고 색깔이 있던 없던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처음 타 보는 사람도 있고 능수능란한 사람 모두 함께 마을을 벗어나 작은 개울 옆으로 영화 '초원의 빛'은 아니겠지만 마음만은 아침부터 달려온 시간만큼 마음껏 달리고 싶다.

베이징에서 5시간 거리의 바상초원. 바상초원을 즐기는 선배 부부를 태운 말과 망아지
 베이징에서 5시간 거리의 바상초원. 바상초원을 즐기는 선배 부부를 태운 말과 망아지
ⓒ 최종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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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상초원에서 승마체험 중 셀프카메라로...
 바상초원에서 승마체험 중 셀프카메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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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륜 오토바이ATV(All-Terrain Vehicle)도 있다. 초원이나 사막, 맨땅 어디라도 잘 달리는 안정한 차, 전지형차(全地形車)라고 부른다. 1시간 타는데 말이나 차량이나 가격은 비슷하다. 중국사람들 가격 책정에 아주 예민하고 합리적인 편이지만 살아있는 동물과 공업기술로 만들어진 기계 사이에 어떤 원가의 차이가 있는지는 모르겠다. 어쩌면 소비자의 수요에 맞춰 가격을 불러대는 것일 수도 있다. 농가원 주인 아주머니가 나와서 친절하게 가격책정에 개입해준다. 적어도 바가지 쓸 일은 없다.

초원과 모래가 반반 섞인 길을 천천히 걷는다. 개울물이 흘러 다소 질퍽하지만 푹푹 빠질 정도는 아니다. 마을을 벗어나 언덕 하나를 넘으니 모래 길은 사라지고 초원만 오롯이 나타난다. 초원 가운데에 우뚝 솟은 나무 몇 그루가 남아 시야가 조금은 덜 지루하다.

초록의 풀이 펼쳐진 곳과 누런 빛이 도는 곳 사이로 말들이 걷고 달렸던 길이 똑바르다. 아직 사람을 태우기에 버겁고 어린 망아지 한 마리가 뒤따라온다. 선배 부부 사진을 찍는데 어느새 옆에 곁가지로 선다. '나도 같이 찍자! 엄마랑' 말하는 눈빛이다.

문득 초원과 말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싶어졌다. 물론 나도 화면에 들어가는 장면을 남겨보려고 셀프타이머 10초를 눌렀더니 생각보다 멋진 사진이 남았다. 배가 좀 나와 민망하긴 하다.

바상초원의 모습. 억새, 야생화도 함께 초원의 모습을 이루고 있다.
 바상초원의 모습. 억새, 야생화도 함께 초원의 모습을 이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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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상초원의 모습. 언덕 위로 실루엣으로 말 탄 모습이 인상적이다.
 바상초원의 모습. 언덕 위로 실루엣으로 말 탄 모습이 인상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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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원을 만든 벌판을 사이에 둔 양쪽으로 얕은 산으로 살짝 들어간다. 아직 다 숨지 않은 야생화들이 눈에 나타난다. 반가운 꽃, 보통 패랭이꽃이라 부르는 연한 보라색 색감을 지닌 석죽이 아직 남아있다니 눈이 마냥 즐겁다. 무엇보다 능선마다 줄이어 자라난 억새풀이 장관이다. 강아지풀도 슬쩍슬쩍 제자리를 놓치지 않고 있다.

고개를 거슬러 올라 능선 높은 곳에 올라선 말과 사람들 모습이 '영화' 속 한 장면 같다. 실루엣으로 드러난 영상이 생생하게 기억에 남겠다. 멀리 벌판을 내려다 보니 초원의 모습과 완만하게 일군 밭들이 늘어선 모습이 보인다. 수확을 마쳐 맨땅을 드러낸 밭까지 그냥 멋진 초원이라기 보다는 볼거리가 많아 아기자기한 초원에 더 가깝다. 갈색 피부의 날렵한 말이 내달리니 초원다운 음향이다.

옥수수가 알곡을 살찌우는 계절이다. 푸른 잎과 누런 잎이 상존하는 옥수수 모양이 드러난 길을 따라 다시 돌아간다. 승마 경험이 많으면 모를까 이곳 초원에서 질주하는 맛을 보긴 좀 어렵다. 마부들이 말을 잡고 따라 오르내리기 때문이다. 갑자기 앞쪽에서 중국 사람들 몇 명이 질주하고 있다. 마부들에게 이야기만 잘 하면 가능하겠다 싶다.

바상초원을 뛰노는 말
 바상초원을 뛰노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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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상초원에서 말을 타고 질주하는 모습.
 바상초원에서 말을 타고 질주하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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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농가원으로 돌아와 피곤을 푸느라 잠시 숙면 후 일어나니 이슬비가 내린다. 촉촉하게 마당에 핀 무궁화 꽃을 적시고 있다. 식당 옆에는 비를 막아가며 양 한 마리가 통으로 익어가고 있다. 우리 돈으로 약 20만 원이면 한 마리 먹을 수 있다. 20여명 충분히 먹으니 1인당 1만원 꼴이면 초원의 풀을 뜯고 자란 양고기의 신선미를 맛볼 수 있다. 건륭제가 '이곳 커우즈(口子, 두 하천이 만나는 곳)에서 맛 본 술 맛은 금을 줘도 안 바꾼다'고 했다는 진커우즈(金口子) 한잔에 초원의 피로를 다 벗겨낸다.

밤새 쉬지 않고 내렸던지 초원의 아침은 촉촉하다. 죽과 만두로 아침을 먹고 이제 돌아가야 한다. 초원의 아침을 조금 맛보려고 질퍽한 길을 나선다. 안개가 자욱해 산 능선이 보일 듯 말 듯한 날씨를 바라보며 한적한 마을로 들어선다. 벌판에 내다 기르는 소 우리가 보인다. 바닥은 흙과 배설물이 섞여 더러워 보이지만 소의 얼굴을 아주 싱그럽고 깔끔하다. 적어도 얼굴은 아주 고급스런 가면처럼 산뜻하다. 아침 먹거리를 찾아 고개를 아직 이리저리 땅으로 훑지 않아서인지 얼굴이 전혀 훼손하지 않은 채 정말 잘 생겼다.

오토바이 하나가 휙 지나간 길을 따라 말 네 마리가 걸어가고 있다. 뒷모습이 질서정연하다. 흰 말, 검은 말, 연한 갈색 말, 짙은 갈색 말. 색깔도 제각각 다 다른 네 마리가 어쩌면 아침 나들이를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인상이 깊어서였을까, 함께 본 선배가 무심코 질문을 한다.

바상초원의 아침. 하얀 털이 멋진 소와 질퍽한 길을 걸어가는 네 마리 말. '쓰마 농담'의 모티브가 된 모습이다.
 바상초원의 아침. 하얀 털이 멋진 소와 질퍽한 길을 걸어가는 네 마리 말. '쓰마 농담'의 모티브가 된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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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기 말 네 마리를 뭐라 부르는지 아는가?"(진지하게)
"예?"(뜬금없다는 듯)

한참 지나도 정답이 있을 리 없다. 평소 상상력 풍부한 농담을 돌발하는 선배에게 말 네 마리는 무슨 비밀이 숨어있을지 궁금한 찰나. 정답은?

"쓰마?"('그런가?'라는 뉘앙스로)
"???" (사람마다 다르지만5~10초 동안 멀뚱멀뚱)
"하하하하,깔깔깔깔" (5~10초 후)

5초 후부터 사람들이 웃기 시작한다. 심지어 폭소에, 광분까지 한다. 중국어를 배운 한국사람은 '쓰마'라고 하면 어떤 말에 대한 응대로 '그런가?' '그렇습니까?'처럼 반문을 나타내거나,'그렇군'이란 동의를 뜻한다.'스마(是嗎?)'라고 한다.'쓰마(四馬)'는 바로 네 마리의 말을 말하며 '그런가?'로 연상하는데 딱 몇 초면된다. 본토 발음? '스'건 '쓰'건 중요하지 않다. 중국어 배웠거나 중국생활 몇 달이면 자연스럽게 아는 뜻이니 반응속도에 따라 편차는 있기만 박장대소하기 마련이다.

이번 여행의 최고의 '한수'였다. 초원의 아침에 외친 '쓰마?'가 누그러질 즈음 한 떼의 양이 진군을 한다. 수십 마리가 한꺼번에 길을 건너고 있다. 유심히 살피면 재미있다. 대장 양이 동선을 살핀 후 조심스레 길을 건너면 차례로 빗물을 뛰어넘는다. 혹시라도 미처 넘어가지 못한 양이 있을지 꼼꼼하게 살펴보는 양이 있다. 양치기는 신경도 쓰지 않는다. 또렷하게 길을 응시하며 선두를 이끄는 양, 한 놈도 빠트리지 않고 감시하는 양까지 각각 역할을 나누고 있는 것이다.

바상초원의 아침. 밤새 내린 비로 흙탕물로 변한 길을 넘어가려는 양떼들. 나름대로 역할분담을 하는 대장이 있어 무사히 다 건넌다.
 바상초원의 아침. 밤새 내린 비로 흙탕물로 변한 길을 넘어가려는 양떼들. 나름대로 역할분담을 하는 대장이 있어 무사히 다 건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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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상초원의 아침에 만난 현지 아주머니의 순박한 미소.
 바상초원의 아침에 만난 현지 아주머니의 순박한 미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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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기운이 생생한 마을에 나온 할머니도 정겨운 미소로 화답한다. 돌담 아래에 서서 장난기 어린 웃음으로 바라보는 인상이 아침 공기만큼 싱그럽다. 간밤에 내린 비로 더욱 풍성한 풀을 뜯는 말들을 뒤로 하고 이제 초원의 하루를 마친다.

바상(壩上)초원은 350㎢에 이르는 완만한 초원이다.내몽고 고원의 한 부분이긴 하지만 해발은 평균 1500m 정도의 낮은 구릉이 많다. '징베이제일초원(京北第一草原)'이라 일컬으며 관광지이자 휴양지가 곳곳에 다양한 형태로 만들어져 있다. 호수가 있고 도랑과 협곡도 펼쳐져 있으며 연못과 습지도 있는 초원이다. 사계절 훌륭한 경치를 연출하는데 취향에 맞게 제대로 찾아가면 꽤 좋은 추억을 만들 수 있다. 베이징에서 가까운 관광지로 각광을 받으며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

발을 돌려 가파른 마라산(喇嘛山) 산길을 넘고 잠시 차가 멈췄다. 서서히 안개가 걷히고 시야가 좋아지고 구불구불 산길 모습도 아름답다. 지나가는 차들이 있어 다소 위험해도 산을 넘은 기분으로 잠시 쉬어도 좋다.

조금 더 지나니 마라산 불주동(佛珠洞)과 마애조상(摩崖造像)이 보인다. 두 곳 다 가파른 절벽 위에 있어 하나만 가보기로 했다. 마애조상 석불영산(釋佛靈山) 패방 따라 가파른 암석 계단을 오르니 거대한 미륵동상과 한백옥으로 곱게 조각된 관음보살이 차례로 앉았다.가장 위 동굴 안에 앉은 석가모니 조상 앞은 10명 정도가 서면 좁아서 위험하기조차 하다.뒤돌아 보면 멀리 전경이 확 펼쳐진다.

바상초원에서 돌아오는 길에 오른 마라산석불조상에서
 바상초원에서 돌아오는 길에 오른 마라산석불조상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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땀내가 날 정도로 가파르지만 30분이면 오를 정도로 높지는 않다. 내려오는 길 옆 바위 위로 자란 와송(瓦松)이 많다. 백 년 이상 지난 지붕 위에 솟아나고 마치 탑 모양을 닮아 탑와송(塔瓦松)이라고도 불리는데 다년생 이끼류 식물로 북경 외곽에 의외로 많다. 우리나라에서는 바위솔이라 부르는데 민간에서 암 수술 후 전이방지 효과가 탁월하다고들 한다.

펑닝만족자치현으로 들어서니 점심 때이다. 투청(土城)진에 차를 세우고 식당을 찾아 들어간다. 원후이주자(文惠酒家)라는 식당인데 메밀로 만든 국수가 나온다. 한때 중국을 주름잡던 타타르족(다다족韃靼族)이 널리 보급한 메밀국수는 보통 면에 국물을 부어 먹는다. 이 식당은 면과 국물을 따로 내온다. 이런 독특한 먹거리 방식이 만주족과 연관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짜고 양념 많은 중국식당에서 나름대로 흙 냄새 나는 담백한 맛을 느껴본다.

점심을 먹고 거리로 나선다. 강아지 두 마리가 햇빛을 째고 보듬고 앉은 모습이 귀엽다. 더 귀여운 것은 강아지를 데리고 놀던 아이들이다. 강아지는 사람 냄새 나면 먼저 꼬리를 흔들지만 아이들은 부끄러워 고개를 돌린다. 그만큼 순박하다는 것일지도 모른다.

한 가족처럼 어울려 사는 양,소, 말이 있는 초원을 담아오며 한껏 웃고 농담도 좋은 추억을 가져다 준다는 걸 느낀 행복한 1박2일, 정겨운 벗들과 다시 가고 싶다.

바상초원에서 돌아오는 길에서 오른 마라산 부근에서 본 암 전이방지 효과가 탁월하다고 알려진 와송(바위솔)과 투청진에서 만난 아이들
 바상초원에서 돌아오는 길에서 오른 마라산 부근에서 본 암 전이방지 효과가 탁월하다고 알려진 와송(바위솔)과 투청진에서 만난 아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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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13억과의대화 www.youyue.co.kr 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바상초원, #베이징, #마라산, #승마, #와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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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발품취재를 통해 중국전문기자및 작가로 활동하며 중국 역사문화, 한류 및 중국대중문화 등 취재. 블로그 <13억과의 대화> 운영, 중국문화 입문서 『13억 인과의 대화』 (2014.7), 중국민중의 항쟁기록 『민,란』 (2015.11)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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