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희정씨는 웃으면서 "퇴근하면 집안 일이라는 또 다른 업무가 기다리고 있다"고 말한다.
▲ 업무하고 있는 곽희정씨의 모습 희정씨는 웃으면서 "퇴근하면 집안 일이라는 또 다른 업무가 기다리고 있다"고 말한다.
ⓒ 김재용

관련사진보기


전문 디자이너들이 참가하는 전국적인 대회에서 비전문인 출신 디자이너가 대상을 수상해 화제가 되고 있다. 주인공은 고양시 일산동에 소재하고 있는 (주)두-테크의 곽희정(37) 과장. 희정씨는 8년 동안 주부로 지내다 3년 전 디자이너로 입문했다. '경기베스트간판 공모전'에서 한글의 멋을 뛰어나게 재창조해낸 '한글을 그리다'라는 작품으로 대상을 수상한 그를 지난 11일 만나봤다.

비전공인의 대상 수상은 이례적인 일

"어디로 찾아 가면 될까요?"
"회사로 오셔도 되요."

인터뷰 장소를 회사로 정했을 때 조금 당황했다. 업무 시간에 업무 외적인 일로 직원이 외부인과 시간을 보내도 되나 하는 생각에서다. 회사를 한 번 둘러본 후 인터뷰는 근처 커피전문점에서 하면 되겠구나라는 생각에 더는 묻지 않았다. 회사는 도심에서 조금 벗어난 일산 장항동 인쇄산업단지에 있었다. 디자인하면 연상되는 세련된 거리나 빌딩의 이미지와는 거리가 있었다. 외형적으로는 공산품을 찍어내는 공장같은 분위기였다.

예상과 다르게 인터뷰는 회사 '사장실'에서 진행했다. 궁금했다. 근무중인데 업무와 관련 없는 일로 시간을 내도 될까? 아, 대상 수상자로 이름이 오르면서 회사도 함께 유명세를 타니 사장님이 특별대우를 해준 건가 보다. 하지만 그의 대답은 시원했다.

"특별 대접은 아니고요. 원래 그래요. 저희처럼 자유로운 분위기의 회사는 흔치 않을 거예요.(웃음)."

회사 원칙상 사장님이다 직원이다 이런 틀에 박힌 구조는 아니라는 거다.

"물론 개인의 상이기는 하지만 동시에 회사의 자랑이기도 해요. 하지만 개인의 능력을 최대한 이끌어내주는 우리 회사가 있었기에 저도 있었다고 생각해요."

경기베스트간판 공모전은 경기도와 옥외광고협회가 창의적이고 아름다운 간판문화조성을 위해 최근 개최한 대회다. 이번 공모전에는 전국의 지자체와 대학, 옥외광고협회 등이 128점을 출품했다.

응모작 대부분은 디자인을 전공한 학생이거나 이미 광고업계서 두각을 나타내는 기존 전문인들의 유능한 작품이었다. 이들 작품을 제치고 1등을 차지한 거다. 비전공인이 전문가들 틈을 비집고 나와 1위를 차지한 것은 업계에선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그런 사례가 아주 없었던 건 아니다. 하지만 예전의 경우는 주로 공부에만 전념할 여건에 있는 학생이거나 적어도 비슷한 분야의 경험을 소유했던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희정씨는 가정을 돌보는 일도 만만치 않는 주부의 몸이다. 8년여간 사회생활이란 건 해보지 않았다. 아이 낳고 돌보고 남편 뒷바라지만 했다. 3년 전에 도전한 옥외광고업체 취직도 희정씨에겐 "정말 모험이었다"고 한다. 무릇 어떤 일에 두각을 보이려면 둘 이상의 관련 정체성이 만나 화학작용을 일으켜야 한다. 그에겐 그런 게 없었다. 엄밀히 따지면 이제 신입 디자이너에 불과한 경력이다. 기이했다.

한글에 대한 애정과 실용적 아이디어가 호평 받아

"디자이너라고 하기에는 아직도 부족해요. 그런데 상을 받아서 저도 의외였어요(읏음). 다만 간판에 의미를 부여했다는 점에 많은 점수를 받았던 것 같아요."

평소에 한글 간판이 지닌 의미를 좋게 느끼고 있었다.

"여주에 간 적이 있어요. 여주의 한글 특성화거리라는 곳이 있거든요. 간판이 전부 한글로 되어 있어요. 필라 티월드, 외국 브랜드가 다 한글로 되어 있어요. 그냥 보면 좀 웃겨요. 처음 접하면 어색하게 느껴질 수 있는 곳인데요. 늘 영문으로만 보던 표기를 한글로 보니까 촌스러운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우리나라 한글인데 촌스럽게 볼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다른 나라에서는 한류 붐으로 한글에 열광하는데 정작 우리는 우수한 한글을 무시하는 게 이해할 수 없었다. 희정씨가 만든 간판은 단순한 간판의 범주를 넘어선다. 간판문화를 개선시키면 쾌적환 주거환경과 도시 경관을 아름답게 재생시키는데 기여할 수 있다.

"작품을 만들면서 그런 생각을 많이 했어요. 도시 경관 모델로서의 의미에 크게 기여할 수 있는 게 간판이라고 생각해요. 업소 변동이 심하면서 이사 간 업소의 간판이 그냥 남겨져 있는 모습을 보고 안타까웠어요."

간판을 쉽게 교체할 수 있도록 간판 뒷부분에 걸이 장치를 만들어 놓은 점이 호평을 받았다.

"수상 비결이요? 평소에 생각하고 있던 것을 형상화 시킨 것이니 평소에 자기 분야에 대해 꾸준히 생각하는 것이 비결인 것 같아요."

가장 궁금한 게 있었다. 상금 5백만 원은 어디에 썼을까?.

"지인들에게 저녁식사를 샀어요. 나머지는 회사 분들과 여행 가는데 사용했고요. (읏음)"

여행을 자주 간다. 적어도 일년에 한 번은 회사에서 꼭 해외연수를 보내준다고 한다. 제주도로 워크샵도 자주 간다.

"아까도 말했지만 저흰 굉장히 자유로워요. 저도 결혼하기 전에 8년 동안 직장생활을 했거든요. 근데 여기 와서 제가 적응이 안될 정도로 자유스러웠어요."

희정씨를 만나러 회사를 방문했을 때도 총 9명이라는 회사 직원은 두 명 밖에 안 보였다.

"아 사장님의 방침이 그래요. 회사 사무실에서만 앉아 있다고 업무능률이 오르는 것은 아니라는 거죠. 자신이 집중할 수 있는 공간에 가서 하는 것이 무제한 허락돼요. 나머지 분들은 지금 집에서 일하고 계세요.(웃음)"

일은 자유롭게 하되 결과만 내놓으면 된다는 거다. 일하다 막히면 명동에도 가고 인사동에도 자주 가도록 얼마든지 허락해 준다. 시원한 바람을 쐬며 시각적 자극을 받으면 한결 아이디어가 잘 떠오르기 때문이다. 사내에 놀이터까지 갖추고 있는 구글의 근무 모습이 연상됐다. 물론 희정씨 회사가 그 정도 여건을 갖춘 곳은 아니지만 일정 부분 고개가 끄적여졌다.

우울증 시달리던 주부, 맨땅에 헤딩하기

"이런 회사를 만났으니 저는 운이 좋은 편인 거죠.(웃음)"

하지만 희정씨의 '운'은 우연한 만남이 아니라 손수 달성한 성취의 성격이 강하다. 대학에서 무역학을 전공하고 결혼하기 전에 근무한 무역회사에서 8년간 일했다. 매우 열정적이었다. 무역 업무다보니 사무실에서 서류만 끄적이지 않았다. 활동의 폭과 깊이를 넓히면서 그는 점점 더 단단한 열정으로 똘똘 뭉치게 되었다. 결혼을 하면서 회사를 그만둔다고 했을 때 당시 사장은 믿지 않았다고 한다. '네가 회사를 그만 둔다고?' 6개월 정도 쉬다가 돌아오려니 생각했을 정도란다.

아이를 낳고 가정 일을 하면서 행복했다. 그러나 그 행복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어느날 20층 아파트인 집 베란다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데 뜬금없이 '저기로 떨어지면 아프려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가 '엄마 나 백 점 맞았어'라며 시험지를 들고 자랑해도 심드렁하게 대꾸하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다. 우울증이었다. 정신없이 아이를 키우고 남편 뒷바라지를 하면서 정작 자신을 잃어버린 것이다. '나는 과연 누구지' 정체성에 혼란을 느끼며 삶의 의미를 잃었다. 생기 잃은 그를 보고 주변 사람들은 '너 답지 않다'고 했다.

"동남아가 되어 버렸더군요. 동네에서 남아도는 아줌마(웃음)"

병원에 가니 의사가 강력히 권고했다. 사회생활을 꼭 해야 하는 사람이라고 했다. 그렇지 않으면 우울증이 낫지 않는다는 거다. 8년 만에 직장을 알아봤다. 하지만 생각만큼 수월하지 않았다.

"학력은 고학력이지만 딱히 어딘가에 명함을 내밀기에는 경력이 부족했어요. 그리고 주변에 인재들이 넘쳐나고. 무역업무만 했던 사람이라서 그 분야로 돌아가려고 했는데 막상 알아보니 쟁쟁한 후배들이 다 치고 올라와 있더라고요. 갈 수 있는 곳은 단순 업무만 하는 그냥 유통업체 정도밖에 없더라고요. 아니면 대부분 강남지역에 몰려 있고요. 그런 곳은 출퇴근하기에 너무 멀거든요."

양육문제 때문에 일산 중산동인 집에서 거리가 너무 떨어진 곳은 어려웠다. 그런 조건을 따지니 마땅한 곳이 없었다. 한 2년 정도 구직 기간을 거쳤다.

"그러다가 우연히 경력도 무관, 학력 무관, 주부 환영 이라는 채용 공고를 봤어요.(웃음)"

어떤 곳인지 반신반의하며 찾아 갔다.

"거기가 지금 몸 담고 있는 이 곳인 거죠. (주)두-테크의 원성호 사장은 희정씨 첫인상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다부져 보였어요. 여장부가 걸어들어오는 것 같았으니까요. 보통 젊은 여직원은 조금만 힘들어도 회사를 곧잘 그만두거든요. 그래서 일부러 주부 채용을 합니다. 주부들은 현실 적응력이 더 강하거든요(웃음). 많은 주부들을 채용해 봤지만 희정씨만큼 다부져 보이는 사람은 처음이었어요."

간판을 쉽게 떼었다 붙였다 할 수 있도록 뒷부분에 걸이 장치를 만들어 놓은 실용적 아이디어가 호평을 받았다.
▲ 대상 수상 작품인 '한글을 그리다' 간판을 쉽게 떼었다 붙였다 할 수 있도록 뒷부분에 걸이 장치를 만들어 놓은 실용적 아이디어가 호평을 받았다.
ⓒ 경기도

관련사진보기


"힘들지만 다 공부려니 생각해요"

오랜만에 직장 생활을 하니 모든 게 생소하고 적응도 만만치 않았다. 다부진 희정씨도 처음 두 달 동안은 적응하느라 애를 먹었다. 8년만의 내딛는 사회로의 첫발은 서툴렀다. 전화 받는 것조차 낯설었다. 워드프로그램의 버전도 그가 알고 있는 수준보다 천지차이로 달라져 있었다. 일반적으로 디자이너들은 컴퓨터 앞에 앉아 디자인 작업만 하면 된다는 마인드가 강하다. 하지만 현장에서는 여러 가지 작업을 같이 해야 한다. 규모가 작은 중소기업일수록 더욱 그렇다.  희정씨는 업무의 경계를 두지 않고 관련된 업무를 다 처리했다.

"주부의 힘은 다르거든요.(웃음)"

힘들지만 그래도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이 행복했다. 가장 힘든 일은 외근을 나가서 업소 사장님들을 만날 때 생긴다. 회사에서는 거리 업소를 대상으로 몇 차례 간판 정비사업을 한다. 하나의 구역을 설정해서 정비를 하는 거다. 시의 동의를 얻어 업소를 찾아가서 동의서를 받는 업무다. 즉 고객을 확보하는 영업인 셈이다.

"업소 사장님들은 대체로 환영하지는 않아요 (웃음)."

막말하는 사람도 많다고 한다. 간판쟁이라며 무시하는 일은 다반사다. 힘든 상황이 많지만 회사의 중요한 업무이기 때문에 얼굴을 찡그리지는 않는다. 그런 상황을 계기로 스스로 더 단단해지는 거라고 생각한다.

"그게 다 공부라고 생각해요.(웃음)"

회사의 분위기는 그가 오고 나서 일신했다. 회사에 활력이 생기고 미래의 계획을 새롭게 구상할 정도였다. 회사는 마음껏 자신의 재능을 개발하도록 지원을 해주었다. 매년 해외연수도 보내준다고 한다.

"사장님을 계속 자극시켰어요(웃음). 이거 하면 좋은 데 왜 안하시냐고. 이건 저렇게 하면 되는데 왜 이렇게 하시냐고.(웃음). 사장님도 통이 크신 분이라 제 의도를 간파하신 거죠. 만약 사장님이 속이 좁고 직원을 존중하지 않는 마인드를 가지신 분이었다면 저도 지금까지 이 곳에 있지 않았을 거에요."

개인적으로 희정씨는 어떤 미래를 구상하고 있을까?.

"글쎄요. 기회가 된다면 나중에 여성기업가가 되보고 싶어요. 하지만 사업한다고 했다가 괜히 망하고 사기당할 수 있으니 그냥 꿈만 그리고 있어요.(웃음)"


태그:#경기도, #간판디자인, #주부, #워킹맘, #디자이너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