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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정보원이 위험한 도박에 나섰다. 지난 대선에 개입한 혐의로 전임 원장과 직원들이 선거사범으로 기소됐고, 여야의 이해가 첨예하게 엇갈린 NLL 문건을 공개해 논란의 중심도 마다하지 않았던 국정원이었다. 그러나 지금의 국정원은 더욱 위태로워 보인다. 지난 3일 국정원이 전격 공개한 '장성택 숙청설'건이 그것이다. 국정원이 공개를 강행할 정도로 확신을 갖게 한 정보의 실체가 과연 있었는지, 유관부서와 정보공유가 제대로 되지 않은 시점에 굳이 공개를 했어야 했는지 여전히 의문이다.

세계 언론이 한국의 국정원발 장성택 숙청 뉴스를 인용하고 있다. 자체적으로 북한 뉴스를 생산할 소스가 없는 외신에서는 '북한 전문가'의 말을 인용해 분석기사를 내놓고 있다. 전문가들도 딱히 소스가 없는 상황에서 국정원 정보를 부정할 순 없으리라. 그들은 '숙청설이 사실이라면'이라는 가정 하에 김정은 체제에 대해 식견을 내놓고 있다. 그러면 그 내용을 다시 국내 언론에서 확대 재생산하고 있는 형국이다.

통일부와 조율 안 된 국정원, 위태로운 '전문' 공개

류길재 통일부 장관이 4일 국회에서 열린 외통위 '장성택 실각'관련 긴급 간담회에서 의원들의 질문에 답변하고 있다.
 류길재 통일부 장관이 4일 국회에서 열린 외통위 '장성택 실각'관련 긴급 간담회에서 의원들의 질문에 답변하고 있다.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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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일 국정원이 전격적으로 장성택 숙청설을 제기하면서 파문이 커지자 4일 대북 주관부서인 통일부 장관이 국회 긴급 간담회를 가졌다. 그러나 유감스럽게 의혹만 확산됐다. 장성택의 신변에 대해 국정원은 "실각 후 자취를 감췄다"라고 설명했지만 통일부는 "신변에는 이상이 없다"고 확인해 준 것이다. 북한을 상대하는 두 부처가 확인해준 기초 사실부터 뭔가 석연치가 않다.

류길재 장관이 언급한 장성택의 소재에 대한 발언은 이날 브리핑의 하이라이트다. 장성택의 소재에 대해 "정부는 알고 있다"고 대답했다. 이어 류 장관은 장성택 거취에 대해 알고 있으나 그것이 '가택연금' 상태인지에 대해서는 확인해줄 수 없다고 덧붙였다. 이는 앞서 국정원의 정보보다 몇 걸음 앞선 내용이다. 이 발언에 관심이 집중되자 통일부에서는 추가 설명을 통해 "그의 소재를 파악하고 있다는 의미가 아니라 신변에 특별한 이상이 확인된 것은 없다는 점을 설명한 것"이라고 해명했다. 어쨌든 "자취를 감췄다"고 설명한 국정원 설명은 뒤집은 셈이다.

사안의 본질인 '실각'에 대해서도 의견이 엇갈린다. 국정원은 장성택의 실각이 '농후'해 보인다는 표현을 사용했다. 같은 질문에 대해 통일부 장관은 "실각이 확실하다고 말한 적은 없다"고 전제한 뒤 "실각할 가능성이 농후하다"고 말했다. 통일부 장관이 전하는 메시지는 단순하다. 장성택의 거취는 안정적이다, 그리고 실각에 대해서는 가능성이 존재한다. 국정원이 전한 정보와는 의미가 확연히 다르다.

국정원이 터뜨린 정보의 내용도 물론 중요하지만 그 방법에 더욱 주목할 필요가 있다. 장성택 뉴스가 커다란 주목을 받게 되자 국정원은 이례적으로 언론에 '발표내용 전문'을 공개했다. 물론 국정원도 보도자료를 발표한다. 그러나 이런 식의 정보보고 문건을 공개하는 것은 이례적이고 여러 가지 측면에서 주목을 끌기에 충분하다. 그 나라 정보기관의 실력이 여실히 드러나기 때문이다.

이날 국정원이 발표한 전문은 총 6문단으로 구성돼 있다. 그런데 배포한 곳을 가리고 읽는다면 논리비약이 상당해 신뢰성이 떨어지는 문장으로 구성돼 있다. 첫 문단은 장성택이 김정은의 후견인이자 사실상 2인자라는 그의 북한 내 위치를 설명하고 있다. 두 번째 문단은 올해 장성택은 그에 대한 견제 분위기가 나타나면서 대외활동을 자제해 왔다는 내용을 전하고 있다(전년 대비 절반 수준).

세 번째 문단은 지난 11월 하순 장성택 심복 2명에 대한 공개처형을 했고 후속 조치가 진행 중임을 설명하고 있으며, 네 번째 문단은 북한이 장성택 측근 처형 사실을 내부에 전파하고 있고 김정은에 대한 사상교육을 강화하고 있다는 내용을 전한다. 다섯 째 문단은 12월 1일자 <노동신문>에 "김정은 유일영도체계를 철저히 세우며 세상 끝까지 김정은과 운명을 함께할 것"을 실은 것도 장성택과 관련이 있어 보인다고 전하면서, 끝으로 "현재 장성택은 모든 직책에서 해임되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의견을 소개하면서 전문을 맺고 있다.

여섯 번째 문단은 결론이니까 제외한다면 앞선 다섯 문단 중에 과연 무엇이 장성택 숙청의 근거로 세울 만한 것일까. 가장 가까운 것이 세 번째 문단이다. 심복 2명에 대한 처형이 그나마 현재 장성택의 처한 상황을 대변해 주는 내용이다. 그리고 국정원과 통일부가 동일하게 설명하고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정리하면 그의 심복 2명이 숙청됐음을 박근혜 정부가 확인했다. 그 외 본질적인 '장성택 숙청' 문제에 대해서는 국정원과 통일부가 다소 상이한 의견을 내놓고 있는 형국이다.

궁금한 점은 무엇이 국정원으로 하여금 쫓기듯 '발표문'을 언론에 공개하도록 만들었는가 하는 대목이다. 국정원은 특종을 지향하는 언론사가 아니다. 관심을 먹고 사는 연예인은 더더욱 아니다. 내부적으로 숙청에 대한 확증이 있더라도 통일부나 관련 부서와 정보교류, 업무분장 등을 통해서 착실히 대비하면 된다. 3일 갑작스레 국회 정보위원회 간사들을 불러서 설명한 것도 이해하기 어렵고, 언론사에 전문을 공개한 것도 더더욱 이해하기 어려운 행동이다.

'세계를 경악시킨 8시간의 공백' 재현하나

북한 김정은 체제를 뒷받침해온 장성택 국방위원회 부위원장의 실각설이 제기된 가운데 지난 9월 평양 김일성 광장에서 열린 북한 정권수립 65주년 기념일 행사에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과 장성택 국방위원회 부위원장(왼쪽), 최룡해 인민군 총정치국장(왼쪽 둘째)이 함께 참석하고 있다.
 북한 김정은 체제를 뒷받침해온 장성택 국방위원회 부위원장의 실각설이 제기된 가운데 지난 9월 평양 김일성 광장에서 열린 북한 정권수립 65주년 기념일 행사에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과 장성택 국방위원회 부위원장(왼쪽), 최룡해 인민군 총정치국장(왼쪽 둘째)이 함께 참석하고 있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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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정원은 어떻게 장성택 '실각'을 확신하고 공개할 수 있었나. 일부 종편에서는 감청, 휴민트(사람을 통한 정보) 등을 통해서 입수한 정보를 종합적으로 분석해서 결론에 도달했을 것이라 해석하고 있다. 그러나 중국 언론에서는 '한국의 대북정보, 그 동안 얼마나 틀렸나'를 보도할 정도로 그 종합적 해석이라는 것이 체계화된 수준은 아니다.

우리 정보기관의 대북정보력이 가장 무력하게 드러났던 때는 멀리 갈 필요도 없이 2년 전인 2011년 5월 20일에 벌어졌던 '세계를 경악 시킨 8시간의 공백' 사건이 유명하다. 북한의 VIP(김정은)가 타는 열차가 중국 국경선을 넘는 것이 확인됐다. <연합뉴스>가 긴급으로 '北 김정은 투먼 통해 방중(오전 9시 11분)'을 타전했다. 언론보도가 시작되자 정부에서는 공개적으로 브리핑을 가졌다. 통일부 대변인이 등장해서 김정은 방북을 공식 확인해줬다. '후계자 과시 의도'로 파악된다면서 방중의 의미도 친절히 알려줬다. 이때부터 내외신에서는 김정은 방중의 의미 및 향후 한반도에 미치는 영향 등에 관한 엄청난 양의 기사를 쏟아냈다.

대반전은 오후 5시 40분에 시작됐다. 최초 <연합>의 보도가 나온 지 8시간 반 만에 청와대에서는 '김정일 방중'으로 정정해 설명했다. 언론에 등장한 한 정부 관계자는 "지난해 김 위원장이 5월, 8월 두 번이나 방중해 설마 김 위원장이 또 갔겠느냐 싶어 김정은이 단독 방중한 줄 알았다"고 설명했다. 당연히 김정일이 오는 줄 알았던 중국은 한국의 대북 정보력의 실체에 대해 여실히 알게 됐을 상징적 사건이었다.

2년이 지난 지금 비슷한 일이 또 벌어지고 있다. 한국의 정보기관이 북한의 2인자가 숙청됐다는 놀라운 뉴스를 공개했다. 그런데 북한 정보에 정통한 중국 외교부 대변인은 정례브리핑에서 관련 질문을 받고 "관련 보도를 주시하고 있지만 실각에 대해 아는 바 없다"고 대답했다. 중국 관영매체들은 '평양시내 분위기가 정상적이고 평온하다'고 전했다. 일본 언론에서도 신중론이 대두되고 있다. <아사히신문>은 장성택의 실각 관련된 내용을 보도하면서 '그러나 장성택이 실각하지 않았다고 믿는 사람들도 여전히 많다'고 굳이 설명을 덧붙였다.

장성택은 과연 실각하고 숙청된 것일까? 그 대답은 지난해 7월 리영호 숙청 때와 같이 북한의 언론에서 공식 확인해 주기 전까지는 알기 어렵다. 당시 북한TV에서 관련 뉴스가 나오기 전까지 국정원에서는 인지하지 못했다. 또한 비슷한 시기 김정은 옆에서 수행하는 젊은 여성에 대해 언론에서 큰 관심을 갖고 보도했지만 국정원에서는 답을 갖고 있지 못했다. 그녀의 이름은 리설주, 김정은의 부인으로 뒤에 확인됐다.

장성택은 지난 11월 6일 공개석상에 모습을 드러낸 이후 한 달 동안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있다. 북한에서 공식 확인해 주기 전까지 '장성택 숙청'을 둘러싼 진실은 논쟁의 영역에 머물러 있을 것이다. 그 진실이 무엇이든 국정원이 보여준 이번 사건을 대하는 태도는 많은 우려를 갖게 하기에 충분하다. 유관기관인 통일부와 의견 조율이 되지 않은 상태에서 국회의원에게 브리핑했고, 관심이 증폭되자 전격적으로 언론을 상대로 '전문'을 공개했다. 중국과 일본 언론에서는 보도는 하지만 의심의 눈초리도 거두지 않고 있다.

이유를 알 수 없지만 갑작스레 장성택에 올인한 국가정보원, NLL을 둘러싼 논란이 거셀 때 전격적으로 '정상회담 대화록'을 공개한 것처럼 정보를 대하는 태도가 위태로워 보인다. 어렵사리 여야가 합의한 '특위'에서 국정원의 업무방식, 정보취급방식에 대해서도 고민해야 하는 상징적 사건이다.
첨부파일
국정원전문.docx


국정원전문



태그:#장성택, #국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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