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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왕산 은백색빛 억새물결
 화왕산 은백색빛 억새물결
ⓒ 이명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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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중순. 가을 정취를 채 느껴보지도 못한 채 가을이 뒷걸음질 치고, 성큼성큼 겨울이 다가오는 때에 창녕 화왕산을 만나고 왔다. 나날이 들녘은 휑하니 비어가고 추수를 끝낸 무논엔 황량한 바람이 불고 찬 서리 내리는 이 계절. 나무들도 마지막 잎새들을 보내며 겨울 채비를 하는 계절. 이젠 겨울이라고 훠이 훠이 부는 바람이 으르렁대며 큰소리치고 쓸쓸히 부는 바람이 마음도 우울하게 하는 11월 한 복판. 가을의 끝자락을 붙잡고 화왕산을 만났다. 가을의 뒷덜미라도 더듬어 보려는 마음으로.

"내가 제일로 좋아하는 달은/ 11월이다/ 더 여유 있게 잡는다면/ 11월에서 12월 중순이다//낙엽 져 홀몸으로 서 있는 나무/ 나무들이 개끔발을 딛고 선 등성이/ 그 등성이에 햇빛 비쳐 드러난/ 황토흙의 알몸을/ 좋아하는 것이다…"(나태주 '내가 사랑하는 계절' 중)

화왕산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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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왕산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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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역시 11월, 더 여유 있게 잡는다면 11월에서 12월 그 사이를 좋아한다. 겨우내 언 땅을 녹이며 새순이 돋고 온 천지가 개벽하듯 꽃 축제의 향연을 여는 생명의 계절 봄도 황홀하고, 이열치열 뜨거운 여름도 좋지만 '정신의 뼈대를 하얗게' 세우게 만드는 11월. 조금 우울하게 하고 춥고 쓸쓸하게 해서 가슴 안에 허공 하나 뻥 뚫린 듯 가슴을 훑고 지나가는 고독감에 마음 한구석에 저려오는 막연한 슬픔을 느끼기도 하지만 그래도 이때가 좋은 까닭은 내 정신의 뼈대가 하얗게 서기 때문이다. 이때쯤 되면 정신없이 지나온 시간 속에서 내가 찍은 어지러운 발자국을 돌아보고 내면 깊은 곳으로 침잠하게 하고 생각이 깊어지고 명료해진다. 겨울 아이인 나는 이때를 좋아한다.

부산에서 남지 IC를 지나 영산 IC를 통과해 창녕 IC로 나왔다. 창녕으로 진입해 창녕 여중 앞을 지나 자하곡 주차장에 도착. 주차장에는 가을의 끝을 붙잡고 싶은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개인 차량들과 관광버스들이 먼저 도착해 주차장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아직도 시들지 않고 마지막 불꽃을 태우는 단풍든 나무들을 바라보니 가슴이 설렜다.

화왕산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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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이면 벚꽃 터널을 이루고 꿀벌들이 날아들었던 벚나무 가로수들 아래는 벌써 낙엽이 깔렸다. 나뭇가지 끝에는 마지막 잎새들이 불꽃처럼 타오르고 있었다. 노랗게 물든 은행잎들은 수북수북 쌓여 카펫처럼 발밑이 두툼했고, 남은 잎들은 노란 불꽃으로 남은 숨을 몰아쉬었다.

화왕산을 만나러 가는 길. 이날은 자하곡 3등산로를 선택했다. 많고 많은 길들 중에 처음 가보는 길이다. 계속되는 제법 가파른 오름길이지만, 구간 거리가 그리 길지 않고 시간적인 여유도 있어 마음 느긋하게 걷는다. 동행한 사람들 모두 얼굴빛이 단풍으로 물든 것 같다. 자연의 품에 안기면 사람들 마음 빗장이 저절로 열리는 것 같다. 그것이 자연의 힘이다. 활짝 웃는 미소 속에는 가식이 없고 열린 마음으로 서로가 서로를 환대하며 반기는 가운데 오고가는 대화가 따뜻하다. 쉬어 가는 길에서 가져 온 간식을 나눠 먹고 도란도란 주고받는 대화들 속에 인정이 꽃핀다.

화왕산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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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왕산 풍경, 억새바다 같다.
 화왕산 풍경, 억새바다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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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 되는 오름길 끝에서 화왕산 정상을 만났다. 내내 숲길로 이어지다가 높은 화왕산 정상에서 드넓은 분지가 한 눈에 들어왔다. 화왕산을 올라오는 코스가 다양하듯이 만나는 곳마다 그 표정이 사뭇 다르게 와닿았다. 정상표시석이 있는 이곳에서 내려다보는 화왕산 일대는 편편하게 보이기보다는 가운데가 유독 움푹 들어가 보인다. 화왕산은 이제 억새꽃들이 거의 다 지고 남아 있는 억새들이 햇살을 받아 은백색빛으로 파도치고 있었다. 억새꽃 춤추는 곳마다 사람들 모습이 아른거렸다.

가을의 전령 억새꽃에 얽힌 추억들도 많고 많나보다. 사람들은 거의 다 지고 남은 억새 파도에 몸을 맡긴 채 옛 추억을 이야기 하고 그 이야기 속에 그리움이 묻어난다. 연인들이 이 억새길 걷노라면 잊을 수 없는 보석 같은 추억으로 가슴엔 별 하나 떠오르겠다.

"나무는/ 두꺼운 껍질로 겨울을 나지만/ 그리움 타는 나는/그대 생각으로 견딥니다/ 보고싶은 마음은/추위보다 강하니까요"('겨울에'/윤보영 시)

화왕산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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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왕산은 봄이면 진달래꽃으로 가을이면 5만 여 평의 억새의 군무로 하얗게 타오른다. 옛날에 이 산은 화산활동이 활발해 '불 뫼' '큰 불뫼'라고 불렸다고 한다. 일명 '불의 제왕'이다. 하얗게 타오르는 억새꽃은 붉게 타오르는 불꽃보다 더 열정적인 듯 느껴진다. 화왕산은 5만 여 평의 넓은 분지로 돼 있어 안온하고 평화로워 보이지만 조금만 눈을 돌려 보면 위험천만한 낭떠러지가 도사리고 있다. 화왕산의 숨은 얼굴이다. 만면엔 너그러움을 보이면서 타협 모르는 절벽 단호함을 지니고 있다. 이런 화왕산의 두 얼굴이 매력이라면 매력이겠다.

우린 화왕산 정상에 너무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 사진을 찍고 있어서 대충 둘러보고 많이 야위어지고 짧아진 햇빛 잘 드는 양지를 찾아 두런두런 모여 앉았다. 억새들 사이에 삼삼오오 모여앉아 산상 식사를 하는 시간이다. 이 시간은 빼놓을 수 없는 우리의 행복한 시간이다. 음식과 음식이 오고 가는 가운데 잔정이 싹튼다. 한참을 따사롭게 내리쬐는 11월의 햇살 받으며 휴식하고서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화왕산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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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왕산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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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산성 길 따라 억새꽃 사이를 누비며 걸었다. 화왕산 정상부의 험준한 바위산과 배바위가 있는 남봉 사이에 분지를 둘러싸고 있는 화왕산성. 분지 가장자리를 따라 축조되어 있는 산성 성곽둘레는 약 2.7킬로미터, 산성을 처음 쌓은 시기는 5~6세기쯤이라 전해진다. 따사로운 햇살이 얼굴에도 온몸에도 축복처럼 내리는 낮 시간. 억새 사이로 걸으며 우린 황홀했다. 화왕산의 억새는 키도 크기도 하다.

화왕산성 동문 옆을 돌아서 서문 그리고 하산 길로 접어들었다. 산행시간이 모처럼 아주 느긋하고 여유 있게 걸었다. 해가 있을 때 산행을 마치는 것도 참 오랜만이다. 한동안은 계속 산행시간도 길었고 제법 높은 산을 만나왔기에 발걸음도 바빴고 저녁이 되도록 걸었다. 느린 걸음 속에서 자연을 더 깊이 향유할 수 있어 좋다.

가을의 끝을 붙잡고 저벅저벅 다가오는 겨울의 문턱에서 가을의 끝자락을 부여잡고 남은 정취를 맘껏 향유했던 시간. 우리들의 아름다운 추억은 차곡차곡 쌓여간다. 먼 후일에 추억의 보석상자를 열어보면 또 다른 행복감으로 미소 지을 수 있겠다. 이제 정신의 뼈대를 햐얗게 세우게 하는 계절이다.


덧붙이는 글 | 산행수첩
1. 일시: 2013년 11월 16일(토) 맑음
2. 산행: 부산 포도원교회 등산선교회 11월 정기산행/ 44명
3. 산행시간: 5시간 20분
4. 진행: 자하곡 주차장(10:45)-도성암 입구(11:10)-화왕산 정상(12:30)-점심식사 후 출발(2:00)-화왕산성동문(2:20)-서문(2:40)-산림욕장(3:15)-화왕산장(3:40)-자하곡주차장(4:05)
5.교통: ① 부산-남지IC-영산IC-창녕IC(로 나옴)
② 입장료: 1,000원/ 주차료: 2,000원



태그:#화왕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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