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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를 먹으면 눈은 어두워지고 귀로 듣는 소리는 멀어지며 냄새도 둔감해지고 음식에 대한 입맛도 변한다고 한다. 어느새 그럴 나이가 된 것인지 실제로 보고 듣고 느끼는 감각이 무뎌졌음을 자주 경험한다. 그뿐 아니다. 감정이 없는 어눌해지는 말씨, 조금은 굳어진 얼굴 표정, 시도 때도 없이 찾아오는 망각 증세…. 어떻게 다 이를 것인가. 세월의 무상함을 절감할 뿐이다. 아마 계절에 따라 피는 꽃, 갖가지 농작물을 심어 수확하기까지의 자라는 과정을 지켜보는 보람, 사계절의 색과 소리 변화를 보는 재미 그리고 계절의 맛을 느끼게 해주는 먹거리의 즐거움마저 없다면 무상함은 더 깊어지고 삶은 더 건조해졌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시골생활은 잘된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

지난 사계를 돌아본다. 겨울은 비록 숨을 쉬어도 그 숨소리가 내 곁에 머문다. 그러나 살아있는 만물은 존재한다는 사실을 위안으로 삼으며 작은 생명의 심지를 돋우는 계절이다. 회색의 산과 들, 광야를 달리는 무사들이 휘두르는 칼끝에서 나는 쇳소리처럼 들리는 바람이 몰아치는 겨울. 그래도 한 해를 정리하며 새해를 맞는 회한과 소망이 교차하는 계절일 뿐 아니라 희망을 심는 봄을 준비하는 시간이다. 그뿐 아니다. 태양력을 기준으로 낮의 길이가 차츰 길어지기 시작하는 계절이다. 때문에 나는 사계절의 시작은 봄이 아니라 겨울 아니겠느냐는 생각을 해본다. 비록 기다림의 시간은 길고, 더러는 춥기도 하지만 그 겨울이 없다면 환한 봄이 있을 것인가!

      지난 1월에 잡은 풍경이다.
▲ 겨울 장독대 지난 1월에 잡은 풍경이다.
ⓒ 홍광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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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은 색으로 온다. 회색빛 겨울화판에 붉은 매화가 그려지면서 시작된 봄은 짙은 녹색으로 가는 여름에서 끝난 그 사이에 표현 불가능한 다양한 녹색의 향연, 피고 지는 온갖 꽃들의 잔치를 보는 즐거움. 도시 친구들은 알기 어려울 것이다. 거기에 봄바람은 만지면 말랑거릴 것처럼 보드랍고 유연하다. 또 먼 듯 가까이서 들리는 뻐꾸기 소리, 작은 벌들의 윙윙거리는 소리, 나무에 물오르는 소리까지 은근하다. 이때 산을 스치고 아지랑이를 몰고 가는 봄바람은 소리도 낮다. 서너 번 꽃샘추위가 움츠리게 하지만 그런 시새움이 있기에 봄은 더 아름다워질 것이다.

    봄의 장독대 풍경이다.
▲ 수선화 핀 계절 봄의 장독대 풍경이다.
ⓒ 홍광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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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은 소리가 무거운 계절이다. 색은 단순해지지만 맛은 풍성해지는 계절이다. 느릿하게 지표면을 겉도는 바람은 사물을 지치게 하는 열기도 있다. 그래도 그 뜨거운 태양과 바람에 오곡이 살찌는 시간이 없다면 가을은 없을 것이다.

      나무와 잔디의 색이 푸르다.
▲ 여름 장독대 나무와 잔디의 색이 푸르다.
ⓒ 홍광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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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은 원색의 계절이다. 그리고 가을은 소리가 간절한 계절이다. 흙으로 돌아가는 나뭇잎들의 수런거리는 소리, 잎이 진 가지에 부는 소슬한 바람소리…. 그래서 시인들은 회색빛 지난 일과 잊힌 사람을 생각하며 진지해지는가 보다. 감정이 무딘 노인들도 허공을 맴도는 노랗고 빨간 물든 마른 잎들을 세어보면서 지난 삶을 되돌아보고 가끔은 눈가에 맺힌 이슬을 찍어내는지 모른다. 그리고 가을은 봄에 뿌린 씨앗을 수확하는 계절이다. 쌀 콩 고구마 호박 무 배추 또 대추 감 사과 배…. 그렇게 온갖 먹을거리를 선물하는 하늘과 땅을 보며 겨울 봄 여름 그리고 가을, 나는 그렇게 가을을 사계절의 끝에 두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숙지원 주변의 가을 풍경이다.
▲ 가을풍경 숙지원 주변의 가을 풍경이다.
ⓒ 홍광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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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의 사계는 늘 감동이다. 비록 물질적으로는 넉넉하지 못해도 그 감동은 마음을 편안하게 한다. 자연의 색과 맛과 소리를 완벽하게 말과 글로 표현할 수 있다면, 그래서 시골 가을의 색과 소리 그리고 맛을 사진처럼 보여주고 새소리를 녹음처럼 들려주며 맛을 사실적으로 전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인간의 한계라는 사실을 알지만 아쉽기만 하다. 하긴 색과 맛과 소리를 완벽하게 표현하고 전할 수 있었으면 사람은 식물이나 동물과도 소통이 가능할지 모른다. 때문에 신은 인간에게 그런 능력까지 허락하지 않았는지 모른다.

얼마 전 수선화를 포기 나눔 하여 옮기고 튤립을 심었다. 달리아는 캐서 얼지 않도록 망에 담에 창고 벽에 걸어두고 생강도 종자를 따로 챙겼다. 괭이질은 내리찍는 반동의 힘과 괭이의 무게로 흙을 파는 일이다. 팔에 힘을 주면 팔은 더 아프고 땀만 많이 흐르는 일이다.
그런 사실을 깨닫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을 보냈는지!

내가 괭이질을 하면 심거나 갈무리는 아내의 몫이었다. 추운 겨울 흙속에서 생명을 키운 수선화와 튤립은 이른 봄이면 꽃을 피울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꽃을 볼 뿐 아내와 나의 땀을 못 볼 것이다. 현상은 본질에 앞서기 때문에.

밀폐된 공간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알 것이다. 알 수 없는 냄새와 먼지, 인공적인 소음, 정해진 시간 동안 자리를 떠날 수 없는 불편함을. 흙을 만지는 일 역시 쉬운 일은 아니다. 땀나는 일, 손이 거칠어지고 얼굴이 까맣게 타는 일이다. 그러나 흙을 다루는 일은 자연의 색을 보고 소리를 들으며 자연의 맛을 느낄 수 있는 일이다. 계절의 변화를 그대로 볼 수 있는 일이다.

숙지원은 일이 느리다고 채근하는 사람이 없는 곳이다. 뒷밭에 괭이를 두고 앞 텃밭에서 찾더라도 그런 나를 놀리는 사람이 없는 곳이다. 가끔 옛날 노래를 흥얼거리고 옛 일을 회상하며 혼자 웃는다고 해도 이상하게 보는 사람도 없는 곳이다. 아직 나는 곡식이 영글고 꽃이 피기 까지 사람들이 무엇을 어떻게 하는지 다 알지 못한다. 시간의 길이와 무게도 헤아릴 줄 모른다. 하지만 남은 달력을 보며 언젠가는 나에게도 그 끝이 오리라는 사실을 모르지 않는다. 그러나 계절이 바뀌고 또 세월이 가면, 나에게 남은 세월은 더 짧아지겠지만 그날을 어찌 알 수 있을 것인가! 그냥 지금처럼 흐르는 계절을 보며 기다릴 뿐이다.

2013년 11월19일 아침 장독 뚜껑위에 쌓인 싸락눈.
▲ 첫눈 2013년 11월19일 아침 장독 뚜껑위에 쌓인 싸락눈.
ⓒ 홍광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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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서리 내리고 잎진 나무에 서리꽃이 피는가 싶더니 어제는 싸락눈이 내렸다. 간밤에는 쌓인 장독 뚜껑에 보이는 하얀 눈가루, 성큼 다가온 겨울이 보인다. 도시 사는 친구에게 숙지원의 사계절을 담은 사진이라도 몇 장 보여주고 싶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한겨레 블로그, 다음카페 한종나, 다음 블로그 등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첫눈, #사계절, #장독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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