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용문사 올라가는 길. 크고 작은 은행나무들은 노란 단풍이 들어 바람이 불 적마다 우수수 떨어지고는 했습니다. 그런데 산 위에 용문사 바로 초입 머리에 서 있는 1100년 된, 일명 '천년은행나무'는 아직 단풍이 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인지 더욱 더 그 위용이 웅장해 보이면서 신령스럽기까지 합니다.

신비한 전설을 품고 있습니다.
▲ 천년은행나무 신비한 전설을 품고 있습니다.
ⓒ 김관숙

관련사진보기


천년은행나무, 하나도 변하지 않았네

남편은 천년은행나무 앞에 서자 오랜 친구를 만나기라도 한 듯이 아주 반가워하는 얼굴로 말했습니다.

"하나도 변하지를 않았네. "

내가 생각을 해도 천년은행나무의 위용은 하나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매번 단풍이 한창인 가을에 찾아오기도 했지만 오십년 전이나 이십년 전, 십년 전 그리고 칠년 전과 똑같은 모습입니다. 어쩌면 천년은행나무에 영혼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평일인데도 사람들이 많습니다. 모두들 천년은행나무를 배경으로 사진들을 찍고 있습니다. 키가 크고 잘 생긴 청년이 작은 배낭을 메고 예쁘게 포즈를 취한 긴 머리 여자에게 '치즈으~' 하고 소리 치면서 디카를 들이대자 긴 머리 여자가 '치즈으~' 하면서 활짝 웃습니다. 귀엽습니다. 그림입니다. 

"김치이이~"

까맣게 잊고 있던 목소리가 생각납니다. 오십년 전 이곳에 함께 왔던 친구들이 떠올랐습니다. 그 시절 풍습대로 카메라를 목에 건 그 사람이 우리들에게 '김치이이~' 하고 연방 소리를 쳤습니다. 덕분에 우리는 사진을 많이 찍었고, 후에 사진을 몇 장씩 공짜로 받았습니다.

'김치이이~' 가 언제부터 '치즈으~'가 되었는지를 모르겠습니다. 나도 이제부터는 구습을 버리고 '치즈으~'라고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디카를 꺼내 들었습니다. 그런데 습관은 어쩔 수 없나 봅니다. 남편이 은행나무를 뒤로 하면서 포즈를 잡자마자 나도 모르게 '김치이~' 하고 소리를 쳤습니다. 남편이 크게 웃었습니다.

남편이 만나고 싶어하던 천년은행나무 앞에 앉았습니다.
▲ 천년은행나무 남편이 만나고 싶어하던 천년은행나무 앞에 앉았습니다.
ⓒ 김관숙

관련사진보기


요즘 눈에 띄게 기력이 많이 떨어진 남편이 용문사 천년은행나무를 보러 가자고 했을 때 나는 조금 주저했습니다. 중앙선 용문 역에서 내려 용문사 인근 식당에서 나와 있는 셔틀버스를 타고 그 식당에 가서 점심을 먹습니다. 점심을 먹고 나면 그 셔틀버스가 용문사 입구에 주차장까지 데려다 줍니다. 거기까지는 편하게 자리에 앉아서 갑니다. 문제는 용문사 입구 주차장에서 용문사까지는 걸어서 올라가야만 하는데 팔순이 넘은 데다 기력이 떨어진 남편이 올라갈 수 있을지 걱정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도 남편이 자꾸 가고 싶다고 해서 길을 나섰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자비를 만났습니다. 같은 식당에서 밥을 먹고 같은 셔틀버스를 타고 용문사 입구 주차장까지 같이 온 머리하얀 할머니가 인정미 넘치는 어조로 남편에게 말을 건넸습니다.

"용문사에 올라가실 거예요?"

그 분 눈에도 고령인 남편의 건강이 안 좋아 보인 모양입니다. 남편이 자신이 없어하는 목소리로 "네" 하고 조그맣게 대답하자, 그 분은 용문사에 자주 오는 불교신도라고 자신을 소개했습니다. 자신도 용문사에 가는 길인데 어쩌면 용문사에서 나온 봉고차가 있을지도 모르니까 동승을 하자고 합니다. 나는 그만 나도 모르게 덥석 그 분의 손을 잡았습니다.

남편이 그 분을 따라 봉고차를 타러 갑니다.
▲ 왼쪽 분이 우리가 만난 자비입니다. 남편이 그 분을 따라 봉고차를 타러 갑니다.
ⓒ 김관숙

관련사진보기


매표소 건너편에서 봉고차에 오르다 말고 산꼭대기를 바라보았습니다. 용문사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부처님의 웃는 얼굴이 떠올랐습니다. 정3품인 천년은행나무도 떠올랐습니다. 봉고차는 힘들게 걸어서 올라가는 많은 사람들 사이를 지나서 용문사에 도착했습니다.

국화꽃들이 수를 놓았습니다.
▲ 용문사 대웅전 앞마당 국화꽃들이 수를 놓았습니다.
ⓒ 김관숙

관련사진보기


7년 전에는 걸음 빠른 남편이 나를 챙겼는데...

봉고차를 타고 올라온 덕분에 남편은 별로 피곤해 보이지 않았습니다. 천년은행나무 앞에서 사진을 여러 장 찍고는 돌층계를 올라갔습니다. 대웅전 앞마당은 국화꽃들로 아름답게 수를 놓아서 경내가 화려하기가 이를 데가 없습니다. 역시 많은 사람들이 사진들을 찍고 있습니다.

평일인데도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 용문사 평일인데도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 김관숙

관련사진보기


남편과 나는 7년 전처럼 경내를 구경하면서 천년은행나무와 용문사가 품고 있는 이런 저런 신비한 전설들을 되새겨 보기도 하고 모처럼 높은 하늘을 바라보면서 젊은이들처럼 웃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면서도 나는 남편이 피곤해하지 않는지를 살폈습니다. 전에는 걸음이 빠른 남편이 내 손가방을 들고 내 뒤를 따라다니면서 힘들지 않느냐 피곤하지 않느냐고 묻고는 했지만 세월이 흐르다 보니 이제는 내가 팔순이 넘은 남편을 아이를 돌보듯이 살피게 되었습니다.

이제 그만 돌아가고 싶은지, 아니면 기력이 떨어지기 때문인지 남편이 자꾸 아까 타고 올라왔던 봉고차 쪽을 바라봅니다. 나는 한 번 더 아름다운 경내를 둘러보고 싶습니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그런데 어느 순간. 그 옛날, 카메라를 목에 걸고 '김치이~' 하던 그 사람 목소리가 귀에 들어왔습니다. 뒤를 돌아보았습니다. 천년은행나무가 석탑 너머로 보일 뿐입니다. 그 사람도 천년은행나무를 만나러 오고는 하였을까. 어디서 무얼 하며 살고 있을까. 여기 오면 다시 만날 것 같은 사람입니다.

"아 뭐해? 아까 그 어르신이 저기 봉고차 앞에서 우릴 기다리고 있는데." 

남편이 앞서다 말고 돌아보며 말했습니다. 피곤기가 하나도 묻어있지 않은 반짝 물이 오른 목소리입니다. 얼마만에 들어본 물이 오른 목소리인지를 모릅니다. 얼마만에 나를 챙기는 목소리인지 모릅니다. 이 순간에 기쁨은, 쿵쾅거리는 기쁨은 아무도 모릅니다. 뒷모습을 보이고 걸어가는 남편도 모를 것입니다.

나는 부질없는 추억 쪼가리를 던져버리고 재빨리 남편 뒤를 따라갔습니다. 내년 가을에도 남편과 같이 또 올 수 있겠다는 즐거운 생각을 하면서.


태그:#용문사, #천년은행나무, #자비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일상적인 이야기들을 쓰고 있습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